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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운명과 한판 승부> 열세 번째 이야기

盲人摸象으로 끝난 진화론·창조론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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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166호 편집팀⁄ 2010.04.21 14:45:43

글·김윤식 어느 날 우연히 닥쳐온 불행과 싸우는 과정에서 인간과 인생에 대해 적지 않은 고민이 있었음인지, 다들 나름대로 의미 있는 인간의 정체를 밝히고 있다. “다양한 도구의 활용과 특별한 규칙 그리고 목적지향적 시스템으로 작동하는, 음악·미술·영화 등의 예술과 스포츠 그리고 각종 놀이를 만들어 즐기는 문화적 행위가 무엇보다도 유별난 인간의 특징이라 사료됩니다. 즉, 직접적 생존유지 활동 외에 잉여시간을 활용하여 ‘풍성한 문화를 즐기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 아닐까요?” “모름지기 인간이란 창조 능력이 뛰어난 두뇌와 세밀한 동작이 가능한 신체 구조를 기반으로 ‘고도의 문명을 향유하는 존재’라 정의하고 싶습니다. 예컨대, 말·돼지·돌고래 등은 말할 것도 없고, 침팬지 같은 대형 유인원이 만약 인간보다 1만 배 정도 더 뛰어난 두뇌를 가졌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럴 경우 그들이 인간을 지배하고 인간보다 더 탁월한 문명을 개발할 수 있었을까요? 결코 그렇게 될 수 없다는 것이 관련 전문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입니다. 왜냐하면, 유연한 신체 구조가 수반되지 않으면 정밀한 과학기술 구현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침팬지 역시도 손과 발 그리고 발성기관 같은 신체 구조의 유연성과 응용성이 인간에 비해 현저히 떨어지기 때문에, 두뇌 수준과 관계없이 결코 인간을 능가할 수 없다는 겁니다.” “뭇 동물들이 자신의 피붙이가 아닌 이웃 무리에게 자신의 소유물과 노동력 그리고 특별한 관심을 일방적으로 전해주는 경우는 결코 기대할 수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자신과 아무런 혈연관계가 없는 이웃을 위해 어떤 반대급부도 바라지 않고 헌신·희생·봉사 등을 기꺼이 마다하지 않는 ‘베풀 줄 아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 아닐까 합니다.” “인간은 물질적 풍요만으로는 결코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에, 정신적 행복과 자기존재의 존엄성을 소중하게 여기고, 내면적 만족과 정서적 충만 그리고 마음의 평안을 추구하는 등의 정신적 가치를 지향한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렇듯이, 자기세계 구현을 통해 자아실현을 도모함으로써 자기존재의 가치나 의미를 찾으려 하는 ‘소명의식을 가진 존재’라는 게 인간의 본질이 아닐까 합니다.” “동물들은 외부의 압박에 대응하고 먹이를 찾기 위해 움직이는 활동이 전부인 반면에, 우리 인간은 특별히 ‘남의 칭찬에 의해 움직이는 존재’라는 데 색다른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합니다. 즉, 인간은 주위로부터 끊임없이 칭찬을 받기 위해 온갖 열정을 다 쏟는 한편, 칭찬을 받음으로써 삶의 욕구·행위의 동기·성취·만족·행복 등을 얻게 되는 지극히 인간관계 지향적이면서 사회적 존재라는 것입니다” “인간이란 어떤 속박에 처해 있든 끊임없이 자유를 갈구하면서, 자신이 하고 싶고 되고 싶고 갖고 싶은 대상을 찾아 과감히 도전하는, 즉 자유롭게 생각하고 자유롭게 행동하는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라 생각합니다. 때문에 턱없는 만용을 부리기도, 패륜아가 되기도, 인간의 탈을 쓴 야수가 되기도, 야만적 약탈자가 되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자신의 의지를 추구하되 그에 따르는 책임도 감수하는 기질을 지닌 존재가 바로 인간이라 봅니다.” “저는 조금은 추상적으로 인간의 정체와 본질에 대하여 생각을 해봤습니다. 결론적으로, 인간이란 ‘지극히 인간다움을 추구하는 존재’가 아닐까 합니다. 지금까지 여러분들이 인간의 속성에 대하여 얘기한 다양한 규정 내지 특성을 모두 종합한 것이 바로 인간다움을 나타내는 상징이라 할 수 있겠지요. 그렇기에, 인간이 인간의 실체를 파악하고, 인간의 존귀함을 자각하고, 인간의 가치를 지키려고 하는 일련의 행위가 다름 아닌 인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눌촌 거사가 설파하는 인간의 정체 내내 흡족한 표정으로 경청하던 눌촌 거사가 긴 지팡이를 지렛대 삼아 천천히 일어났다. 눌촌 거사가 점잖은 걸음걸이로 일행들 앞에 다가서자, 지금까지 담론의 감초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던 왕문후가 겸연쩍은 미소를 지으며 질문을 던졌다. “눌촌 거사님, 지금까지 저희들이 얘기한 인간의 정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아울러 외람되지만, 거사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어떻게 규정하시는지 꼭 한 번 듣고 싶습니다.”

