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NB저널 = 김금영 기자) 국제갤러리 K3 전시장은 갤러리인지 도로인지 일순간 오묘한 착각에 빠져들게 한다. 전 세계적으로 표준화된 상징인 교통 표지판의 형태를 취한 설치물들이 곳곳에 놓였고, 아스팔트를 연상케 하는 작품도 벽에 전시됐다.
관람객은 이 공간이 익숙하고도 낯설어지는 순간을 동시에 마주한다. 교통 표지판의 형태와 아스팔트의 질감은 일상 속에서 늘 눈에 들어오던 것들이라 익숙하다. 그런데 교통 표지판 형태의 조형물에는 거울이 설치돼 자신의 모습을 비추고, 아스팔트를 옮겨 놓은 것 같은 화면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향하는 화살표 등 실제 교통 표지판과 거리가 있다.
익숙한 일상의 풍경이 낯설어지는 순간을 만드는 작가 듀오 엘름그린 & 드라그셋의 개인전 ‘적응(Adaptations)’이 국제갤러리에서 4월 28일까지 열린다. 베를린을 거점으로 활동해 온 이들은 건축, 설치, 조각, 퍼포먼스 등 다양한 장르를 관통하며 현대 사회에 화두를 제기해 왔다. 2015년 플라토에서 열린 이후 국내에서 두 번째 개인전을 갖는 이들은 이번엔 일상에 만연한 사회적 클리셰와 권력 구조의 문제를 고찰해보는 신작 20여 점을 국제갤러리 K3 및 K2 1층 전시장에서 선보인다.
K3 전시장에서 이들이 주목한 장소는 공공장소다. 엘름그린, 드라그셋은 “전시를 준비할 때 기본적으로 공간 분위기에 어울리는 작품을 구상한다. K3 전시장은 창문이 커 햇빛이 많이 들어와 마치 야외 같은 느낌이었고, 천장의 조명은 네온사인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전시장을 공공장소로 재구성할 수 있겠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도로는 현대 사회의 대표적인 공공장소다. 도로엔 각종 선이 표시됐고 표지판은 길의 방향과 속도 등을 표시한다. 엘름그린, 드라그셋은 “현대인에게는 매우 익숙한 풍경이지만 100년 전 사람에게는 이해 못할 모습이기도 하다. 단순한 선과 표지판이 인간의 행동을 통제하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행동이 통제받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할 때가 많다”고 밝혔다.
이 가운데 이들은 공공장소의 통제를 전복시키고 재구성해보는 시도를 했다. 실제 도로의 아스팔트에 쓰이는 도료를 캔버스에 칠해 아스팔트를 재현했지만, 아스팔트 위에 그려진 일반적인 직선을 다른 방향으로 꼬아놓았다. 교통 표지판도 마찬가지. 관람객은 교통 표지판에서 교통 표시가 아닌 자신의 얼굴을 발견한다. 이들은 이 모든 것이 “친숙하게 접해 의심 없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던 규칙에 저항하는 시도”라 설명했다.
엘름그린, 드라그셋은 “거울 표면처럼 매끄럽게 처리된 스테인리스 스틸로 제작된 교통 표지판은 관람객의 존재를 함께 반영한다. 이때 현실에서 가져온 듯 익숙했던 오브제가 예술 작품이라는 걸 인식하게도 된다”며 “이로써 특정한 방향성이나 규정에 통제받던 관람객은 여기서 벗어나 스스로의 모습을 보고, 또 자신이 속한 공공장소에 대해 생각해볼 기회를 얻는다. 일상을 다시 바라보며 새로운 사고를 지향하게 되는 것”이라고 밝혔다. “일상 오브제를 보고 명상의 기회를 가질 기회가 많지 않은 현대인에게 그 시간을 제공하는 것, 작업은 그 자체로도 의미를 갖는다”고 이들은 강조했다.
적응된 일상 속 규제를 발칙하게 깨뜨리기
K3 전시장이 공공장소에 집중했다면 K2 전시장은 좀 더 사적인 이야기와 공간으로 시선을 옮긴다. 대표적으로 ‘디 옵서버(The Observer(Kappa))’가 있다. 반 나체의 남성이 무심히 기댄 공간은 바로 발코니. 발코니는 개인의 집에 속해 있지만 바깥의 세상과도 연결되는, 공과 사의 영역이 공존하는 경계에 자리한다.
