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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윤기 변호사의 법률이야기] 사기 당해 재산 잃었어도 사기로 처벌 못하는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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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525호 고윤기 로펌고우 변호사⁄ 2017.03.06 09:41:07

(CNB저널 = 고윤기 로펌고우 변호사) 형사사건 상담을 하다보면, “어쩔 수 없습니다. 이건 고소가 되지 않는 사안입니다”라고 말해야 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단호하게 나오면, 내담자들은 원망의 눈빛을 보냅니다. 종종 “네가 판사냐?”라시며 큰소리를 내는 분들도 계십니다. 

저는 제가 판단하기에 안 된다고 생각되는 사건을 그냥 맡았다가는 낭패를 볼 수도 있기 때문에 단호히 거절하고 있습니다. 물론 나중에 알아보면 제가 거절했던 사건을 누군가 진행하고 있는 경우가 있어, 좀 씁쓸한 적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사실 당사자들이 화내는 것도 이해가 되는 것이, 보통 사람이 보기에, 아니 변호사가 보기에도 억울한 경우이기는 하지만, 우리 판례나 실무에서 죄가 안 되는 것으로 굳어진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대법원의 판례가 바뀐다면, 억울함을 풀어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변호사의 입장에서는 이 사건을 대법원까지 진행하면서 당사자가 물적·심적으로 고통 받는 것과, 판례가 바뀔 가능성 등을 고려해서 당사자에게 알려줘야 합니다.

사기죄와 처분의사

최근에 대법원에서 사기죄와 관련한 판례의 변경이 있었습니다. 사안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피고인은 토지의 소유자인 오 씨에게 토지거래허가에 필요한 서류라고 거짓말을 해서, 오 씨가 근저당권 설정계약서에 서명하게 하고, 이를 이용해서 근저당권을 설정해 대출을 받았습니다. 즉 피해자 오 씨는 속아서 근저당권 설정 서류에 서명하고, 대출금만큼의 피해를 입은 것입니다. 

피고인에게 사기죄가 성립할까요? 작년까지의 제 대답은 “사기죄가 되지 않습니다”였습니다. 이 사건을 설명 드리면, 법조인이 아닌 경우 대부분 “왜 이게 사기죄가 아니에요?”라고 반문합니다.

사기죄는 사람을 속여(기망) 재물을 교부받거나 재산상의 이익을 취득하는 범죄입니다. 종래 우리 대법원은 “사기죄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속는 사람(피기망자)에게 처분의사 즉 처분결과에 대한 인식이 있고, 객관적으로는 이러한 의사에 지배된 행위가 있을 것을 요한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의 핵심은 “처분결과에 대한 인식”입니다. 위 사례에서 오 씨는 토지거래허가를 내기 위한 서류에 서명한다고 생각했지, 근저당권이라는 재산 처분결과가 나온다는 인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기죄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상식적으로 보기에 피해자가 너무 억울합니다. 분명히 속고 속이는 행위가 있고, 재산상 피해가 있었는데 사기죄가 안 된다고 합니다. 이런 내용을 설명 드리면 당사자들은 분노합니다. 그 분노는 종종 변호사와 법원, 검찰에게 돌려지기도 합니다. 이런 경우 변호사로서는 난감하기만 합니다. 

▲지난 16일 대법원은 “피기망자가 처분행위의 의미나 내용을 인식하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피기망자의 행위가 직접 재산상 손해를 초래하는 재산적 처분행위로 평가되고, 이러한 행위를 피기망자가 인식하고 한 것이라면 처분행위에 상응하는 처분의사는 인정”한다며, 피기망자에게 처분결과에 대한 인식이 없는 경우 사기죄가 성립되지 않던 기존 판례를 변경했다. 사진은 서울지방경찰청 국제범죄수사대가 중국 청도·연태를 근거지로 두고 보이스피싱 사기를 벌이던 콜센터 조직원 일당 검거에 관해 브리핑하는 모습. 사진 = 연합뉴스

비슷한 사례가 있습니다. 보이스 피싱 범죄 중에, 예를 들어 세금환급을 해 준다고 속이고 피해자를 현금인출기로 유인해 피해자로 하여금 자신의 계좌에서 보이스피싱 계좌로 돈을 송금 또는 이체하도록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경우에도 속는 사람이 자신이 처분행위를 한다는 인식이 없었기 때문에, 사기죄로 처벌하기 어려웠습니다.

사기죄 성립하려면 “속아서 서명했다” 증명할 수 있어야

그런데 이런 종류의 행위를 이제 사기죄로 처벌하는 것이 가능해졌습니다. 대법원은 지난 2월 16일 전원합의체 판결로 기존의 판례를 변경했습니다. 대법원은 “비록 피기망자가 처분행위의 의미나 내용을 인식하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피기망자의 행위가 직접 재산상 손해를 초래하는 재산적 처분행위로 평가되고, 이러한 행위를 피기망자가 인식하고 한 것이라면 처분행위에 상응하는 처분의사는 인정”하는 것으로 판례를 변경했습니다. 

판례의 변경으로, 지능적이고 교묘하게 속이는 행위를 통한 사기죄의 처벌이 가능하도록 되었습니다. 이제 서류의 내용을 잘 모르고 서명한 경우에도 사기죄가 성립할 수 있습니다. 다만 서류의 내용을 잘 모르고 서명한 사실, 다른 서류에 서명한다고 속은 사실은 증명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서류에 내 도장이나 서명이 있는데, “난 그 내용을 전혀 모르고 찍었다”는 말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특히 이 영역에서는 잘 증명하는 것이 사기죄가 성립하는지 여부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이런 점은 형사사건뿐만 아니라 민사사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계약서에 대표이사 도장이 날인되었는데, 법정에서 돌연 계약 내용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도장을 찍었다고 하면 상대방이나 재판장의 입장에서는 거의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결국 형사사건이든 민사사건이든 이런 특별한 사정을 증명하는 것이 결과를 바꾸어 놓을 것입니다. 

(정리 = 윤지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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