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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운명과 한판 승부> 열다섯 번째 이야기

누가 인생사를 화불단행(禍不單行)이라 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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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168호 편집팀⁄ 2010.05.03 15:23:10

글·김윤식 눌촌 거사는 잠시 호흡을 고른 다음 다시 말을 이었다. “넷째, 주관적인 인생의 행복 못지 않게 보편적인 삶의 격조도 중요한 만큼, 물질적·정서적 측면에서 삶의 수준을 증진시킬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마련하는 것이죠. 다섯째, 인생을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하늘을 우러러 당당하고 여한 없는 인생이 될 수 있도록 야무지고 빈틈없는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을 수립해야 하는 것입니다.” 눌촌 거사는 제대로 된 인생을 디자인하는 접근방법에 대하여 하나의 아이디어를 제시해주었다. 모름지기 그렇게만 된다면 참으로 멋진 인생이 되지 않겠는가! 미치코의 한 많은 사연 석양의 낭떠러지의 밤도 어느덧 이슥해지는 가운데, 눌촌 거사가 주재하는 ‘우주만물의 기원과 정체’라는 거대 담론은 점점 무르익어갔다. 미치코와 무애를 무사히 산 정상까지 바래다준 석곡 행자는 어느새 석양의 낭떠러지로 돌아가, 담론의 현장에서 큰스님들을 시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한편, 이를 알 리 없는 무애와 미치코는 여전히 아미산 정상 끝자락에 드러누워 미동도 않았다. 잠시 후 무애는 살그머니 몸을 세워 미치코의 표정을 살폈다. 스스로 이승과 작별하려 한 미치코의 사연이 몹시도 궁금했기 때문이다. 미치코의 눈치만 살피던 무애는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마침내 용기를 내어 말문을 열었다. “미치코 누나, 저…있잖아…….” “뭐라구?” “누나, 나 정말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그래, 더 말하지 않아도 알아. 내가 왜 자살을 결심하게 되었는지 그 사연이 알고 싶은 거지?” 미치코는 무애의 마음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 그때까지도 이슬이 맺혀 있는 그녀의 눈가에 달빛이 스며들어 총총 빛나는 은구슬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머나먼 석양의 낭떠러지까지 찾아와 스스로 목숨을 던지려 했던 미치코의 사연은 대략 이러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그녀는 밤 늦게 귀가하다 동네 불량배 대여섯 명으로부터 집단 성폭행을 당했다. 끝까지 저항하면서 죽을 힘을 다해 몸부림쳤지만, 온몸은 만신창이가 되고 말았다. 그 일로 미치코는 심각한 ‘트라우마(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후유증을 겪게 되었다. 트라우마란 심각한 사고나 사건을 경험한 후 계속하여 극심한 공포감을 느끼게 되고, 이에 따른 두통·불면증·무기력증·대인기피증 등이 초래되면서 정상적인 사회생활에 치명적인 지장을 받게 되는 장애를 말한다. 그녀의 부모가 발 벗고 백방으로 나서 이름난 병원과 권위 있는 의사를 찾아 상담과 치료를 거듭했지만, 만사가 허사였다. 끝내 깊은 상처를 극복하지 못한 미치코는 안타깝게도 ‘히키코모리’가 되고 말았다. 히키코모리란 사회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온종일 집안에만 틀어박혀 사는 이른바 ‘은둔형 외톨이’라 불리는 고립성 인격장애를 뜻한다. 그런데 사건 발생 후 어찌 된 일인지 사고를 일으킨 가해자들이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고 풀려 나왔다. 알고 보니 그들의 부모 중에 막강한 권력자와 야쿠자를 배경에 둔 재산가가 있어 사법경찰도 어쩔 수 없었다고 한다. 그녀의 부모는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아버지는 사법행정기관·언론·시민단체 등을 찾아가 억울함을 하소연했지만, 암암리에 작용되는 힘의 논리와 눈에 보이지 않게 구축된 크나큰 권력의 벽을 끝내 허물 수가 없었다. 참다 못한 아버지는 4대째 내려오는 우동가게를 집어치우고, 여러 언론사와 정당 앞에서 가슴에 피켓을 걸고 1인시위까지 하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너무도 화가 난 그는 결국 사적인 보복을 결심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직접 복수하겠다고 범인들을 찾아 나선 지 얼마 안 돼 낯선 불량배들한테 치명적인 테러를 당했다. 