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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준희 메디컬 40년 에세이 ⑮]“모르면 묻는다”는 원칙이 무시되는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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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238호 박현준⁄ 2011.09.05 10:49:01

설준희 세브란스심혈관병원 심장웰네스센터장 / 운동치료클리닉 과장 의대 시절 3학년 2학기부터 수업은 없고 임상 실습이 임상 각 과에서 4학년이 끝날 때까지 시행된다. 강의만 받다가 청진기를 들고 나오니 이제 정말 의사가 되는가 싶어 우쭐한 기분도 들었다. 환자를 배당 받고 환자 노트를 작성하는 것으로 실습이 시작되는데 학생 신분으로 환자를 인터뷰 하는 것이 쑥스러워서 전공의가 이미 해놓은 것을 베꼈다가 혼이 나서야 용기를 내 환자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어떤 환자들은 노골적으로 무시하기도 했다. 이와 달리 우리가 학생이라는 것을 알고도 친절히 응해 주는 환자도 많았다. 어떤 친구는 수술 방에 들어가는데 덧신을 모자로 잘못 알고 머리에 쓰고 들어가서 웃음꺼리가 되기도 하고, 소독된 장갑을 끼고는 무심코 코를 만졌다가 혼이 나기도 했다. 이런 해프닝을 거치며 환자들을 보는 첫 걸음이 시작됐다. 아침 회진은 교수들이 도는데 교수들은 회진 후 바로 외래를 보거나 수술실에 들어가는 경우가 많다. 학생 교육은 전공의가 저녁 회진에서 담당한다. 주로 선임 전공의가 학생 교육을 담당하는데 순수하게 교육을 할 뜻이 있는지 의심이 갈 정도였다. 의사 사회가 군대 못지않게 아래위 질서를 강조했던 것은 명령 체계가 무너지면 환자 관리에 문제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인데, 이를 너무 심하게 행사하는 의사들이 있었다. 인턴이나 전공의나 밤새면서 환자를 지켜야 하는 일을 학생들에게 시키고 정작 학생들이 배울 수 있는 과정은 시켜주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저녁 회진은 환자들 옆에서 학생들에게 실제 상황을 교육하는 장인데, 이를 주관하는 선임 전공의들은 교육을 시킨다기보다는 선임 전공의로서 폼을 잡고 자신을 과시하는 일도 자주 있었다. 회진을 돌 때 환자 앞에서 질문을 하는데 대답을 못하면 “야. 4학년이 되도록 뭐 했냐”고 핀잔을 줬고, 대답을 하면 또 하나를 물어 결국 핀잔 거리를 만들어내곤 했다. 나는 키가 커서 손해를 보는 편이었다. 키나 작으면 뒤에 서서 보이지 않는데 나는 어디서나 잘 걸리곤 했다. 회진을 돌면서 핀잔 듣는 것도 익숙할 무렵, 어떤 과에서 회진을 도는데 또 걸렸다. 이 소문난 선임 전공의, 내가 질문에 대답을 못하자 “몰라? 야! 이건 기초야. 네 부모가 불쌍하다. 의사가 될지 말지도 모르는 놈에게 비싼 등록금을 내주다니!” 한다. 부모님까지 들먹이는데 나도 모르게 화가 치밀어서 “그게 우리 부모님하고 무슨 상관입니까? 내가 그런 것 다 알면 왜 학생입니까? 모르니까 등록금 내고 배우는 거 아닙니까? 학생들 물 먹이면 쾌감을 느낍니까? 모르면 가르쳐 주면 어디가 덧납니까?”라고 했다. 질문을 하면 “그것도 모르냐”고 핀잔을 주는 선임 의사들도 있지만, 모르면 왜 학생이겠는가? 모를 때 물어야 알게 되는 게 이치인데, 묻지 못하게 만드는 한국의 풍토는 정말… 불의의 일격을 당한 선임 전공의는 상당히 당황해하며 잠시 머뭇거리다 화를 내기 시작했다. “어디서 말대꾸야! 건방진 놈.” 나는 내친김에 한마디 더했다. “학생밖에 만만한 사람이 없나 보네요” 하면서 자리를 떠 버렸다. 내가 선임 전공의가 됐을 때 학생들에게 나의 그 사건(?)을 말해주곤 했다. 우리 학생들은 항상 주눅이 들어 있다. 지금까지도 모른다고 핀잔을 주는 의사가 있고, 더구나 우리나라 사람들이 활동적으로 질문하고 대답하는 자세가 부족하기 때문에 강의 때나 실습 때나 질문도 거의 없고 교수가 질문을 할까봐 피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나는 학생들에게 말한다. “너희들이 다 알면 왜 등록금 내고 다니겠느냐? 모르는 게 당연하니 모르는 것은 물어라. 의학에서 기초적인 것을 모르는 데도 질문하면 핀잔을 들을까봐 지나가면 영원히 모르게 된다. 