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용호⁄ 2026.01.06 13:55:15
국립극단(단장 겸 예술감독 박정희)이 [2026 기획초청 Pick크닉]으로 새해 문을 연다. 오는 23일 명동예술극장에서 개막하는 [기획초청 Pick크닉]은 창작공동체 아르케의 <셋톱박스>와 공놀이클럽의 <이상한어린이연극-오감도>를 초청한다.
[기획초청 Pick크닉]은 우수 연극의 레퍼토리화를 돕고 한국 연극의 세계화를 견인할 대표작의 탄생을 이루고자 국립극단이 2023년부터 진행해 온 민간극단 교류 및 정기 초청 사업이다. 겨울과 여름 시즌동안 국립극단이 고심해 직접 고른 민간극단의 작품들을 관객들 앞에 즐거운 소풍처럼 펼쳐 보인다. 미처 관객에게 닿지 못했던 우수작들을 다시 무대 위로 불러오면서, 작품의 유통경로를 확대하고 관객의 선택지를 넓혀 연극 장르의 활성화와 지평 확장에 기여해 왔다.
지난해 [기획초청 Pick크닉]은 평균 객석점유율 97%를 기록하면서 매진 행렬을 이어왔다. 민간극단이 제작하거나 대학로 등지에서 발현한 뛰어난 창작극이 초연에 그치지 않고 레퍼토리로 자리 잡을 수 있다는 가능성의 방증이다. 과감하고 독창적인 시도를 더해 초연 당시 소극장이나 특수극장에서 구현했던 형식을 500석 규모의 명동예술극장으로 옮겨오면서, 작품성이 보장된 연극은 극장을 충분히 가변시킬 수 있다는 공연예술의 유연성 역시 증명했다.
국립극단은 올해 초청작을 꼽으면서 연극 창작의 뚜렷한 정체성과 분명한 메소드를 가진 두 창작단체의 손을 잡았다. 국립극단 명동예술극장을 캔버스로 창작단체가 가진 예술적 특색과 개성을 짙게 입히고자 하는 의도다. 자신들만의 연극 방법론을 공들여 개발하고 오랜 시간 변치 않는 창작의 사명을 깊이 새겨온 창작진들의 초청으로, 관객의 연극적 경험의 확장을 이루고 한국 연극계가 가진 폭넓은 색채를 무대 위에 그려낸다.
먼저 창작공동체 아르케가 그 선발에 오른다. 만물의 근원과 본질을 뜻하는 그리스어 ‘아르케(arche)’를 이름의 어원으로 둔 극단은 “인간 존재에 대한 본질적 물음을 연극적 사유를 통해 무대화한다”라는 창작 신조로 창단 이래 18년간의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창작공동체 아르케는 연출과 소속 배우들의 활발한 공동창작 작업으로 특히 부조리한 현대 사회 속에 결핍으로 드러나는 인간 본능을 그려내는 작품들에 탁월한 예술성을 발휘한다.
오는 23일부터 2월 1일까지 국립극단 명동예술극장에서 막 오르는 <셋톱박스>(작·연출 김승철) 역시 현대인의 부조리한 자화상을 비추는 작품이다. 2020년 공연예술창작산실 대본공모 수상작인 <셋톱박스>는 작·연출을 맡은 창작공동체 아르케 대표 김승철이 직접 겪은 실화가 드라마의 토대가 됐다. 극 중에 시청한 적 없는 TV 요금이 청구되자 주인공 ‘남자’는 통신사에 전화를 건다. 기록만으로 판단하는 통신사 시스템에 부단히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남자’는 처절한 절망감과 동시에 요란한 복통을 느낀다.
<셋톱박스>는 비대면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정체성에 문제의식을 제기한 작품이다. 기록과 정보로 ‘나’를 입증해야 하는 시대, ‘나’ 자체가 아닌 ‘나의 기록된 정보’가 ‘나’인 세상인 동시대 풍경을 웃기고 아프게 담아낸다. 코로나 팬데믹이 서로 간에 거리를 만들고 언택트 문화를 앞당겨 온 시대를 살고 있는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소재다.
