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NB저널 = 김금영 기자) 목욕탕에 간 아버지와 아들. 처음엔 서로 어색한 것 같다. 그런데 이내 서로 등을 밀어주고 욕탕 안에서 잠수 대결을 펼치기도 한다. 어머니와 아들, 또 아버지와 딸과는 다른, 아버지와 아들만이 가질 수 있는 관계다.
연극 ‘아들’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만났다. 장진이 극본/감독을 맡고 차승원, 류덕환 주연의 영화 ‘아들’이 연극으로 재탄생됐다. 스물네 살 때 강도 살인으로 무기징역을 받고 서른아홉까지 15년째 감옥살이를 하고 있는 아버지 강식과 아들의 기적 같은 하루를 그린다.
강식은 아들 준석이 세 살 때 헤어졌다. 그런 그에게 특별 귀휴 대상자로 선정되는 단 하루의 시간이 주어진다. 그 사이 준석은 사춘기 시절을 겪는 소년으로 어느덧 성장해 있다. 아버지와 아들은 각자 설레는 시간을 보낸다. 준석은 친구에게 “어떡하지? 어색할 것 같아” 라며 발을 동동 구르고, 강식은 내내 들뜬 표정을 감추지 못한다. 하지만 막상 학교 앞에서 이뤄진 이들의 첫 만남은 어색하기만 하다. ‘아들, 아빠다’라는 종이를 들고 자신에게 손을 흔드는 아버지의 옆을 준석은 굳은 표정으로 지나친다. 끈끈하고 애틋한 부자간의 관계는 단지 피로만 형성될 수 있었던 게 아니었던 것 같다.
15년 만에 집에 들어선 순간 아버지였던 강식은 자신의 노모(老母)를 마주하며 자신 또한 아들로 돌아간다. 치매로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지만 “아들 왔어요”라며 응석도 부리고, 죄책감에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그리고 이런 모습을 강식의 아들 준석이 바라본다. 과연 하루 만에 이들이 과연 가까워질 수 있을까?
하루라는 시간은 긴 듯 짧다. 영화는 이 시간을 길게 표현했다. 장면마다 장소가 바뀌고 배우들 얼굴을 클로즈업하며 미묘한 감정의 변화의 순간들을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포착해 보여줬다. 연극에는 100분이라는 제한된 시간과 제한된 세트가 존재한다. 그래서 영화와는 또 다른 방식을 취했다. 일단 영화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한 대본에는 굉장히 충실하면서 영화와 완전히 다르다는 이질감은 피했다. 기존 영화를 기억하는 팬들을 위한 배려 같다.
대신 연극 무대에서만 보여줄 수 있는 연출을 선보이며 연극 ‘아들’만의 매력을 찾았다. 노래를 부르며 극의 전체적인 흐름을 설명하는 준석의 친구가 무대 위쪽에서 계속해서 자리를 지킨다. 또한 일시정지처럼 모든 배우들의 움직임이 멈출 때가 있다. 이 순간의 정적에서 강식 또는 준석이 객석을 바라보며 자신의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는다. 강식은 “준석이가 나를 아버지라 불렀습니다” 하며 기쁜 마음을 털어놓고, 준석은 “아버지라 불렀습니다” 하며 부끄러운 내면을 관객에게 이야기한다. 그러고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애써 마음을 감추는 모습으로 돌아간다.
일시정지 멈추는 장면 속 배우들의 방백과
이야기를 노래로 푸는 장면은 연극만의 묘미
정태영 연출은 “장진 감독의 영화 시나리오를 갖고 작업을 했다. 대본에 충실하되 영화에는 없지만 해설자 겸 진행을 할 수 있는 역할을 무대에서 만들었다. 영화는 많은 장면을 보여줄 수 있지만, 연극은 시공간적으로 한계가 있기에 대신 더 느린 템포를 갖추는 시도를 했다. 배우들이 잠시 멈춰서 생각을 말하는 장면이다.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 속 이 느린 템포 속 관객들이 잠시나마 자신의 가족을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했다”고 연출 주안점을 밝혔다.