질문을 했는데 ‘그 쉬운 것도 모르냐’고 핀잔을 준다면 그 의사의 자질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전문의가 되고 나서 절실하게 느끼는 것은 학생이나 전공의 때 기초를 다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 시절에 모르는 사실을 그냥 넘어가면 영원히 모르고 가게 되기 때문이다. 두개골을 베고 잠을 자다보면… 의사 지망생들에게 인체 해부는 가장 중요하다. 구조를 먼저 알아야 거기에 따른 기능도 이해가 되기 때문이다. 인체 해부학을 배우기 전 예과에서는 비교 해부학이라고 해서 동물 해부를 먼저 배우게 된다. 제일 먼저 시작된 뼈에 관한 실습. 지금도 왜 그런 수업을 시켰는지 이해가 안 되는데 개구리를 잡아 살은 빼고 뼈만 추려서 원래의 구조대로 붙여 오라는 것이었다. 당시 신촌은 지금의 연희동 사거리 부분이 모두 개천가였다. 따라서 개구리를 잡는 일은 쉬웠다. 문제는 뼈를 추려서 붙이는 일. 동기들 몇 명이 개구리를 잡아서 솥에 놓고 끓여서 뼈는 쉽게 추려냈다. 문제는 복원. 아교까지 동원됐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밤늦도록 고생해서 다음날 제출하는데 조교는 보지도 않고 두고 가란다. ‘아무 공부도 안 되는 일을 왜 똥개훈련 시키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이 닭 해부였다. 그런데 해부를 깨끗이 한 뒤 도로 반환하라는 지시였다. 지금은 싼 축에 속하는 계란이나 닭이지만 당시에는 비싼 편이었다. 우리는 몇 명이 짜고 당시 실습실 뒤 창문으로 닭을 빼돌려서 배불리 먹었다. 우리가 아니었다면 생물학과에서 중국집에 맡겨서 라조기를 만들어 먹었겠지만 닭 값은 우리 등록금에서 지출된 것이니 정당하지 않은가? 나중에 진상을 조사한다고 난리가 났었지만…. 본과 1학년에서 가장 힘들다고 소문난 해부학. 처음 해부학 실습실에 들어가니 우리 80명을 위해 20구의 시신이 뚜껑을 덮은 채 기다리고 있었다. 기도가 끝나고 20구의 모습이 나타나자 여기저기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그 유명하신 해부학 교수님은 “울 사람들은 다 나가” 하신다. 아마도 이제부터는 시신으로 보지 말고 실습물로 보라는 의미였던 것 같다. 해부학 첫 시간에는 시체를 보고 흐느꼈던 의대생들이 해부학 숙제에 시달리다 보면 시체 옆에서 밥을 먹고 어느덧 두개골을 베개 삼아 자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니… 결론부터 말하면 해부학 실습은 고생만 하다 끝났다. 피부 아래 있는 가는 신경을 해부하다 끊어 놓은 게 발각되면 실습실에서 쫓겨나는 것이었다. 우리는 가는 실에 시신의 기름기를 묻혀서 넘어가려고도 했다. 그 당시 나는 저녁에 수영 훈련을 받고 있었는데 그 시간이 저녁 7시였다. 그런데 거의 매일 해부학 리포트를 그려서 내라고 하는데 한 번에 통과되는 법이 없고, 저녁 10시는 돼야 집에 보내주는 것이었다. 나는 점심을 해부학 실습실에서 해결하면서 어떻게 해서든 수영 훈련은 받으려고 했다. 시신 옆에 도시락을 놓고 졸리면 시신에 머리를 대고 자는 등 첫 시간에 숙연하기만 했던 마음은 이미 온데간데없었다. 인간의 대단한 적응 능력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그러나 아무리 시간을 쪼개어 열심히 해서 제출해도 이른 저녁에는 무조건 퇴짜였다. 그래서 ‘에라, 모르겠다’ 하는 마음에 그냥 보지 않을 때 책상에 던져 놓고 수영장으로…. 벌이 내려지는데 실습 시간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나는 실습실에 참여했던 시간보다 쫓겨나 있던 시간이 더 많았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그 당시 학생들은 무척 불행했다. 해부학은 임상, 즉 환자를 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어야 하는데…. 심장학을 전공하고 있는 나는 학생 때는 심장의 내부 모양을 배우지 못했다. 지금 의대생들이 받고 있는 3D 영상 등을 통한 최첨단 교육 방법은 꿈도 꾸지 못했던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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