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호 (중앙대교수, 미술평론가) 자연의 이미지를 주제로 하는 전경호 작가의 작품은 내면의 심상으로 재해석하여 표현한 추상풍경 같은 것이다. 자연을 터전으로 삼고 있는 삶 속에서 자연을 통해 자아의 존재와 생명력을 확인하고 자연의 질서 속에서 생성되고 소멸되는 생명체를 그러냄으로써 근본적으로 자연과 분리 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자 하였다. 이때 드러난 이미지는 자연을 그대로 표방한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대상에서 출발한 상상력을 통한 추상작용에 의해 표출된 것이며 이는 자연 일부로서 살아가는 삶을 통해 미를 나타내 보려는 순수한 조형적 의지를 가지고 있다. 조형적 요소들은 자연 소재(산, 들판, 긴, 나무 등)에 의한 변형된 형태 사용에 의한 것이며 의도화된 우연의 원리에 입각한 유동적 화면과 콜라주 기법의 사용으로 긴장된 효과와 다양한 공간 표현을 하고자 하였다.
또한 자연형태를 산이나 대지 등을 배경으로 하여 생명의 움직임을 담은 형태인 나무, 들판, 길, 바람지대의 흐름은 고정된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새로움을 추구하려 한 것이다. 그리고 자연이라는 완벽한 존재에 대한 자연스러움과 함께 질서의식을 동반해 나름의 독특한 방법과 새로운 형태를 고안에 내고자 하였다. 작업의 표현 방법으로서는 염색된 색 한지를 여러 겹으로 붙여 말린 후 날카로운 칼을 이용해 사면으로 절단함으로써 다색의 섬세한 파상선을 만들어 내고 그것을 화면 위에 가로로 배열해 내는 방식을 사용한 것이다. 20여 장이 겹쳐진 한지의 절단면은 마치 퇴적층처럼 규칙적인 수평의 리듬을 지니면서 화면 위에 물결처럼 펼쳐 있다. 작업 공적에 많은 시간과 공력이 소요되는 이러한 작업은 결국 도구사용의 전문성과 더불어 주제를 위한 치밀한 색채의 배열 그리고 반복적 작업의 과정에서 요구된다. 암녹색의 평면적인 색채 이미지는 자연적인 것, 생명력, 생동감 등의 상징적인 어법인 동시에 마음속에 은연중 부유하는 것, 손에 잡히지는 않으나 엄연히 존재하는 생명력이 내포된 감성적인 추상 언어로서 시각화하고 있다.
녹색과 적색 색조의 한지가 선을 이루며 펼쳐진 화폭은 보색대비에 의한 시각적 긴장감을 자아내기도 하고 갈색이 주조를 이루는 화면에서는 다양한 색 선의 배열에 의해 대지를 암시하는 풍부한 마티에르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재료적 특성은 작가가 표현의 주제로 설정한 자연풍경의 이미지와 연계를 하며 형식과 내용의 융화를 이루는 미각적 가치를 만들어내게 된다. 초록으로 물든 벌판이거나 구릉지대의 밭고랑 이미지. 아니면 봄날의 기운을 품은 큰 바다의 서정성이 나타내기도 한다. 자연에서 찾을 수 있는 형과 색으로 우리의 전통적인 색 한지를 통해서 우리의 모습을 탐구했다. 이와 함께 인위적인 재료와 색이 아니라 색 한지를 통해서 오는 색의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추구하면서 이중 화법을 통하여 시간이나 공간 그리고 동서양의 예민한 감각과 감성을 조화로운 만남으로 표현하고 내면의 서정적인 동양정신 세계를 표현하고자 하였다. 작가 노트 ‘존재-자연’이란 제목의 콜라주-회화 작품은 판화작품에서 줄곧 소재로 쓰이는 자연과 심상풍경이다. 예술가는 어떤 대상을 바라보든지 그것을 자신 존재의 물음으로 귀결시키며 자연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인식한다. 그렇듯이 이번 전시에 소개된 작품도 자연을 대상으로 하지만 변형된 자연인 색 한지를 오브제로 사용하여 그것을 이미지화하는데 노력을 다했다. 색한지의 강한 대비, 거친 표면질감, 단순화되어 상징화된 형상 그리고 찬 색과 따뜻한 색의 조화로움 등 응축된 회화의 미감이 바로 이 작품의 특징이다. 이는 마치 인간이 갈망하는 이상주의적 관념 속에서 우리가 미처 인식하지 못한 동양적인 신화와 사상을 일깨우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즐겨 표현하고 있는 형상들은 선 그리고 점이나 기하학적 도상, 곡선화된 직선 등으로 조형미의 강약을 조절한 응축된 선이 주제가 되는 새로운 형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