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점 곳곳이 노란 물결에 휩싸였다. 그것도 행복한 표정을 지닌 노란 물결에. 롯데백화점 인천터미널점이 오픈 1주년을 기념해 디자이너이자 조형 예술가로 활동 중인 헝가리 출신 작가 키스미클로스의 국내 첫 개인전 ‘이모그램 위드 러브’를 롯데갤러리 인천터미널점과 아뜰리에에서 2월 23일까지 연다.
이모그램이란 ‘이모티콘’과 ‘픽토그램’의 합성어로 작가가 만든 고유명사다. 그 시작은 201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SNS나 다양한 메신저를 기반으로 자신의 감정을 전달하는 시대에 ‘소통’을 주제로 한 작업을 고민해온 키스미클로스는 당시 옥스퍼드 사전이 ‘올해의 단어’로 문자가 아닌 이모지(emoji, 그림문자)를 선정한 것에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이후 그는 감정을 표현하는 단어 13개를 선별한 뒤 해당 단어들의 철자를 감정을 표현하는 이모티콘으로 조합해 노란색 둥근 원에 그려 넣은 이모그램을 제작했다. 예컨대 ‘멋져(NICE)’라는 단어에서 C는 웃는 입 모양, N과 E는 눈, I는 눈썹이 되는 형태다.
앞서 지난해엔 광주디자인비엔날레 주제관의 작가로 참여해 이 이모그램들을 활용한 다양한 조형 시리즈를 국내 관람객에 첫선을 보였다. 이번 전시는 그에 이어 본격적으로 작가의 이모그램 세계를 보다 자세하게 만끽할 수 있는 자리다. 전시를 기획한 롯데갤러리 성윤진 큐레이터, 키스미클로스 작가에게 전시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작품 직접 만지고 놀며 감정 소통”
-롯데백화점 인천터미널점 오픈 1주년 기념과 동시에 새해 첫 전시 작가로 키스미클로스를 선정한 배경은?
성유진 큐레이터(이하 성 큐레이터) “지난해 광주디자인비엔날레에 갔을 때 작가의 전시를 봤는데 굉장히 인상 깊었다. 이모그램이 인쇄된 노란 고무공으로 가득 찬 ‘볼룸’이 눈길을 확 끌었다. 특히 같이 방문한 아이들이 다른 전시는 데면데면 보더니, 볼룸에 들어가서는 공을 던지기도 밀기도 하는 등 신나게 즐기며 감정을 한껏 표현했다.
그냥 눈으로 쳐다보고 마는 게 아니라 참여형 형태로 남녀노소 편하게 즐길 수 있는 전시라는 점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방문하는 백화점의 성격과 잘 맞을 것이라 생각했다. 또한 전시를 보는 이들에게 새해부터 긍정적인 에너지를 전하고 싶었다. 이에 당시 전시를 기획한 한양대학교 이동영 교수를 통해 작가에게 연락했고 함께 전시를 마련했다.”
-이모그램 작업에 대한 소개를 부탁한다.
키스미클로스 “작품의 주요 메시지는 소통이다. 디지털 시대에 인간은 점점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데 언어뿐 아니라 이모티콘 등 그림도 다양하게 활용하고 있다. 이 와중 2015년 옥스퍼드사전이 올해의 단어로 문자가 아닌 그림문자를 선정한 건 주목할 만한 파격이었다. 여기서 영감을 얻어 소통을 주제로 한 작업에 그림문자를 끌어왔다.
미국 광고 디자이너 하비 볼(1921~2001)의 작업에서도 영감을 받았다. 그는 1963년 인수합병으로 사기가 떨어진 보험회사 직원들을 격려하기 위해 노란색 바탕에 미소를 담은 ‘스마일리’ 캐릭터로 배지를 만들었다. 당시 긍정적이면서도 자유롭고 희망적인 메시지를 보다 널리 전파하겠다는 신념 아래 스마일리 캐릭터 저작권을 무료로 풀었다. 예술로 사람과 소통하고 긍정적인 메시지를 전하는 그의 정신에 공감했다. 스마일리에서 조형적 특징과 개념을 가져오고 여기에 그림문자를 결합하면서 이모그램의 본격적인 형태를 갖추게 됐다.”
