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혜성 동두천 해성산부인과 원장 (서울대병원 산부인과 내분비학 전임, 인제대 백병원 산부인과 외래 조교수 역임) ‘로미오와 줄리엣’을 보면 사랑에 눈 먼 남녀가 부모가 반대하는 결혼 때문에 사랑 대신 죽음을 선택한다. 모든 영화의 주제는 사랑이고, 전쟁영화나 SF영화나 공포영화 마저도 사랑이 바탕에 깔린다. 아무리 많은 돈을 들인 영화도 사랑이 없으면 감동이 없고, 예술적으로나 흥행에 실패하기 쉽다. 그런데 만약에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을 주위에서 축복해 줬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래도 그렇게 뜨겁게 사랑해 죽음에까지 이르렀을까? 사랑의 호르몬이 움직이는 원리를 알면 대답이 나온다. 미칠 듯 연애하던 남녀가 결혼하면 덤덤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주위에서 쉽게 본다. 처음 결혼했을 때의 가슴떨림이나 열정이 차츰 식으면서, 전혀 사랑한 적이 없던 사람처럼, 소가 닭 보듯이 살아간다. 사랑이 줄다 못해 원수처럼 으르렁거리기도 한다. 왜 이런 걸까? 연애 초기의 연인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사랑에 빠지면 실제로 사람은 ‘미친다’. 적어도 화학적인 측면에서는 미친 것과 비슷한 상태가 된다. 이탈리아 피사 대학의 도나텔라 마라치티 교수팀이 사랑하는 남녀의 호르몬 농도를 측정해 봤더니 강박증을 앓고 있는 사람의 호르몬 수치와 비교했다고 한다. 이 두 집단의 세로토닌 호르몬 수치는 모두 병적으로 낮았다. 연애 초기 연인의 세로토닌 수치는 결벽증, 강박증, 우울증을 앓고 있는 사람처럼 정상치보다 약 40% 정도 낮았다. 그리고 세로토닌 수치가 낮을수록 사랑의 감정이 컸다. 강박장애에 시달리는 사람처럼 사랑에 빠진 사람은 연애라는 한 가지 일에만 몰두하게 된다. 처음 만난 남녀 사이에서 불꽃이 튈 때 연인의 뇌는 미친 사람과 비슷. 이럴 때 주변에서 말리면 정말 로미오-줄리엣 된다. 애인에 대한 이런 집착은 친구, 일, 취미를 부차적인 문제로 만들고 모든 생각과 행동을 사랑하는 한 사람에게 집중하게 만든다. 세로토닌 결핍 탓에 자제력을 잃고 비이성적인 행동을 하게 된다. 그래서 연애 초기에는 미친 사람처럼 행동한다. 하지만 이 호르몬은 6개월에서 3년이 지나면 정상으로 돌아온다. 만약 세로토닌 호르몬이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평생을 미친 사람처럼 살아야 한다. 또한 첫 눈에 반하면 페닐에틸아민이라는 호르몬이 분비된다. 페닐에틸아민은 특히 시각적 자극에 반응해 어떤 사람을 보고 마음에 들었을 때 기분 좋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그 순간 온몸에 전율이 일어나고 눈에서는 불꽃이 튄다. 금방 헤어졌는데 또 보고 싶고, 방금 전화를 끊었는데 또 목소리를 듣고 싶게 만드는 것이 이 호르몬이다. 중독이 된 것처럼 가슴이 벅차고, 주위에 반대하는 사람이 있어 못 만나게 막으면 금단현상이 일어나는 것도 이 호르몬 탓이다. 페닐에틸아민은 ‘스피드’, ‘엑스터시’ 같은 마약과 마찬가지로 주성분이 암페타민이다. 이런 마약은 흥분제 작용을 하고 부분적으로 감각인지를 변화시킨다, 페닐에틸아민은 식욕억제제와 비슷한 효과를 내기 때문에 사랑에 빠지면 배도 안 고프다. 연애 초기의 황홀감과 설렘을 안겨 주는 페닐에틸아민은 불꽃이 튀는 것 같은 쾌감을 주지만, 이 호르몬도 무제한 지속되지는 않는다. 6개월에서 3년이 지나면 정상치로 떨어진다. 설레던 감정이 사라지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여성보다 남성에서 더 빨리 나타난다. 페닐에틸아민의 혈중 농도가 떨어지면 식욕이 돌아온다. 이별 후에 폭식을 하는 등 식욕에 변화가 생기는 이유다. 