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OECD 국가 가운데 노동시간이 연평균 2305시간으로 가장 길다. 산업재해 발생률이 가장 높지만 단체협약 적용률은 최하위다. 노동조합 조직률은30개 나라 가운데 29위. 하지만 노동생산성 증가율은 29개 OECD 국가 가운데 3번째로 높다. 노동자들을 쥐어짜고 죽여서 나라경제를 만들어 내고 있는 한국은 노동자에게 지옥같은 나라이다” ‘노동자의 정당’ 민주노동당 권영길 대통령 후보가 31일 비정규직과 일자리에 관한 공약을 발표했다. 노동과 함께 한 민주노동당과 당의 대통령후보의 공약에 노동자들이 관심이 쏠렸다. ■ 비정규직 남용해 얻은 이익, 정규직 전환기금으로< /b> 권영길 후보가 제시한 비정규직 문제의 해법을 살펴보자. 그는 현재 비정규법을 ‘비정규직 해고 및 확산에 관한 법’이라고 전제하고, 비정규법 재개정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그는 고용형태에서 정규직을 원칙으로 하지만 예외적으로 비정규직을 허용하고, 간접고용을 규제하며 차별시정제도의 실효성을 높이는 내용을 담아 법을 고치겠다고 말했다. 권 후보가 법 재개정 공약에만 힘을 주었다면 ‘지난 수년간 극심한 노사정 갈등을 야기했던 비정규법을 다시 재개정하면 갈등만 되풀이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따라왔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촉진을 위한 제도적 방안도 함께 내놓았다. 연간 3조 원 이상의 정규직 전환기금을 설치하겠다는 것이 권영길 후보의 공약이다. 100대기업에 이익부담금 1조 5천억 원을 걷고, 그 밖에 기업에는 비정규직 고용부담금 1조 5천억 원 걷겠다는 것. 나머지 부족한 부분은 정부가 메운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권 후보는 “비정규직을 통해 초과이윤을 얻었거나 비정규직을 남용하는 기업에는 부담금을 부과하고,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기업에게는 지원금을 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부가 지금처럼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회피하는 기업들의 행태에 손을 놓고 있지 않고, 지원금과 부담금을 통한 경제적 유인책을 쓴다는 것이다. 권 후보의 정규직 전환기금 방안은 지난 2000년 극심한 청년실업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벨기에가 도입한 이른바 ‘로제타 플랜’에서 아이디어를 따온 것이다. ■ 한국의 ‘로제타 플랜’< /b> 벨기에는 2000년 청년실업 문제 해결을 위해 ‘로제타 플랜’이라고 불리는 청년실업자 의무고용제를 시행했다. 벨기에는 기업규모 50인 이상에 대해 청년층 의무고용을 3%로 정한 뒤 단계적으로 그 연령 대상을 확대했다. 로제타 플랜의 핵심은 ‘기업에 대한 유인책으로 사용자들은 고용 첫 해 사회보장 부담금을 감면받고 이후 점차 감소되는 체계’이다. 벌칙으로 의무고용 할당량에 미치지 못할 때에는 기업에 벌금을 부과했다. 로제타 플랜은 정부가 적극적으로 고용창출을 기업에 강제하고 구조적 개편도 함께 모색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권 후보의 ‘정규직 전환기금을 통한 비정규직 해결 방안’엔 여러 장벽이 도사리고 있다.
경영계는 그동안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이 기업에 부담을 주어 결국 기업의 경쟁력을 떨어뜨릴 것’이라고 주장했다. 정부도 기업의 목소리에만 지나치게 귀를 기울여, 노동계에선 ‘노동부’를 ‘사용부’로 바꾸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뼈 있는 농담까지 나왔다. ‘기업의 이익을 사회를 위해 내 놓으라’는 강제조항이 기업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 현재 우리사회 분위기에서 얼마나 먹힐 지가 관건이다. 3조원에 달하는 정규직전환 기금 마련도 기업이 낸 부담금으로 지원금을 충당하는 시스템에만 의존하고 있다. 정부가 재원을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겠다는 것이 권영길 후보의 약속이지만, 재원마련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은 찾기 힘들었다. 또 ‘법을 잘 지켰다고 칭찬은 할 수 있지만 지원금까지 주는 것은 스스로 법의 허점을 인정하는 것 아니냐’는 다소 원칙론적 이야기도 있다. 시민이 교통법규를 잘 지킨다고 해서 정부로부터 지원금을 받지 않는 것처럼 근본적으로 법을 지키는 사람들에게 지원금을 주고 법을 안 지키는 사람에게 벌금을 주는 것 자체에 회의적인 생각을 갖는 것. ■ 희미해진 ‘노동자 연대’로 비정규직 문제를 풀 수 있을까?< /b> 권영길 후보의 비정규직 관련 공약 가운데, 비정규직 노동자의 문제를 노동자들의 연대에서 풀어나가려는 ‘비정규, 일자리 연대’ 4대 방안도 주목할 만하다. 한 마디로 일자리를 나누자는 것이다. 노동자 한 명이 연평균 2305시간을 하면서, 가정을 포기하고 일에만 매달리고 산업재해에 직면할 것이 아니라 노동시간을 줄여 일자리를 나누자는 뜻이다. 권영길 후보는 “주 40시간제를 전면적으로 도입해 대기업 노동자들이 노동시간을 줄이면, 기업이 그만큼 또 다른 일자리를 만들어낼 것”이라고 말했다. 일자리를 새롭게 만드는 측면도 있고, 상당수 노동자들의 근무제도 개선과 생산과 서비스의 질 향상이라는 효과도 함께 가져올 수 있다. 하지만 현재 정규직노동자들이 법정 근로시간 외에 초과근무를 거부하지 않는 이유는 정규직 역시 고용이 불안한 상황에서, 정규직노동자와 사용자들이 맺은 암묵적인 동의에서도 찾을 수 있다. 정규직 역시 초과근무를 거부하지 못 하는 우리나라의 현실에 대한 언급과 해결방안이 부족하다는 평가다. 한편, 2007년 한국의 노조 조직률은 11%, 단체협약 적용률은 10%이다. 이는 한국의 기업별노조 한계로 정규직이 사용자와 체결한 단체협약이 전체 노동자의 절반이 넘는 비정규직에 적용되지 않아 노동시장 안에서 격차와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다. 권영길 후보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도 단체협약의 효력을 확장해 적용함으로써 일자리 연대를 실현시켜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최소 비정규직 150만 명에게 13%의 임금 인상 효과도 가져올 것이라고 전망했다. 하지만 최근 기아자동차 노조가 하청업체 비정규직 노조의 노조가입을 단체협약에서 거부한 것처럼, IMF이후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연대가 갈수록 희미해지는 상황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권영길 후보는 “현재의 고용불안과 실업의 문제를 ‘묻지마 성장’ 정책이 아닌 ‘일자리 공개념’을 통해 대안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400만 정규직 전환, 1천만 고용안정, 4대 일자리 연대’. 비정규직 노동자의 아픔과 함께 한 그가 현장에서 찾은 이런 대안들이 유권자들에게 얼마나 강하게 어필할 지 지켜볼 일이다. <오재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