-헝가리에서 갤러리, 미술관뿐 아니라 부다페스트 쇼핑몰 등 상업적인 공간에서도 전시를 열어왔다. 이번엔 전시 장소가 롯데백화점이다.
키스미클로스 “센트럴 유러피안 패션위크(2018)의 아이덴티티 디자인, 골든 로치프로젝트(2011) 등에서 작업을 선보였고, 하이네켄 등 상업 브랜드들과도 협업했다. 경계를 허무는 전시와 작업에 관심이 많다. 작업도 한 분야만 파는 게 아니라 그래픽, 공간 작업, 인테리어, 건축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갖고 도전하고 있다.
융복합 시대에 특히 디자이너에겐 다양한 능력이 요구된다. 상업적인 프로젝트를 할 때도 예술적인 부분을 놓치지 않고 스토리텔링에 반영하도록 노력하는 등 한쪽에만 치우치지 않으려 노력한다. 전시 장소 또한 그렇다. 갤러리, 미술관에서의 전시도 좋지만 여기에만 한정짓진 않는다. 대중성을 띤 백화점에서의 전시를 통해 보다 사람들에게 친숙하게 다가가고 소통하고 싶었다.”
성 큐레이터 “롯데갤러리 공간뿐 아니라 백화점 내 아뜰리에 공용 공간도 활용해 전시를 꾸렸다. 백화점 곳곳에서 쇼핑을 즐기면서 자연스럽게 작가의 작품과 연계된 설치물들을 볼 수 있다. 전시와 연계된 프로그램도 백화점 안팎으로 진행했다. 1월 18일 작가와 함께하는 ‘이모그램 티셔츠 만들기’, 1월 19일 ‘나만의 이모그램 만들기’ 행사가 열렸다. 익숙한 장소에서 친근하게 접할 수 있는 예술 환경을 조성했다.
이렇게 친근하면서도 심도 깊은 내용을 담은 게 키스미클로스 작업의 매력이다. 처음엔 미소를 짓고 있는 노란 설치물이 직관적으로 눈에 확 들어와 아이부터 어른까지 쉽게 접근한다. 여기에 첨단 미디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소통 방식에 대한 화두도 함께 제시해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롯데그룹은 잠실 석촌호수에서 공공미술 프로젝트로 플로렌타인 호프만의 ‘러버덕’, 프렌즈위드유의 ‘슈퍼문’, 카우스의 ‘컴패니언’, 스티키몬스터랩의 ‘루나 프로젝트’ 등을 진행해왔다. 여기에도 관심이 있었을 것 같은데.
키스미클로스 “항상 전시를 열 때마다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편이다. 석촌호수에 대형 작품을 띄워보고도 싶었고, 높은 롯데타워 꼭대기에 행복한 표정의 작품을 설치하면 보다 많은 사람들이 긍정적인 기운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상상해보기도 했다. 기회만 주어진다면 환영이다.”
-앞선 광주디자인비엔날레 전시와의 차별점은?
성 큐레이터 “광주디자인비엔날레에서는 긍정적인 단어뿐 아니라 부정적인 감정의 단어까지 엮어 13가지 감정을 바탕으로 이모그램 작업을 소개했다. 이번엔 새해 첫 전시임을 고려해 ‘멋져(NICE, COOL)’, ‘사랑해(LOVED)’, ‘귀여워(CUTE)’, ‘훌륭해(GOOD)’, ‘용감해(BOLD)’, ‘행운(LUCKY)’ 등 7개의 긍정적인 감정을 상징하는 단어 이모그램만을 모았다.