사랑에 빠졌을 때 누군가 반대를 하거나 어쩔 수 없이 헤어지면, 마치 마약중독자가 마약을 못하게 됐을 때처럼 호르몬 농도에 변화가 생기면서 금단현상을 경험하게 된다.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이 식사 후 커피를 못 마시면 안절부절못하고 집중력이 떨어지듯, 흡연자가 담배를 못 피우면 안절부절 못하는 것과 비슷한 현상이다. 이처럼 사랑은 우리 몸에 화학적인 반응을 일으키는 현상이다. 누군가를 좋아하고 미친 상태는 우울증, 의처증, 의부증, 집착증 같은 광적인 상태와 비슷하다. 차이가 있다면 그 광적인 상태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행복하게 생각한다는 것뿐이다. 사랑에 빠진 사람의 심장 상태는 심장질환을 앓는 사람과 거의 같다고 한다. 실제로 가슴이 아프고, 가슴이 뛰고…. 특히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한 사람의 심장은 더더욱 그렇다. 호르몬, 뇌, 심장 모두를 보아도 사랑과 중독은 거의 같은 상태다. 이런 상태로 평생을 산다면 미치거나 심장병에 걸리지 않을 수 없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랑하는 감정의 강도가 줄어들어야 심장도 뇌도 편안해진다. 사랑이 오래 가지 못하도록 하느님이 인간을 그렇게 설계하신 모양이다. 이렇기 때문에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하려는 커플이 있다면 굳이 떼어놓으려고 주변에서 애쓰면 안 된다. 사랑의 불에 기름을 붙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오히려 ‘임신만 하지 않도록’ 하면서 최고 3년까지만 기다리면 대부분 저절로 사랑이 식는다. 미친 듯 한 사랑은 길어야 3년 못 넘겨. 애정 유지하려면 섹스 때 나오는 옥시토신 있어야 하고, 그래서 남녀관계에선 섹스가 필수. 사람은 평생 긴장하고, 평생 뜨겁게 살 수 없다. 사랑한 다음에는 정으로 살아야 한다. 끈끈한 신뢰와 서로에 대한 의도적 노력으로 감동하면 함께 살 수 있다. 그러나 처음 만날 때처럼 뜨거운 것만을 사랑이라고 생각한다면 6개월에서 3년 정도가 지나면 파트너를 바꿔야 한다.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호르몬의 약발이 완전히 사라질 3년이 지나면 서로를 사랑할 방법은 없는 것일까? 아니다. 또 다른 사랑의 호르몬을 분비시키면 된다. 그것은 기분 좋은 섹스를 할 때 분비되는 옥시토신, 엔도르핀, 성장호르몬 등이다. 이 호르몬들은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들고, 덜 아프게 만들고, 젊어 보이게 만든다. 그리고 신뢰감을 높인다. 이런 호르몬들은 섹스를 할 때 분비된다. 그래서 부부 사이가 행복하려면 계속 섹스를 해야 한다. ‘열정적 사랑의 호르몬’인 페닐에틸아민과 세로토닌의 증가 또는 감소는 일을 못하게 만든다. 온통 사랑에 집중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반대로 부부 또는 오랜 연인 사이에 생기는 옥시토신, 엔도르핀, 성장호르몬은 사람을 편안하게 해준다. 그래서 차분히 일을 하려면 이런 호르몬이 나와 줘야 하고 부부는 섹스를 해야 한다. 반대로 부부 사이에 섹스가 없으면 남남처럼 살아가게 된다. 서로를 위해 배려하거나, 희생할 필요를 느끼게 하는 호르몬이 안 나오기 때문이다. 물론 돈을 벌어다 주거나 자식을 키워야 하니까 의무감으로 살아갈 수는 있다. 그러나 사랑, 대화, 삶의 질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남녀가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는 섹스가 꼭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