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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현장] 리움미술관, ‘여전사’ 아닌 ‘사회가’로서의 이불을 들여다보다

총 150여 작품 다루는 대규모 전시 ‘이불: 1998년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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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김금영⁄ 2025.09.17 16:01:44

삼성문화재단이 운영하는 호암·리움미술관이 같은 시기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두 거장 작가의 전시를 선보여 화제가 됐다. 호암미술관은 ‘루이즈 부르주아: 덧없고 영원한’을, 리움미술관은 ‘이불: 1998년 이후’를 내년 1월 4일까지 연다.

세계무대가 먼저 알아본 작가

전시장에서 이불 작가. 사진=윤형문, 이미지 제공=리움미술관

“나는 스스로를 여전사로 규정하지 않았다.”

이불 작가의 한 마디다. 그는 1980년대 후반 사회·정치에 대한 비판을 담은 급진적 작업과 퍼포먼스로 주목을 받으며 ‘여전사’, ‘페미니즘 아티스트’라는 수식어가 따라붙게 됐다. 하지만 작가는 “당시 그 수식어들은 내가 규정하지 않았다. 그저 내게는 관심사가 있었고, 주변의 삶과 사회적 맥락에서 긴 시간 작업을 이어왔다.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내 의도와는 또 다른 문제”라며 수식어의 틀에 갇히는 걸 거부했다.

리움미술관이 이불의 방대한 작업을 한데 아우르는 장을 마련했다. 전시명 또한 ‘이불: 1998년 이후’다. 앞서 2021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작가의 1980년대 후반부터 약 10년 동안의 초기 작업과 퍼포먼스를 집중적으로 다룬 대규모 전시를 선보인 바 있는데, 리움미술관은 작가의 1990년대 후반 이후 지난 30여 년 간의 작업을 아우르는 자리를 마련했다.

'이불: 1998년 이후'전 전시장 전경. 사진=김금영 기자

1960년대 중반 한국의 정치·사회적 변혁기 속 태어난 이불은 1980년대 후반 한국 사회의 격동적 분위기 속에서 신체를 직접 매개로 삼은 퍼포먼스와 소프트 조각, 설치 작업을 선보였다. 사회 제도와 권력 구조, 젠더 문제를 과감히 드러낸 작업은 세계무대에서 먼저 주목받았다. 1997년 30대 중반의 나이에 미국 뉴욕현대미술관(MoMA)에서 전시를 열었고, 1999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대표 작가로 참여했다.

지난해부터 올해까지는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의 얼굴이라 할 수 있는 정면 외벽에 조각상들을 장식했고, 스위스에 기반을 둔 세계적 갤러리인 하우저앤워스의 전속 작가로 한국 작가로서는 처음 이름을 올리는 등 세계 최고 현대미술 작가 중 한 명으로 당당히 자리매김했다.

김성원 부관장은 “이불은 따로 설명이 필요 없는, 그 자체가 한국 현대미술을 대표한다. 국제적으로도 유명한 작가의 작품 세계를 폭넓게 조망하는 자리가 그간 해외 주요 미술관에서 많이 마련돼 왔으나, 정작 국내에서는 전시가 많이 이뤄지지 않아 아쉬움이 있었다. 그래서 오래 전부터 이불의 예술세계를 조망하는 전시를 기획해 왔다”고 말했다.

전시는 작가의 대표적 초기작인 ‘사이보그’와 ‘아나그램’, 노래방 연작과 더불어 ‘몽그랑레시’ 연작을 중점적으로 선보인다. 이를 통해 인간과 기술의 관계, 유토피아적 모더니티, 인류의 진보주의적 열망과 실패에 대한 작가의 지속적 탐구에 주목한다. 특히 전시는 연대기적 순서에 따라 작품을 설치한 것이 아니라, 작품 세계를 입체적으로 경험할 수 있도록 예측 불가능한 풍경을 보여줘 눈길을 끈다.

시공간 넘나드는 미지의 공간

길이 17m에 달하는 방대한 크기의 은빛 비행선 '취약할 의향-메탈라이즈드 벌룬'이 설치된 모습. 사진=김금영 기자

전시는 총 150여 점의 작품을 선보인다. 시작은 길이 17m에 달하는 방대한 크기의 은빛 비행선 ‘취약할 의향-메탈라이즈드 벌룬’이 연다. 이 작품은 20세기 초 체펠린 비행선을 참조했으며, 기술 진보에 대한 인류의 열망과 그 과절을 동시에 상징한다.

함께 전시된 ‘롱 테일 헤일로: CTCS #1’은 지난해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더 제네시스 파사드 커미션’을 위해 제작된 작품이다. 인체, 기계, 건축 파편과 같은 형태가 뒤섞인 형상은 인간과 기술문명, 역사와 문화의 다층적 요소가 긴 여운을 드리운 후광처럼 공존한다.

블랙박스 공간은 마치 미래로 시간 여행을 떠난 것 같다. 사진=김금영 기자

이어지는 블랙박스 공간은 마치 미래로 시간 여행을 떠난 것 같다. 우주의 미지 공간에 불시착한 느낌도 든다. 대규모 거울 설치 작업 ‘태양의 도시 II’가 공간을 채웠는데, 이 사이를 관람객은 조심조심 탐험하듯 걸어 다녀야 한다.

여기에 작가의 초기 대표작인 ‘사이보그 W6’가 어우러졌다. 작가가 1990년대 후반부터 선보여 온 사이보그 연작은 신체와 기계의 혼종성이 특징이다. 고대 조각을 연상시키는 순백의 신체 조각은 기계적으로 증강됐지만, 머리와 팔다리가 잘린 불완전한 형태를 띠고 있다. 이를 통해 작가는 우리가 꿈꾸는 미래의 이상향이 기술을 장악한 권력에 의해 결정될 수 있다는 냉소적 전망을 드러낸다.