모던하고 세련된 극적 형식도 주목할 만하다. 소위 ‘고전의 아르케식 해석’으로 대변되는 현실 반영의 리얼리즘과는 또 다른, 색다른 면모다. <셋톱박스>는 실시간 라이브 영상을 활용하고 독특한 구도의 장면 해석으로 현실의 드라마가 초현실적 무대로 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객석이 환호하고 평단이 주목하는 영어덜트 연극의 대표주자, 공놀이클럽도 새해 명동예술극장의 문을 두드린다. 제61회 동아연극상 새개념연극상을 수상한 <이상한어린이연극-오감도>(구성·연출 강훈구)가 2월 6일부터 14일까지 전회차 ‘열린 객석’으로 관객을 맞이한다.
공놀이클럽은 “공놀이하듯 연극한다”라는 연극 철학으로 동시대의 어린이와 청소년, 청년들의 이야기를 무대에 올려왔다. 우리는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질문하는 진실한 감수성의 놀이터를 표방하며 인간 내면의 진실을 유머와 경쾌한 리듬으로 그려내고,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독창적인 연극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열린 객석] <이상한어린이연극-오감도>는 한국 최초의 어린이 공동창작 연극으로, 시인 이상의 시 ‘오감도’를 영감의 원천으로 삼아 어린이극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오디션부터 배우 자신들의 이야기를 담은 대본 개발까지 어린이 배우들의 공동창작 작업이 이뤄졌다. 어린이들의 고민과 생각을 담은 희곡은 정형화된 어린이청소년극의 틀을 깨고 어른들이 만든 세상에 어린이들이 던지는 생생한 질문과 낯선 세계를 보여준다.
연극의 제재가 되는 ‘오감도(烏瞰圖)’는 시인 이상이 1934년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한 15편의 연작시이다. 원래 30편을 계획했으나 무슨 내용인지 알 수가 없다는 독자의 항의가 빗발쳐 연재가 중단됐다. 시인 이상은 이 난해한 시로 ‘어떤 그림’을 완성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어떤 독자’를 만들고자 했다는 데에 있어, 강훈구 연출 역시 굳이 오감도를 해석하지 않고 ‘질주한다’는 싯구를 그대로 차용해 무대 위 행동으로 옮겼다.
어린이와 어른 배우들은 어수선하고 시끌법석하게 무대 위를 질주하며 무섭고 두려운 것들을 읊는다. 태어나는 것부터 나이 드는 것까지, 부모, 친구, AI, 꿈, 전쟁, 나 자신까지, 세상은 무서운 것 천지다. 어린이 배우의 욕망과 두려움이 투영된 무대는 지극히 현실적인 어린아이들의 생각과 삶을 보여주지만, “사실은 우리 모두의 이야기”로서 연극은 우리 어른과 사회가 내포한 이야기로 치환되고 확장된다.
고정된 레퍼토리가 아니라 동시대의 사회적 이슈를 담아내는 공공예술 프로젝트로 일컬어지는 [열린 객석] <이상한어린이연극-오감도>는 이번 [기획초청 Pick크닉]에서는 이전 시즌들과는 또 다른 새로운 에피소드를 선보인다. 변화하는 시대의 감각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현재를 사유하기 위한 새로운 이야기와 질문으로 관객과 소통을 계획하고 있다.
[열린 객석] <이상한어린이연극-오감도>는 어린이의, 어린이에 의한, 어린이를 위한 공연인 만큼 관람 제약을 최소화하는 열린 객석을 전회차 진행한다. 공연 중간에도 자유로운 입퇴장이 가능하고 관객이 소리를 내거나 좌석 내에서 몸을 뒤척여 움직일 경우에도 제지를 최소화한다. 극장 환경에 관객이 편안하게 적응할 수 있도록 음향과 음악 효과를 부드럽게 조정하고 객석 조명도 어둡지 않게 유지한다. 명동예술극장 1층과 4층에 마련된 관객 휴식 공간은 공연 전후뿐만 아니라 공연 중에도 관객이 자유로이 이용할 수 있다.
국립극단은 [기획초청 Pick크닉] 초청작의 공연 제작비를 지원하고 국립극단 명동예술극장의 공연장 제반 시설과 무대 사용을 제공한다. 국립극단 박정희 예술감독은 “자신들만의 뚜렷한 창작 정체성과 예술 신조를 지니고 연극의 본질을 깊이 고민하는 창작단체들의 작품이 새해 명동예술극장의 첫 막을 올린다는 데에 의미가 있다. 국립극단은 앞으로도 한국 연극의 자아를 보여줄 수 있는 굳건한 연극들을 무대에 담아내고자 한다”라고 초청 사유를 말했다.
<문화경제 안용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