연극임에도 불구하고 노래를 집어넣은 이유도 있다. 정 연출은 “뮤지컬처럼 마이크를 사용하지 않고 배우들이 그냥 노래를 부른다. 어린 날에 동요를 부르듯 생목소리로 부르게 했다. 느린 템포 속 잔잔한 노래가 어우러지며 더욱 아버지와 아들 사이 간의 미묘한 변화를 느끼고 더욱 감동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랐다”고 말했다. 이어 “노래 가사는 영화에도 나오는 내레이션 장면에서 영감을 받았다. 새에 비유해 가족의 이야기를 하는데, 이것을 가사로 풀고 연극 무대에도 지붕에 새 모양의 설치물을 넣는 등 영화를 바탕으로 연극만의 무대를 살리기 위해 노력했다”며 영화와의 연결고리를 설명했다.
인기 원작은 든든한 버팀목이자 부담이 될 수도 있는 양날의 검이다. 원작의 팬들을 끌어 들이는 좋은 결과가 있는가 하면, 하나하나 원작과 비교 당하며 혹평에 오르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정 연출은 부담보다는 작업 과정의 즐거움을 말했다. 앞서 인기 드라마 ‘해를 품은 달’을 뮤지컬로 선보인 경험도 있다. 정 연출은 “인기 원작이 있으면 부담에 대한 이야기가 흔히 먼저 나오는데, 오히려 인기 콘텐츠가 다양하게 재해석돼 선보이는 건 좋은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볼거리가 그만큼 다양해지는 것이니까. 그만큼 좋은 소재가 무대화 된다는 측면에서 이번 작업도 즐겁게 했다”고 말했다.
이어 “영화를 연극적인 문법으로 풀어내고, 이 과정 끝 탄생한 작품을 관객들이 본다. 영화와는 또 다른 매력의 콘텐츠를 만날 수 있는 것이라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음악, 빛 등과 배우들의 연기가 어우러져 나름의 새로운 매력도 갖췄다. 배우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함께 만든 공연”이라고 덧붙였다.
원작 영화에 차승원과 류덕환이 아버지와 아들로 있었다면, 연극에서는 조덕현과 홍희원이 아버지로 등장하고, 박정원, 김윤호, 백형훈, 손범준이 아들로 등장한다. 여기에 치매에 걸린 가운데 아들에 대한 애틋한 사랑을 간직한 강식의 어머니를 연기하며 애절함을 더한다. 무겁게 흐를 수 있는 극에 활력을 불어넣는 건 최성원과 장태성의 몫이다. 15년 만에 세상 밖으로 나오는 강식으로 도와주는 박교사 역할이다. 피가 섞이지는 않았지만 강식의 가족과 함께 하루를 보내면서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하며 마치 가족이 된 듯한 조화를 이룬다.
조덕현은 공연 시연 도중 폭포와 같은 눈물을 쏟아내기도 했다. 그는 “이 공연을 하면서 나도 한 명의 아들로서 어머니를 많이 그리워하면서 연기했다. 극 중 노모의 눈빛을 보고 속에서 많이 울컥하기도 했다. 난 불효자식이었다. 나와 같은 자식들이 공연을 보고,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많이 찾아가길 바랐다”고 말했다.
홍희원은 실제 자신의 아들에 대한 애틋한 감정을 느꼈다고. 그는 “나도 결혼해서 자식 있는 입장이다 보니 극 중 아들 준석과의 관계에 많은 관심이 갔다. 실제 아들과 긴 세월 보지 못하고 보면 어떨까 생각하니 괴롭기도 했다. 아버지와 아들, 또는 어머니와 아들이 공연을 보며 서로에 대한 소중함을 갖고 하루를 더 소중하게 보내기를 바라는 마음이 공연 내내 간절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연극으로 재탄생된 ‘아들’은 영화와는 색다른 구성 방식으로 나름의 차별화를 갖췄다. 하지만 영화, 연극이 모두 말하고자 하는 바는 같다. 누군가의 아들, 또는 딸로서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가족에 대한 애틋한 사랑을 일깨운다. 공연은 대학로 아트원씨어터 1관에서 7월 24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