이불 작가가 1990년대 후반부터 선보여 온 사이보그 연작은 신체와 기계의 혼종성이 특징이다. 사진=김금영 기자

이불이 1999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선보인 노래방 작업 ‘속도보다 거대한 중력 I’도 함께 배치됐다. 공상과학 영화에 등장할 법한 캡슐과도 같은 공간에 관람객이 들어가면 195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의 국제적 히트곡 중 한 곡을 정해 노래를 부를 수 있다. 이때 노래방은 가상의 개인 서사를 생성하는 장치이자, 참여자가 현실과 이상, 자신의 정체성과 환경 사이의 관계를 재구성하는 공간이 된다.

이불은 “블랙박스 공간은 영화 ‘스페이스 오디세이’에 나오는 하얀 장면처럼 모호한 상태를 의도했다. 과거·현재·미래가 혼합된 여러 장면을 연출해 과거가 지나가 사라지는 게 아니라, 늘 현재로 불러들여짐을 보여주는 구조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이불 작가가 1999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선보인 노래방 작업 '속도보다 거대한 중력 I'. 사진=김금영 기자

과거의 ‘유토피아’를 현재 돌아봤을 때

그라운드갤러리 전경. 사진=김금영 기자

블랙박스 공간을 지나 이어지는 그라운드갤러리에서는 2005년부터 전개해 온 건축적 조각 설치 몽그랑레시 연작이 중심을 이룬다. 거울과 조명으로 이뤄진 미로 구성의 ‘비아 네가티바’는 시작과 끝이 모호한 다층적인 요소로 역설의 길을 제시한다. 미로를 헤매는 관람객은 산산이 조각난 자신의 허상들과 왜곡된 경로들을 만나고 또 부정해 나가며 출구를 찾아 헤매게 된다.

몽그랑레시 연작은 프랑스 철학자 장-프랑수아 리오타르가 제시한 ‘거대 서사에 대한 불신’을 출발점으로 한다. 작가는 보편적이고 단일한 서사 대신 개인과 집단의 기억, 역사의 파편들, 다양한 사회문화적 요소를 뒤섞어 알레고리적 풍경을 구축한다는 설명이다.

거울과 조명으로 이뤄진 미로 구성의 '비아 네가티바'는 시작과 끝이 모호한 다층적인 요소로 역설의 길을 제시한다. 사진=김금영 기자

전시를 기획한 곽준영 전시기획실장은 “이불의 몽그랑레시 연작엔 러시아 구축주의, 독일 표현주의 건축가 브루노 타우트, 유토피아 문학, 낭만주의 풍경화, 한국 근현대사 등 다층적인 참조가 공존한다”며 “이 모든 것들이 서로 충돌하고 교차하는 풍경을 만들어낸다”고 설명했다.

검은 산 형태를 띤 ‘벙커’엔 작가가 유년기 시절 군사접경지역 마을에서 살면서 겪었던 시대의 경험이 반영됐다. 거울로 된 내부 공간에서 헤드폰을 쓰면 정체를 알기 힘든 여러 복잡한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작품이다. 작가는 군사정권에 의해 정치적 탄압을 받은 부모와 자주 거처를 옮겨야 했는데, 그 시기 접한 벙커는 역설적이게도 친구들과 뛰놀던, 자유로운 유토피아와도 같은 공간으로 기억 속 자리 잡았다고 한다.

검은 산 형태를 띤 '벙커'엔 작가가 유년기 시절 군사접경지역 마을에서 살면서 겪었던 시대의 경험이 반영됐다. 사진=김금영 기자

작가는 “당시 벙커에 대해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그저 늘 있던, 즐거움과 연결된 환경이었다. 성인이 돼서 다시 돌아보니 쉘터 느낌으로 전해졌다”며 “성인이 돼서 내가 느끼는 이 감정은 무엇일까 의문이 들었다”며 작업을 시작한 계기를 밝혔다.

또한 201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전개된 평면 연작인 ‘퍼듀’와 ‘무제(취약할 의향-벨벳)’도 선보인다. 이들 연작은 내용적으로는 작가의 대표적 조각 연작의 주제와 모티프를 반영하면서, 형식적으로는 회화와 조각을 넘나드는 화면을 구성하거나 자개, 벨벳 등 새로운 재료 실험을 시도하기도 한다.

이불 작가의 방대한 아카이브가 설치된 모습. 사진=김금영 기자

이처럼 전시는 어느 한 주제, 소재, 카테고리에 얽매이지 않고 ‘사회가’로서 사회의 다층적인 요소를 모두 깊이 파고드는 이불이 만들어낸 풍경들을 한가득 펼쳐놓는다.

곽준영 실장은 “이번 전시를 통해 이불 작가를 바라보던 기존의 시각에서 벗어나 미술, 건축, 문학, 사회이론과 철학적 사유를 넘나들며 인류의 과거와 현재를 성찰하고, 가능한 미래들에 대한 확장된 사유를 이끌어 온 작가의 폭넓은 작품세계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이번 전시는 리움미술관과 홍콩 M+가 공동 기획했으며, 내년 3월 M+로 이어지는 국제 순회가 예정돼 있다. 더불어 세계적 출판사 템즈앤허드슨과 이불의 첫 모노그래프도 발간해 영문·국문·중문판 동시 출간 후 불문판까지 선보일 계획이다. 한국 현대미술 작가로는 드문 사례로, 이불의 세계를 국제 담론 속에 확고히 자리매김하는 전환점이 될 전망이다.

< 문화경제 김금영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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