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59호 김금영⁄ 2019.11.19 17:04:59
지난해 초,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은 할머니 4명의 삶이 임흥순 작가의 손길을 거쳐 대형 영상 작업으로 사람들을 만났다. 올해 초엔 사람들로부터 기증받은 7000여 개의 생활용품을 쌓은 최정화 작가의 대형 설치 작업 ‘민들레’가 미술관 마당에 들어섰다. 그리고 이번엔 박찬경 작가가 ‘석가모니의 열반’이라는 종교적 사건과 ‘후쿠시마 원전사고’라는 동시대 재난을 하나로 묶은 영화 ‘늦게 온 보살’을 내놓았다. 이 실험적인 모든 작품들이 거쳐 갔고, 지금 전시되고 있는 현장은 바로 ‘MMCA 현대차 시리즈’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주최하고 현대자동차가 후원하는 ‘MMCA 현대차 시리즈 2019: 박찬경 – 모임’이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내년 2월 23일까지 열린다. MMCA 현대차 시리즈는 매년 국내 중진작가 1명을 지원하는 연례 프로젝트로, 2014년 시작됐다.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해온 작가에게 대규모 신작을 실현할 기회를 제공한다. 이를 통해 작업에 새로운 전환과 발전의 계기를 마련하고, 국내·외 미술계에 적극적으로 홍보해 한국 현대미술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국립현대미술관과 현대자동차가 함께 마련한 자리다.
2014년 첫해 이불 작가를 시작으로, 안규철(2015), 김수자(2016), 임흥순(2017), 최정화(2018) 작가가 이 시리즈를 통해 국내외 미술계에 존재감을 새로이 각인시켰다. 이불 작가는 올해 5월 개막한 제58회 베니스 비엔날레 본 전시 참여 작가로 20년 만에 재초대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고, 2015년 제56회 베니스 비엔날레 은사자상 수상으로 세계 미술계에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시킨 임흥순 작가는 MMCA 현대차 시리즈를 통해 신작을 선보이는 기회가 있었다. 이처럼 예술 후원의 길을 꾸준히 걸으며 한국 현대미술의 발전에 이바지해온 MMCA 현대차 시리즈는 문화예술과 기업이 만나 상생효과를 창출한, 대표적인 기업 후원 사례로 꼽힌다.
올해 MMCA 현대차 시리즈에는 박찬경 작가가 이름을 올렸다. 그는 “국립현대미술관과 현대자동차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순조롭게 작업할 수 있었다. 작가 개인적으로도 내게 이번 전시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고 소감을 밝혔다.
박찬경은 분단, 냉전, 민간신앙, 동아시아의 근대성 등을 주제로 한 영상, 설치, 사진 작업을 펼쳐온 작가다. 1997년 첫 개인전 ‘블랙박스: 냉전 이미지의 기억’을 시작으로, ‘세트’(2000), ‘파워통로’(2004~2007), ‘비행’(2005), ‘반신반의’(2018) 등 한국의 분단과 냉전을 대중매체와의 관계 아래 다루며, 이를 사진과 비디오로 선보여 왔다.
특히 2008년 ‘신도안’을 발표하면서 한국의 민간신앙과 무속을 통해 한국의 근대성을 해석하는 장·단편 영화를 연출하기 시작했다. 이 주제는 ‘다시 태어나고 싶어요, 안양에’(2010), ‘만신’(2013), ‘시민의 숲’(2016) 등으로 이어졌고, 작가는 에르메스 코리아 미술상(2004), 베를린 국제영화제 단편영화 부문 황금곰상(2011) 등을 수상하기도 했다.
‘모임(Gathering)’을 제목으로 한 이번 전시의 대표작은 55분 분량의 흑백 반전 영화 ‘늦게 온 보살’이다. 산속을 헤매는 한 중년 여성, 그리고 방사능 오염도를 조사하며 산을 다니는 젊은 여성의 모습이 계속해서 교차된다. 중년 여성은 부처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한 장소를 찾기 위해, 젊은 여성은 후쿠시마 원전사고의 위험으로부터 도망가기 위해 헤맨다. 각자의 목적과 방법은 달랐지만 결국 영화 속 등장인물들은 한 컨테이너에 모이게 된다.
액자 구조의 전시장에 들어가고 또 나오기
국립현대미술관 임대근 학예연구관은 “이번 전시의 키워드인 ‘모임’은 군중에 대한 작가 특유의 의심에서 시작됐다. 특정 목적을 갖고 한 목소리를 내는 긴밀하게 연결된 공동체를 우리는 민중, 군중이라 불러왔다. 그런데 이 공동체의 목소리가 원래 의도와 다르게 왜곡되면 자칫 악몽이 될 수도 있다. 그런 위험은 항상 존재한다”며 “이 가운데 작가는 따뜻한 연대감을 드러내는 모임의 의미를 다시금 우리에게 제시한다. 수많은 재난 이후의 가혹한 이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함께 슬퍼하고 서로 위로하는 모임에 대해 이야기한다”고 설명했다.
