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NB=왕진오 기자) 옛 명필들의 글씨를 모사하거나 탑본하여 만든 서첩이 ‘법첩’이다. 모사와 탑본은 전통 복제 방법이다.
법첩은 명필의 글씨를 안전하게 보존하며 감상하기 위해 글씨를 모사해 부본(副本)으로 만든 것으로, 보다 편리하게 감상하고 보관할 수 있도록 책 모양으로 만들면서 발전했다.
법첩을 통해 옛 명필의 글씨를 감상할 수 있는 전시 ‘서예의 길잡이 중국 법첩(中國法帖)’전이 12월 16일 국립중앙박물관(관장 김영나) 상설전시관 1층 테마전시실에서 막을 올린다.
이번 전시에는 중국 역대 서가들의 필적이 담긴 ‘순화각첩(淳化閣帖)’을 비롯하여 왕희지(王羲之, 303~361년)의 행서(行書)를 집자(集字)한 ‘대당삼장성교서(大唐三藏聖敎序)’, 구양순(歐陽詢, 557~641년)의 ‘황보탄비(皇甫誕碑)’, 안진경(顔眞卿, 709~785년)의 ‘다보탑비(多寶塔碑)’ 등 중요 서예가의 법첩 30여 점이 소개된다.
법첩은 옛 명필의 글씨를 감상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작품이 없어졌을 때는 진품(眞品)의 글씨를 확인할 수 있어 옛날에 만든 법첩일수록 특히 수장(收藏) 가치가 높다.
서예가 법첩으로 제작한 것은 오대십국(五代十國, 907~960년) 시기 때부터이며, 북송(北宋, 960~1126년) 태종(太宗) 순화(淳化) 3년(992)에 발간된 ‘순화각첩(淳化閣帖)’은 법첩 제작의 기준이 됐다.
법첩은 원(1206~1368년)과 명(1368~1662년) 때 매우 활발하게 제작되었으며 청(1616~1911년)에 이르러도 계속됐다.
서예가들은 법첩으로 과거 명필의 글씨를 연마하는 동시에 법첩을 연구 영역으로 발전시켰으며 이러한 가운데 법첩의 제작도 활기를 띠었다.
청대에 이르면 법첩을 애호하는 분위기는 첩학(帖學)의 발전과 함께 하며 융성했다. 이후 서예의 전통을 북위(北魏, 386~534년) 비석에서 찾아야 한다는 완원(阮元, 1764~1849년)의 ‘북비남첩론(北碑南帖論)’을 바탕으로, 법첩의 글씨는 모각을模刻을 되풀이하여 이미 원형에서 멀어졌다는 비판을 받았고 상대적로 낮게 평가됐다.
이런 가운데 근대적 인쇄술의 등장으로 전통적인 등장으로 전통적인 법첩은 더 이상 제작되지 않게 됐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법첩과 비첩을 아울러 모두 법첩이라 부르며 특히 서예 학습에서 광범위하게 활용된다. 서예 공부의 기본이 되는 중국 법첩은 한국에도 보급됐다.
한국은 문(文)을 숭상하고 학문에 대한 존경심이 깊어 중국 서예를 중시하는 한편으로 한국의 역대 명필의 필적을 법첩으로 제작하여 한국 서예를 계승하기도 했다. 전시는 2015년 3월 15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