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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정의 요즘 미술 읽기 - 변화된 인간의 모습] 현대미술은 왜 아름답지 않은 사람도 그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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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523호 이문정(미술평론가, 컨템포러리 미술연구소 리포에틱 소장)⁄ 2017.02.20 10:01:42

(CNB저널 = 이문정(미술평론가, 컨템포러리 미술연구소 리포에틱 소장))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과거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언제나 미술의 중요한 주제이자 소재이다. 미술사 책의 가장 앞 페이지를 차지하고 있는 라스코(Lascaux) 동굴벽화, 홀레 펠스의 비너스(Venus of Hohle Fels)나 빌렌도르프의 비너스(Venus of Willendorf) 같은 조각상 등은 인간이 스스로를 표현한 오랜 역사의 증거들이다. 작품을 제작하고 감상하는 주체가 인간이니 이는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리스 시대 이후 확립된 서구의 인본주의적 세계관은 인간의 존엄성을 중시하는 태도를 갖게 했고 이것은 예술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이에 몸과 정신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아름답고 완벽한, 이상적인 인간상을 재현하는 전통이 만들어졌다. - 중세시대를 제외하고 - 19세기까지 대부분의 전통적인 미술들은 숭고한 정신과 영혼을 갖춘 인간의 모습을 담아내는 것을 최우선의 목표로 삼았다. 그리고 완벽한 인간상을 재현하다보니 언제, 어디에서, 누가 보아도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이야기 - 그리스 신화, 기독교 교리, 중요한 역사적 순간 - 속 주인공들이 주로 그려졌다. 동시에 보편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한 여성의 누드도 중요한 소재였다. 이러한 시대의 미술에서 아름다운 인간은 선(善), 그렇지 못한 인간은 악(惡)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실제로 당시에 그려진 악마나 괴물의 형상을 보면 이상적인 비율과 거리가 있다거나 인간과 동물이 섞인 잡종과도 같은 모습이다. 

이후 감정과 내면을 담아내는 것이 미술의 주된 목표라 생각했던 낭만주의(Romanticism)와 표현주의(Expressionism) 미술의 부상으로 형태가 왜곡되거나 변형된 인간이 등장하게 되었다. 뭉크(Edvard Munch)나 키르히너(Ernst Ludwig Kirchner) 등의 작품이 여기에 해당한다. 모더니즘(modernism) 미술에서는 특별한 메시지나 감정, 영혼과 정신을 담아내기보다는 순수한 형식적 실험을 위한 소재로서 인간이 다루어지기도 했다. 예를 들어 마티스(Henri Matisse)가 그려낸 인간상들은 형태가 일그러져 있지만 악한 인간을 표현한 것도, 격한 감정을 담아낸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급진적인 형태 실험과 색채 실험을 위한 것이었다. 

▲육심원 개인전 ‘육심원의 미소가 주는 치유(Smile with Healing)’(2014년) 전시 모습. 도판 제공 = 갤러리에이엠(GalleryAM)