엘름그린, 드라그셋은 “아파트가 대두되면서 새로운 건축 구조로 나타난 발코니는 내부이기도, 외부이기도 한 애매한 위치에 놓였다. 사적으로 소유한 공간이지만 바깥이 보이기에 행동이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하다”고 말했다. 작품 속 남성 또한 집에서 입을만한 편안한 옷을 입었고 손에는 담배를 들었다. 하지만 완전히 나체로 발코니에 서 있을 만큼 행동이 자유롭진 못하다. 어느 정도의 공적 규제에 통제를 받는 상황.
이 가운데 이 남성은 오히려 관람객을 감상하는 모양새다. 두 작가는 “일반적인 전시장에서는 관람객이 작품을 감상한다. 그런데 이 관계를 뒤집어 오히려 남성 조각이 관람객을 바라본다”며 “발코니에서 홀로 사색에 잠긴 인물은 이번 전시에서 제시된 전반적인 사회 현상과 구조, 공공성에 대한 다양한 내러티브 이면에 근본적으로 존재하며, 이 모든 양상을 관찰하는 어느 개인의 자화상을 시사한다”고 밝혔다.
현대인의 일상을 지배하는 문화적 프레임은 ‘멀티플 미(Multiple Me)’와 ‘루프드 바(Looped Bar)’에서 읽힌다. ‘멀티플 미’는 직사각형의 뚫린 구조물 안에 몇 개의 원형 화장 거울이 부착돼 있는 형태를 취했다. 그렇기에 뚫려 있는 통로이지만 이곳을 통과할 수 없다. 셀카 열풍이 불고 있는 현대 사회의 증후군을 투영한 것.
두 작가는 “이 작품에는 거울이 많이 달렸지만 정작 본인의 실제 모습을 보기 어렵게 설치됐다. 카메라를 많이 쓰면서 자란 세대지만 현 시대가 셀카 열풍이 가장 강한 것 같다. 그리고 이것은 자아 중심적인 세상이 됐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며 “이 작품은 공적인 사회에 편입되기 위해 치러야 하는 일종의 통과의례로서의 사적인 셀카 행위를 상징한다”고 밝혔다.
‘루프드 바’는 바이긴 바인데 닫힌 바의 모양새다. 일반적으로 바는 사람들이 서로 소통하는 공간이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사적인 휴대폰으로 소통이 더 많이 이뤄진다. 그로 인해 발생되는 사회적 소외 문제 이야기를 엘름그린, 드라그셋은 건축적 요소로 풀어낸다.
이들은 “이 바에는 입구도, 출구도 없다. 종업원을 향해야 할 맥주 탭이 바깥쪽을 바라보고 있으며, 손님이 앉아야 할 의자가 안쪽에 갇혀 있는 ‘닫힌 구조물’이다. 따라서 아무리 사회적으로 잘 나가는 사람이라도 민주적으로 아무도 들어갈 수 없다”며 “이 작품은 공공디자인에 내재된 권력 구조를 풍자한다. 또한 사물의 본질적 기능에 혼돈을 야기하며 사회적 구조 안에서 파생되는 소속, 배제, 무력감에 대해 역설한다”고 설명했다.
거대한 꼬리뼈 형상의 작품 ‘테일본(Tailbone)’, 두 개의 남성 토르소 조각 ‘디 인플루언스, 피그(The Influence, Fig)’, 갤러리 벽의 특정 구멍에 손가락을 찔러 넣은 조각 ‘다우트(Doubt)’는 보다 사적인 영역, 즉 신체를 모티브로 만들어진 작품들이다. ‘테일본’은 인종이나 성별에 상관없이 그 형태가 바뀌지 않는 꼬리뼈를 통해 결국 우리 모두가 동물계로부터 유래한 하나의 동족임을 상기시킨다.
‘디 인플루언스’에는 모호한 손자국이 각 토르소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사람에 의해 개입되고 가미될 수 있는 폭력의 요소를 상징한다. ‘다우트’는 작품명 그대로 우리를 둘러싼 것들을 의심해 보기를 권한다. 이 작품은 이탈리아 바로크 화가인 카라바조가 그린 ‘의심하는 도마’로부터 영감을 받았다. 그리스도의 몸에 난 상처에 손가락을 넣어보고야 그를 믿은 제자를 묘사한 성화의 고전적 방식은 모던한 갤러리의 화이트 큐브 벽면과 대치된다.
엘름그린, 드라그셋은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기존 사회, 예술 시스템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분석한다. 이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자신들이 대면한 세계 속 고착화된 관념들에 익숙해지고 적응하기보다는 끊임없이 자문하고 고발하며 현대사회에 대한 다채로운 담론을 형성하는 것, 그것이 이들의 ‘일상 낯설게 보기’의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