작가의 신작과 더불어 이번 전시의 가장 큰 특징은 액자 구조다. 전시장벽 곳곳에 네모난 구멍이 뚫려 반대편에 전시된 작품들 또는 공간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박찬경 작가는 “우리는 프레임에 속한 것을 안전하다고 여긴다. 하지만 이 프레임이 정말 안전한지 다시금 의문을 갖고 생각해보게 하고 싶었다”며 “우리에게 익숙한 미술사와 미술관 또한 무의식중에 우리에게 인위적으로 주입된 틀이 아닌지 비판과 성찰을 해볼 수 있는 자리가 되길 바랐다”고 의도를 밝혔다.
전시는 이 액자 구조를 바탕으로 여러 작품이 모인 형태로 구성된다. ‘후쿠시마, 오토래디오그래피’는 원전사고 피폭 현장인 마을을 촬영한 박찬경의 사진, 그리고 일본의 사진가 카가야 마사미치와 식물학자 모리 사토시가 후쿠시마 지역에서 채취한 다양한 생물과 사물을 오토래디오그래피(사진유제를 사용해 방사능을 검출 측정하는 방법)로 만든 이미지를 모은 것이다. 방사능 피폭이라는 재난의 현실을 알려주는 이미지들이 한 공간에 모인 것이다.
작가가 국내 여러 사찰을 다니며 쌍림열반도(석가모니가 입적할 때의 광경을 묘사한 그림이나 조각)에 등장하는 동물들을 클로즈업해 찍은 사진 작업 ‘모임’과, 열반에 든 석가모니가 애제자 가섭존자를 향해 양발을 내밀었다는 ‘곽시쌍부’ 설화를 바탕으로 작가가 작업한 ‘맨발’도 전시장의 또 다른 공간에 모였다. 이 이미지들은 액자 구조를 취한 전시장 안에서 상호 교류하는 느낌이다.
전시실 중앙에 넓게 펼쳐진 ‘해인(海印)’은 다양한 물결무늬를 새긴 시멘트 판, 나무마루 등으로 구성됐는데, 이곳에서는 11월 8일~12월 5일 전시 주제와 관련된 각 분야 전문가들을 초빙해 강연과 토론이 열릴 예정이다. 작가가 전시 현장 자체를 다양한 모임이 이뤄지는 가장 중요한 공간으로 탈바꿈시킨 것. 임대근 학예연구관은 “작가는 강요된 권위와 틀에 저항하면서 각자의 방식대로 깨어 있는 관객들이 곧 이번 전시의 제목인 ‘모임’에 초대받은 이들임을 이야기한다”고 말했다.
작가는 “이윤이나 동기 없이 순수한 유대만으로 모이기 힘든 세상이다. 이건 한국만의 이야기는 아니다”라고 꼬집기도 했다. 수많은 재난이 일어났고, 현재도 겪고 있으며 이런 현실에서 모임의 목적과 형태는 변질되기 마련이다. 이 가운데 작가는 여전히 유대로서의 모임의 가능성을 이야기한다.
임대근 학예연구관은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재난 이후의 동시대적 상황에서 미술 언어의 또 다른 가능성을 고찰한다. 다양한 이미지의 작품들을 모으고 모아 관람객이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주체로서 작품을 바라보고 스스로 고찰해보도록 유도한다”며 “액자 구조 안에서 전시를 관람하던 관람객들은 전시실 마지막에 설치된 1:25 배율 축소모형 ‘5전시실’을 보고 액자 밖 현실로 돌아와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들에 대해 다시금 의문을 품고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윤범모 관장은 “이번 전시는 동아시아의 문화적·역사적 맥락을 성찰해 미술 언어로 풀어내 온 박찬경 작가의 첫 국립현대미술관 개인전이다. 그동안 작가가 전시 준비하는 과정을 살펴봤는데 혼신의 힘을 다했다”며 “무엇보다 이번 전시를 통해 MMCA 현대차 시리즈가 미술계에 제대로 안착되고 있다는 것이 느껴져서 기쁘다. 금년 하반기에 큰 볼거리를 선사하는 전시”라고 말했다.
현대자동차 조원홍 고객경험본부장(부사장)은 “박찬경 작가 특유의 위트 있는 시선으로 구성된 작품들을 통해, 현시대의 관점에서 과거를 뒤집어 바라보는 계기가 될 것”이라며 “현대자동차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예술가들의 상상력이 자유롭게 펼쳐질 수 있도록 국립현대미술관과 협업을 지속적으로 전개할 계획이다. 또한 관람객들에게 보다 새롭고 특별한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한편, 현대자동차는 미국 LACMA, 영국 테이트모던과 같은 글로벌 문화예술계와의 공고한 파트너십을 바탕으로 자동차 기업으로 경영 전반에 문화 예술적 가치를 접목, 혁신적이고 차별화된 현대자동차만의 브랜드 철학을 전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