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어두운 침묵 속에서 반짝반짝 빛을 발하고 있었다. LED가 장착된 빛나는 책들 사이 진짜 책도 군데군데 보여 더욱 눈길을 끌었다. 현실인 듯 가상인 듯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이곳은 강애란 작가가 만든 ‘숙고(熟考)의 서재’였다.
갤러리 시몬이 강애란 작가의 개인전을 11월 14일까지 연다. 작가는 책의 모형 내부에 LED를 장착시킨 라이팅 북(Lighting Book)을 통해 디지털 시대의 시간과 공간에 의미를 새롭게 부여하는 작업을 이어 왔다. 특히 이번 ‘숙고의 서재’에서는 자신의 작업의 근간을 이루는 페미니즘, 그리고 시대에 대한 고찰에 한 걸음 더 다가섰다.
이 이야기를 끌어내기 위해 작가는 다시금 책을 꺼내놓았다. 먼저 전시의 시작을 알리는 전시장 1층은 들어서는 순간 해외의 어느 넓은 서점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이 들게 연출됐다. 작가가 직접 해외 서점 여러 곳의 풍경을 촬영한 이미지가 벽면에 거대하게 깔렸고, 높은 곳에 있는 책을 꺼낼 수 있는 사다리도 세워졌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중심에 책이 자리했다. 실제 책을 바탕으로 작가가 구현한 라이팅 북, 또는 특정 인물의 대표 작품 이미지나 연설 문구 등을 활용해 작가가 새롭게 생명력을 부여한 가상의 책이 함께 뒤섞인 채 테이블 위에 놓였다.
저마다 존재감을 발하는 이 책들을 찬찬히 살펴보니 한 가지 공통점이 발견됐다. 쿠사마 야요이, 프리다 칼로 등 여성 예술가를 비롯해 책 곳곳에서 ‘우먼(WOMAN)’이라는 글자가 눈에 띄었다. 작가는 개화기 엘리트 여성, 일제강점기의 유학파 신여성, 위안부 여성, 서구 여류 문인, 예술가 등 여성사적으로 중요한 인물들을 작품으로 소환해 놓았다. 문학, 철학, 사회학, 미술사 등 분야도 가리지 않았다.
2층에 마련된 ‘근심의 방’에서는 여성의 이야기를 보다 심화시켰다. 윤심덕, 김일엽 등 여류 문인들을 비롯해 페미니즘을 다루는 라이팅 북이 가득 설치됐다. 책을 큰 설치물로 구현한 작품들엔 각각 지속적으로 한 문구가 디지털 이미지로 변형돼 흘러 나왔다. 예컨대 18세기 영국의 작가이자 여권 신장론자였던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의 ‘여성의 권리옹호’에 대해 표현한 작품엔 “나는 그들이 남자들에 대해서 권력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해서 권력을 가지기를 바란다”는 대표 문구가 흐르고 있었다.
특히 2층 전시장 벽면엔 마치 새처럼 날아오른 듯한 책의 이미지가 가득 설치돼 눈길을 끌었다. 이에 대해 작가는 “답답해서 책을 집어던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우린 우리의 삶, 그리고 여성의 삶에 대해 더 많이 고찰하고, 상기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2층의 공간을 ‘근심의 방’이라고 명명한 것도 그런 연유에서다.
어두운 전시장을 밝히는 ‘라이팅 북’
자세한 이야기는 작가의 작업 초창기로 돌아간다. 그때는 책이 아닌 보자기가 작업에 등장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 여성으로서 자연스럽게 여성의 이야기에 관심을 갖고 작업을 시작한 작가는 많은 생각을 보자기에 담아 표현하는 방식으로 다가갔다. 그러다 점점 보자기에 쌓이는 생각들이 많아졌다고.
작가는 “생각 주머니의 개념으로 보자기를 활용하다가 점점 책이라는 매개체로 옮겨갔다. 책은 시대를 막론하고 존재해 온, 생각과 관념의 상징물이다. 보자기부터 보자기로 책을 싼 과도기 형태, 그리고 현재의 라이팅 북까지 작업이 이어졌다. 지금의 책은 생각을 담는 상자와도 같다”며 “디지털 시대에 무궁무진한 데이터로 형태가 바뀌었을지언정 여전히 책은 우리의 시대상을 담는 매개체로 존재한다. 이 책에 불을 밝혀 보다 존재감을 드러내고 세상의 이야기를 하는 데 활용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특히 책이라는 매개체를 활용해 작가가 꾸준히 해온 이야기의 중심엔 여성이 있다. 대표적으로 2016년 아르코미술관에서 열렸던 개인전 ‘자기만의 방’에선 근대 여성의 이야기를 조명했다. ‘자기만의 방’은 20세기 초 영국의 소설가 버지니아 울프의 에세이 제목이기도 하다. 그는 에세이에서 “여성이 작가가 되기 위해선 연간 500파운드의 고정적인 소득과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여성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기 위한 토대가 시대에서 얼마나 결핍돼 있는지 꼬집은 바 있다.