“어려운 이슈임에도 불구하고 다들 한결같이 참으로 흥미롭고 값진 얘기들을 전해준 것 같소이다. 그대들의 얘기 중에 가장 인상적인 내용을 골라 함축적으로 요약한다면, 우리 인간은 ‘자유의지와 창조능력을 가진 존재’라는 정의를 특별히 염두에 두고 싶군요. 왜냐하면, 이러한 자유의지와 창조능력은 과거의 세상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미래 세계의 인간상을 송두리째 뒤흔들 수 있는 핵폭탄과도 같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소승이 생각하는 인간의 정체에 대해 간략히 설명할까 하오. 결론부터 말한다면, 지금까지의 인간은 물론이고 앞으로 존재할 인간이란 결코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즉 ‘파악 불가능한 존재’라 규정하고 싶습니다. 유사 이래 지금까지 나타난 인간의 실상은 역사가 이어져 오는 내내 수많은 현인들이 규정했던 인간의 정체를 항상 뛰어넘는 파격적인 모습이었던 것이 사실이지요. 그렇다면 과연 앞으로는 어떻게 될 것 같소이까? 인간이란 본질적으로는 언제 어디로 튈지 모르고 무슨 일을 저지를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예측 불가능하고 변화무쌍한 존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기질을 바탕으로 인간은 인류가 멸망하는 그날까지 끊임없이 자연의 섭리에 도전하고, 자연질서를 파괴하고, 스스로 진화하고, 새로운 창조를 거듭할 것입니다. 한데 그러한 인간의 무한질주가 옛말의 순천자존 역천자망(順天者存 逆天者亡: 하늘에 순응하는 자는 살아남고, 하늘을 거스르는 자는 망하느니라) 중에 어디에 해당될지, 현재로선 그 누구도 알 길이 없소이다. 이를테면, 고사에 나오는 비아박등감취호 춘잠작견자전신(飛蛾撲燈甘就鎬 春蠶作繭自纏身: 부나비는 등불에 덤벼들어 타 죽을 솥으로 달려들고, 봄누에는 고치를 짓느라 자신의 몸을 칭칭 감느니라)의 신세가 될지, 아니면 그러한 인간의 거침없는 역동성과 파괴적 창조 행위가 애당초 세상을 만들 때 하늘이 허용해준 영역 안에 있는 것인지는 헤아리기 어렵다는 말입니다. 어찌 됐든, 향후 100년이 지나고 나면, 지금까지 5000년 동안 인류가 이룩한 문명보다 질적으로는 최소한 1만 배 이상 더 발전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부딪혀야 할 21세기 세상은 인간의 자유의지와 창조능력이 기존 자연질서를 정상적 작동이 불가능한 임계치 이상으로 파괴함으로써 새로운 패러다임의 세계가 태동하는 변곡점에 들어서기 때문입니다. 만약 무사히 100년이 흘러갔을 즈음에 오늘 그대들이 주장한 인간의 정체에 대한 규정을 돌이켜본다면, 그야말로 장님이 코끼리 만지는 무지(無知)였노라 깨닫게 되겠지요. 즉, 그때의 우리 인간은 생태·생번식·신체구조·외양·가치관·의식구조·행태·규범·문화 등에서 현재의 인간을 미개인이라 치부할 정도로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변해 있을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오늘 이 자리에서 인간의 정체를 논한다는 것이 얼마나 부질 없는 일이 되겠습니까?” 현 시점에서 우리 인류가 인간의 정체를 찾아 갑론을박하는 자체가 참으로 무의미하다는 눌촌 거사의 결론을 듣고 다들 허탈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뜻하지 않은 재앙으로 만신창이가 된 삶을 비관하여 스스로 목숨을 던지려 한 이들의 입장에서는 인생의 목적과 자기존재의 의미를 찾기 위한 ‘인간 본질에 대한 가치판단’이 너무도 중요한 이슈였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다음주부터는 제2장 ‘과연 나는 누구인가’가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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