미술에 등장하는 전통적인 인간의 모습이 본격적으로 변하기 시작한 것은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세계관이 널리 퍼지면서부터이다.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는 이분법적으로 엄격히 분리된 가치 체계, 보편적인 질서와 정답에 대한 회의를 바탕으로 모든 것을 새롭게 보고자 한다. 인간의 모습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는 영웅만 있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인간들도 존재하며 그들의 모습도 이 세상의 중요한 일부라는 인식의 변화를 가져오게 된 것이다. 이제 인간은 실재하는 세계와 그 안에 담긴 다양한 이슈들을 고민하기 위한 소재로 거듭나게 되었다. 이에 일반적으로 생각하기에 아름답지 않다고 여겨지는 불편한 모습의 인간들, 영웅이 아닐뿐더러 심지어 무가치하다고 여겨지는 존재, 전통적인 미술에서는 결코 다루어지지 않는 인간들도 미술의 주인공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여기에 해당하는 대표적 작품으로 안드레 세라노(Andres Serrano)의 ‘노마드(Nomads)’ 시리즈(1990)와 ‘뉴욕의 거주자들(Residents of New York)’ 시리즈(2014)를 들 수 있다. 이 작업들은 실제 뉴욕에 거주하는 노숙자들의 초상 사진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서 투명인간처럼 여겨지는 사람들이 있음을 인식시킨다. 또한 노숙자와 관련된 사회적 문제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심지어 세라노는 ‘시체 안치소(The Morgue)’(1993) 시리즈에서 세상을 구한 영웅의 죽음이 아닌 평범한 사람들의 죽음을 담아냈다. 관객을 두려움과 숙연함이라는 감정에 휩싸이게 하는 ‘시체 안치소’는 인간을 죽음으로 이르게 하는 원인들, 죽음 후의 인간의 모습을 통해 실재하는 인간 존재를 대면하게 한다. 존 코플란(John Coplans)의 사진에 등장하는 나이든 인간의 모습 역시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 가능하다. 닉슨의 아내와 그녀의 세 자매들을 매해 촬영한 니콜라스 닉슨(Nicholas Nixon)의 ‘브라운 자매(The Brown Sisters)’ 시리즈(1975-ongoing)에 담겨 있듯 나이 들어가는 인간, 죽음을 맞이하는 인간의 모습이야말로 가장 보편적인 것이다. 평범한 소시민을 주인공으로 다루었던 우리나라의 대표적 작가로는 구본주를 들 수 있다. ‘배대리’ 시리즈와 ‘미스터 리’ 시리즈는 고단하지만 소중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샐러리맨들을 향한 작가의 애정 어린 시선, 그들에 대한 깊은 이해, 사회에 대한 냉철한 인식 모두를 담아낸다.  

▲신정은, ‘Candy 1’, resin, 12 x 55(h) x12cm, 2013. 도판 제공 = 신정은 작가

절대적인 미와 추는 불가능하다는 변화된 태도도 미술 속 인간상을 바꾸는 데에 일조했다. 사실 미라는 것은 지극히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가치이다. 시대와 지역에 따라 전혀 다른 기준이 적용된다. 그럼에도 우리는 끝없이 획일화된 미를 강요당하고 강요한다. 

거대한 캔버스를 가득 채운 육중한 제니 사빌(Jenny Saville)의 여성상들은 오늘날 추앙받는 여성들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그녀들을 바라보는 관객들의 편하지 않은 시선은 미에 대한 고정관념 속에 빠진 우리를 되돌아보게 한다. 루벤스(Pieter Paul Rubens)의 작품 속 여성들이 오늘날 부활한다면 어땠을까? 한 번쯤 생각해볼 일이다. 신정은은 인형을 통해 늘 자신의 외모 어딘가가 부족하다고 느끼는 현대인들을 담아낸다. 편견을 버려야 한다고 말하는 이 시대에도 여전히 특정한 외모가 선호된다. 대중매체는 개성을 찾으라고 말하는 동시에 선호되는 외모를 부각시킨다. 외모를 가꾸어야 한다고, 그렇지 않으면 도태된다고 우리를 세뇌한다. 사회에서 요구하는 특징들을 조금은 과하게 갖춘, 여러 개의 머리를 가진 신정은의 인형들은 외모에 대한 자신의 욕망이 어디에서부터 시작된 것인지 알지도 못한 채 갈망하는 분열된 현대인의 자아를 풍자한다. 한편 밝고 경쾌하게 새로운 여성상을 그려내어 다양성을 실현하는 미술가도 있다. 대중적으로도 큰 사랑을 받고 있는 육심원이 대표적이다. 육심원이 그려낸 여성들은 서로 다른 외모만큼 자신들을 꾸미고 있는 모습도 제각각이다. 장난기가 가득한 눈매로 당당하게 정면을 바라보며 미소 짓는 그녀들은 무척 행복해 보인다. 획일화된 전형을 따르지 않고, 각자의 개성과 성격에 맞게 자기 자신을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당당한 우리 모두가 아름답고 의미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미술 속에 담긴 인간 모습의 변화를 짧은 글로 다 적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오늘날의 많은 미술가들이 영웅이 아닌 평범한 범인, 유한한 인간도 유의미함을 보여준다는 사실이다. 거울을 한 번 보자. 거울 앞에 선 당신은 그 자체로 소중하다. 우리 모두는 다 의미 있는 주인공들이다. 

(정리 = 최영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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