강애란 작가가 만든 ‘자기만의 방’ 전시에서는 나혜석, 김일엽, 최승희, 윤심덕 등 신문물을 받아들였던 이른바 인텔리 여성, 그리고 비슷한 시기 전쟁으로 고통 받은 위안부 여성의 삶을 동시에 들여다봤다. 언뜻 보기엔 인텔리 여성, 위안부 여성의 삶이 대비되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작가는 이런 단편적인 시선에서 더 나아가 한국사의 구석에서 여성으로서 제대로 된 권리를 인정받지 못했던 이들의 이야기에 주목했다.
그는 “세간의 시선은 나혜석, 최승희, 윤심덕을 불행하게 보는 경향이 강했다. 나혜석은 객사했고, 최승희는 월북한 뒤 어떻게 됐는지 알 수 없고, 윤심덕은 자살하는 등 끝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길을 선택했고, 각자 화가이자 소설가, 무용가, 소프라노로 능력을 발휘했다. 다만 당시대의 시선에 의해 불행한 여성이라는 이미지가 덧씌워졌다. 이런 프레임 속 이들의 삶을 불쌍하다고만 봐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며 “비슷한 시기 위안부 할머니는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불행한 삶을 산,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여성의 이야기다. 이 모든 여성들의 삶이 제대로 각인되길 바랐다”고 말했다.
전시장에 책들이 날아다닌 이유
여성의 이야기를 파고들던 작가는 한국 뿐 아니라 세계사 속 여성의 이야기에도 주목했다. 한 예로 그는 영국 이야기를 꺼냈다. 작가는 “1920년대 영국에선 백인과 흑인 남성, 이후 백인과 흑인 여성 순으로 참정권이 주어졌다.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첫 권리조차도 여성은 가장 뒤늦게 받은 것”이라며 “이처럼 역사에서 여성이 소외된 현장은 꾸준히 이어져 왔다. 시간이 많이 흘러 여성의 권리에 대한 담론도 많이 나오고, 환경도 과거와 비교해 많이 달라졌지만 여전히 여성 혐오에 대한 이야기도 존재한다”고 짚었다.
2층 전시장에서 책을 집어던진 이미지를 펼쳐놓은 건 이런 연유에서다. 작가는 “전시장에 날아다니는 책들은 페미니즘 분야에서 고전과도 같은 책들이다. 우리는 과거부터 현재까지 항상 이 책들에 둘러싸여 공부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서로를 향한 날선 혐오로 상처 입힌다. 도대체 왜 그래야 하는지 답답했다”고 말했다.
특히 올해 코로나19라는 특수 상황은 작가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그는 “현재 우리의 삶은 많은 것이 뒤바뀌고 있다. 코로나19뿐 아니라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기존에 정상이라고 여겼던 당연한 것들이 비정상으로 뒤틀리고, 정석이라고 믿었던 학문도 뒤집히는 등 전체적으로 재정비, 재구축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짚었다. 이런 우리의 상황은 1층 전시장 벽면에 여러 서점의 이미지가 복잡하게 뒤섞인 모습에서도 발견된다.
하지만 작가는 답답해서 책을 던졌을지언정 이야기를 하는 걸 포기하진 않았다. 그는 “이런 혼란스러운 시기일수록 서로 싸우는 게 아니라 더 열심히 우리의 삶에 일어나는 문제들에 관심을 갖고, 고찰하며 미래를 위해 숙고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서 근심스러운 부분도 ‘근심의 방’을 통해 거침없이 드러냈다”며 “특히 어느 한쪽이 우위를 점하고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 동등한 입장과 권리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또 작가는 책을 풀어놓았을 뿐, 결과를 제시하진 않았다. 작가는 “애초 전시명을 ‘숙고의 서재’라고 한 것은 일방적으로 훈계하거나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생각해보자는 의도에서 비롯됐다. 문학, 철학, 사회학, 예술 등 다양한 분야의 책을 늘여놓은 것도 이야기를 한쪽에만 치우쳐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예술가의 입장에서 전지전능한 답을 제시하는 게 아니라 더딜지라도 같이 고민하며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고 말했다.
기존 작업에선 과거의 여성 이야기를 조망하는 데 주로 집중했다면 추후 작업에서는 현대 여성의 이야기를 비롯해 미래엔 어떤 여성의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고민해볼 계획이다. 이 일환으로 11월 윤석남 등 여성주의 미술 대모 작가와 젊은 여성 작가들이 참여하는 전시를 기획해 선보일 예정이다. 이화여자대학교 조형예술학부에서 교수로 재직 중인 작가는 작가는 “학교 내부에 새로운 전시 공간을 만들고 그곳에 여성을 주제로 한 전시를 꾸준히 선보일 계획”이라며 “전시 기획, 작업 활동 등을 통해 공존의 화두를 던지는 일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숙고의 서재’전에서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건 어두운 공간 속에서도 결코 빛바래지 않고 오히려 더 반짝반짝 빛을 발하며 존재감을 드러낸 책들이었다. 닥쳐오는 환경이 결코 녹록하지 않더라도 꾸준히 여성의 이야기를 멈추지 않겠다는 작가의 의지가 책들처럼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