전시 첫 섹션에서 관람객들은 7개의 이모그램이 각각 인쇄된 1000개의 노란 고무공으로 가득한 볼룸에 들어가 공을 갖고 놀면서 감정을 나눠볼 수 있다. 2m 크기의 거대한 공으로 이뤄진 ‘대형 이모그램 풍선’도 설치됐는데 반응이 좋았다. 아이들이 자기 몸보다 큰 공을 갖고 신나게 놀더라. 60cm의 대형 ‘이모그램 배지’, 40cm 크기의 단단한 강화플라스틱으로 작가가 직접 표정을 그려 넣은 ‘이모그램 조각’ 등이 각각 7개의 표정으로 설치됐다.
두 번째 섹션에서는 이번 전시에서 처음으로 시도하는 ‘러브’ 시리즈가 마련됐다. 이 또한 체험 형태로, 1.3m 길이의 부드러운 분홍색 기둥 600여 개가 마치 땅에서 자라난 풀처럼 설치됐다. 이 사이를 자유롭게 산책하듯 거닐며 핑크빛 사랑의 감정을 느낄 수 있다.
평면과 입체, 디자인과 조형예술, 가상과 현실 사이의 경계를 허무는 작업을 지속해 온 작업의 연장선상에서 마련된 작품들도 마련됐다. ‘러브(LOVE)’ 글자로 조형 작품을 만들었는데, 본래 평면이었던 글자가 조형 작품으로 만들어지며 입체감을 띤 모습을 보여준다. 이모그램 신작 ‘그리고 프린트 된 이모그램 패턴’도 경계를 넘나든다. 인쇄된 그림 위에 작가가 직접 손으로 그린 이모그램을 껴넣은 형태로, 과연 인쇄와 그림은 공존할 수 있는지, 이를 예술이라 해야 할지, 장식품이라 해야 할지 여러 질문을 던진다.”
키스미클로스 “살아온 환경이 작업에 영향을 미쳤다. 어릴 때 밀밭, 보리밭, 갈대 등을 직접 만지며 자랐다. 까칠하고 따가웠지만 생생했던 그 느낌들이 아직도 기억난다. ‘러브’ 시리즈는 이 경험에서 영감을 얻었다. 사람들이 시각뿐 아니라 촉각적으로도 작품을 접하면 보다 친근하게 예술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했다.”
-영어 외 한국어로 작업해볼 생각은 없는가?
키스미클로스 “물론 관심이 많다. 내 작업은 소통이 주제로, 이건 언어, 즉 문자와도 연결된다. 한국어를 보면서 많은 흥미를 느꼈다. ‘ㅎ’은 사람같이 생겼다. ‘이’의 경우 ‘ㅇ’이 머리, 그리고 ‘ㅣ’가 몸으로서, 머리 옆에 몸이 서 있는 느낌이다.”
-이번 전시를 관람객들이 어떻게 즐기길 바라는가?
성 큐레이터 “롯데갤러리는 어렵지 않은, 친근한 예술을 선보이고자 노력하고 있다. 이번 키스미클로스의 전시 현장에서 특히 인상 깊었던 건 직접 작품을 만지고, 갖고 놀면서 친근하게 느끼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이번 전시 주제인 교감과 소통과 맞닿는 현장이었다. 2020년 새해 이번 전시를 통해 보다 밝고 활기찬 에너지를 나누고 교감하는 자리가 되기를 바란다.”
키스미클로스 “편하게 즐기길 바란다. 관객들은 저마다 느끼고 감상하고픈 포인트가 있다. ‘볼룸’에서 마음껏 공을 갖고 놀아도 ‘러브’ 들판을 느껴도 좋다. 이번 전시는 온라인 공간에서의 경험이 현실에서 강렬하게 구현된 형태다. 사람들이 전시를 즐기고 행복해지며 서로를 더욱 사랑하게 되길 바란다. 그리고 기분 좋게 전시장을 떠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