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준희 세브란스심혈관병원 심장웰네스센터장 / 운동치료클리닉 과장 의료계에 몸담고 있다 보면 가슴 아픈 사연들을 많이 만난다. 내가 치료한 아이 중 15년이 지난 지금도 눈에 선하게 떠오르는 아이가 있다. 3살 난 어린애가 “선생님, 주사 아프지 않게 놔 주세요”라며 눈물을 글썽이던 그 눈동자. 이 아이는 생후 9개월에 심실 중격 결손증으로 수술을 받았다. 2세 미만에서는 크기가 큰 중격 결손도 수술을 하면 좋아지는 것이 상례인데, 이 아이는 이미 폐혈관까지도 이상이 와 있는 상태였다. 수술 전 검사소견에서 심한 폐혈관 고혈압이 있는 것으로 확인됐지만 나이가 어리고 그대로 두면 100% 사망하게 되니 수술을 하면 그래도 희망이 있다는 판단 아래 수술을 권했다. 주사바늘 찌를 곳이 더 없을 정도로 주사를 많이 맞은 3살 어린이부터, 고통에 방바닥을 긁을 정도로 수술 후유증에 시달린 선배까지. 의사는 최선을 다했지만 그 결과는… 그러나 수술 후 계속되는 심부전증으로 사흘이 멀다 하고 입원 치료를 받았다. 나중에는 주사바늘을 찌를 데가 없어서 손등-손목에서도 혈관을 찾아야 할 정도였다. 결국 수술 3년 만에 고생만 하다가 저 세상으로 떠났다. 나는 지금도 생각한다. 차라리 그대로 두었다면 사망 전 고통을 줄일 수 있었을 텐데…. 2년여 전 나와 20여 년 전부터 여행을 함께 다녔고 골프도 거의 매주 함께 했던 학교 선배이자 과 선배이신 분이 암, 그것도 췌장암 진단을 받으셨다. 내가 대학병원에 있으니 그 분은 나와 의논했고 나는 주치의를 정해 드렸다. 예후가 나쁘다는 췌장암이지만 그 분야의 의사에게 물으니 “치료만 잘 하면 괜찮아진다”고 말했다. 종합병원을 찾는 환자들은 항상 느끼겠지만, 이 선배는 자신도 의사이고 선배이면서도 담당의 앞에서 터놓고 질문을 못하고, 알고 싶은 게 있으면 나를 통해 묻곤 했다. 그 분은 투병 의지가 매우 강했다. 원래 성격이 차분한 데다 법 없이도 살 분이었다. 수술 후 퇴원하고도 매일 여의도 주변을 부인과 함께 걸으며 운동을 계속해 나갔다. 그 사이 나는 미국으로 건너가 있었는데 어느 날 연락이 왔다. 다시 입원을 하셨다는 것이다. 이번엔 지난번에 수술을 한 뒤 담도가 막히면서 염증이 와서 다시 수술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다시 수술을 받았지만 상태는 좋아지지 않았다. 주치의에게 통증이 심하다고 하면 “수술을 하면 다 그런 것”이라는 퉁명스런 대답만 돌아왔다. 결국 얼마 못 가 돌아가셨는데 원인은 수술 뒤 생긴 염증에 따른 패혈증이었다. 통증이 얼마나 심했는지 돌아가신 뒤 밑에 깔았던 자리를 치우니 고통을 혼자 참느라고 손톱으로 긁은 자국에 바닥 여러 군데에서 발견됐다고 한다. 이 분은 암 진단을 받고 바로 둘째 아들의 결혼식 날짜를 급하게 잡았다. 결혼식이라도 보시고 가겠다는 심정에서. 그러나 결혼식을 바로 눈앞에 두고 세상을 떠나셨다. 함께 여행을 다니던 분들이 모두 의사 분들이었다. 우리는 지금도 가끔씩 말한다. “그때 차라리 수술을 안 했더라면 좀 더 오래 살아 아들의 결혼식도 볼 수 있었을 것이고 고통도 훨씬 적었을 텐데”라고…. 살려달라고 애원하던 그 부모는 “차라리 그때…”라며 한숨쉬고 시대에 따라 병도 변한다. 아니, 그 나라의 생활수준에 따라 변한다는 말이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1970,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어린이들에게 지금은 사라진 질환들이 많았다. 뇌막염, 뇌척수염, 라이 증후군(감기를 앓다가 갑자기 의식이 없어지며 사망률이 높다) 등 심한 경련을 일으키며 의식이 없어지는 질환들이었다. 경련을 일으키는 환자들이 많아 컨퍼런스 룸까지도 병실로 사용했으며 하루에도 수없이 척추천자(척추에 바늘을 꽂아서 척수를 뽑아 원인을 밝혀내는 시술)를 했다. 사실 척추천자는 어린이에게 쉬운 시술이 아니다. 워낙 척수막이 얇아 어른의 경우보다 어려우며, 잘못하면 혈관을 건드려 척수에 혈액이 섞이면 정확한 검사가 불가능했다. 그러나 수없이 하다 보니 이 시술을 정확히 한 번에 해낼 정도가 됐다. 이 시술은 아이들의 등을 구부리게 한 후 척추에 바늘을 꼽으니 부모들은 애처로워서 몸부림을 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입원하면서 점점 상태가 나빠져 2일이 지나면서 의식도 없어졌다. 우리의 진단은 라이증후군이었다. 나는 부모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힘들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는데, 그 부모가 나를 붙잡고 통곡을 하면서 하는 말이, 자신이 3대 독자인데 결혼하고도 아이가 없다가 나이 40이 다 돼서야 신의 도움인지 아들을 낳았다는 것이다. 이 아이를 얻기 위해 안 해 본 일이 없다며 반드시 살려 달라고 애원을 했다. 지금은 아들 선호 사상이 많이 없어졌다지만 당시만 해도 아들이 우선이었다. 더구나 4대 독자라니 가능하다면 차라리 자신이 죽겠다는 듯한 상황이었다. 내가 “세상에 안 귀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가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라고 했는데도 교수실까지 따라오며 계속 애원을 하는 것이었다. 저녁이 돼서 회진을 마친 뒤 집으로 가려는 나를 붙잡고 “선생님이 직접 봐 달라”고 애원했다. 차마 뿌리칠 수가 없었다. 극적으로 살아난 기쁨과 그 뒤의 탄식 당시는 당직 원장 제도가 있었는데 그날 당직 원장이 동료에게 양해를 구하고 나의 당직일과 바꿔서 그 환자를 봤다. 내가 남아 있는다고 뾰족한 수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죽을 운이 아니었는지 그 아이는 7일 후 살아났고 10일 후 퇴원을 했다. 그때 눈물을 흘리며 고마워하던 부부, 지금도 그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나도 무언가 했다는 뿌듯함을 느꼈다. 그리고 10년이 지나 우연히 병원에서 그 아이의 아버지를 만났는데 재활의학과에 그 아이를 데리고 왔다면서 나에게 “그때 차라리 죽었더라면…. 사람이 아니고 차라리 동물에 가깝습니다. 말도 못 알아듣고 항상 신음소리만 내고…. 아무 방법이 없습니까?”라면서 길게 한숨을 내쉰다. 이 아이는 라이 증후군의 후유증으로 정신 장애와 신체 장애아가 된 것이다. ‘생명을 구하는 것이 다 치료가 아니구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콱 막혀왔다. 아이와 부모가 평생 지고 갈 짐이 얼마나 가혹할까? 문득 생각났다. 어느 부모가 심한 장애아와 동반 자살을 했다는 신문 기사가…. (담당 = 최영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