가해자와 연관된 야쿠자의 소행이라고 심증만 갈 뿐, 진실은 알 길이 없었다. 그때 무자비한 테러로 뇌를 크게 다친 아버지는 안타깝게도 실성하여, 우에노(上野) 공원을 배회하며 아무데서나 노숙하는 걸인이 되고 말았다. 그녀의 어머니는 이처럼 처절한 상황 속에서도 정신을 놓지 않고 외동딸 미치코를 지성껏 보살폈다. 뿐만 아니라, 우동가게도 다시 열어 근근이 꾸려 나갔다. 엎친 데 덮친 불행의 연속 그렇게 성폭행 사건이 일어난 지 4년이 지날 무렵 큰 변화가 생겼다. 여전히 히키코모리 신세였던 미치코가 어머니의 간곡한 권유를 받아들여 집 근처 교회에 나가게 된 것이다. 본인의 의사는 아니었지만 꾸준히 교회에 나가면서, 그녀는 놀라울 정도로 빨리 안정을 찾았다. 그 결과 신앙생활 1년도 안 돼 정상인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같은 교회에 다니는 마음씨 착하고 성실한 남자를 만나 깊은 사랑에 빠지는 축복도 찾아왔다. 뭐가 급했는지, 두 사람은 훗날 기회를 봐서 예식을 올리기로 하고, 우선 동거생활에 들어갔다. 아무 탈 없이 하루하루 행복한 신혼생활을 꾸려가는 새로운 인생을 맛보게 되자, 세상에 무엇하나 부러울 게 없었다. 그렇게 가슴 벅찬 세월이 흐르는 가운데 아기도 생겼다. 그녀는 엄마가 된다는 사실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지난 날의 불행을 생각하면 꿈 같은 기적이 아닐 수 없었다. 마침내 아주 귀엽고 탐스런 아들이 태어났다. 남편도 뛸 듯이 기뻐하며 자기가 직접 아들 이름을 스즈키(鈴木)라고 지었다. 저 하늘과 이 땅을 다 주어도 바꿀 수 없는, 정녕 이 세상에 둘도 없는 보배 같은 자식이었다. 스즈키는 무럭무럭 자라 어느덧 5살이 됐다. 그런데 아이가 커갈수록 이상한 점이 눈에 띄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정밀진단을 받아보니, 안타깝게도 ‘발달장애’라는 결과가 나왔다. 미치코는 억장이 무너졌다. 혹시 예전에 성폭행당한 후유증 때문은 아닌가 하는 죄책감에 지옥보다 더한 괴로움을 당해야만 했다. 발달장애아를 키우는 부모가 겪는 정신적·육체적 고통과 괴로움이 얼마나 몸서리칠 정도인지는 직접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상상을 못 한다고 한다. 어느 날 부모와 함께 외출한 스즈키가, 어른들이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에, 떨어뜨린 공을 줍기 위해 트럭이 다가오는 줄도 모르고 정신없이 차도로 뛰어들었다. 그 순간 이를 본 아버지가 스즈키를 구하려고 몸을 날렸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어, 두 사람은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말았다. 이 참혹한 광경을 눈앞에서 지켜본 미치코는 넋을 잃고 실신하여 열흘 만에 겨우 깨어났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실신한 딸 곁에서 일주일이 넘도록 잠 한숨을 못 자고 지극정성 간호에 매달리던 어머니가 갑자기 뇌출혈을 일으켜 의식불명이 되고 말았다. 급작스럽게 닥친 견디기 힘든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초인간적인 인내심과 살신성인의 헌신으로 자식을 돌보던 눈물겹도록 고마운 어머니였다. 그러한 어머니가 사랑하는 딸이 의식을 회복하는 것도 보지 못한 채 식물인간이 되고 말았으니, 그녀의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으리라. 누가 인생사를 화불단행(禍不單行: 재앙은 겹쳐서 온다는 뜻)이라 했던가. 하필이면 미치코에게 설상가상의 불행이 연이어 몰아 닥친 것이었다. 그녀가 석양의 낭떠러지를 찾은 날은 줄곧 식물인간으로 누워 있던 어머니가 끝내 세상을 떠나 슬픈 장례를 치른 지 일주일이 되는 날이었다. 그런가 하면, 남편과 아들을 하늘나라에 보낸 지 꼭 6개월이 되는 날이기도 했다. 한숨을 삼키고 눈물을 닦으며 간신히 얘기를 이어온 미치코의 모습은 처연하고 안쓰럽기 그지없었다. 결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지난 상처를 다시 건드려야 했던 미치코는,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자신의 불행에 대한 서러움 때문인지,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 하였다. 그렇게 그녀의 가슴 아프고 안타까운 사연이 마무리되자, 슬픔으로 가득 찬 무애의 눈에도 눈물 방울이 그렁그렁 맺혔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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