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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중군자 장계향 순례길 스토리텔링 ③]탄생 집(陽宅)에서 영혼 집(陰宅)까지

안동에서 장계향을 만나는 ‘세상에서 가장 긴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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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296호 박현준⁄ 2012.10.22 11:08:24

안동은 참 묘한 곳이다. 안동 시내를 거닐다 보면 갓 쓰고 도포 입은 어르신과 핫팬츠 입은 아가씨를 동시에 볼 수 있고, 번다한 도심을 벗어나 조금만 나서면 곳곳에 고색창연한 고택들이 모여 있는 모습을 만날 수 있다. 불천위(나라에 공로가 있어 4대 봉사를 마친 후에도 신위를 묻지 않고 사당에 영구히 모시는 조상)가 있는 종택만 50여 곳에 이를 정도로 전통문화의 맥이 잘 전승되어 온 곳이기도 하다. 안동 곳곳에는 ‘정신문화의 수도’라는 표지판이 붙어 있다. 비록 행정수도는 서울이라 해도, 정신문화의 수도는 안동이라는 지역 자부심의 발로다. 그래서일까, 안동이 배출한 시인 유안진은 안동을 ‘어제의 햇볕으로 오늘이 익는’, ‘과거로서 현재를 대접하는 곳’이라 절묘하게 묘사하고 있다. 장계향에게 안동은 한 인간으로서 일생의 시작과 끝이 만나는 지점이다. 두 개의 집, 즉 양택과 음택의 인연을 지닌 의미 있는 곳인 것이다. 육신의 몸을 얻어 태어난 곳이기도 하지만 출가와 함께 영덕 나랏골, 영양 석보와 수비 등 여러 차례의 이거(移居)를 거쳐 세상과 이별한 후 다시 돌아와 영혼의 안식처를 얻은 곳이 바로 안동이다. 탄생과 죽음은 개인에게 있어 세상에서 가장 긴 여행이다. 이제 하루 동안 안동에서 장계향의 궤적을 따라 ‘세상에서 가장 긴 여행’을 떠나보자.

총명하고 탁월한 천부적 재능을 지닌 소녀 장계향은 7년간에 걸친 임진왜란의 막바지 1598년 11월, 아버지 경당 장흥효(1564~1633)와 어머니 안동 권씨 사이의 외동딸로 안동 검재(서후면 금계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경당은 조선 중기의 대학자로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평생을 제자들과 학문을 논하며 수백 명의 제자를 길러낸 인물이다. 당대의 거유 학봉, 서애, 한강에게 모두 사사하였고 퇴계의 학맥을 잇는 적통자로 인정받아 많은 제자들이 그의 집을 드나들었다. 장계향은 어찌나 총명했던지 10세 정도 되는 나이에 소학(小學)과 십구사략(十九史略)을 깨쳤으며, 크게 힘들이지 않고 글의 뜻을 통달했다고 한다. 그녀의 영특함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일화가 ‘행실기’에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일찍이 선생(장흥효)이 제자들과 이야기를 하다가 ‘원회운세(元會運世)’라는 대목에서 그 뜻을 잘 아는 사람이 없었다. 잠시 후 안방으로 들어가 열 살 남짓 된 딸아이를 불러 물었다. 아이는 말없이 숫자를 되짚어 보더니 정답을 말하였다. 선생은 크게 기특하게 여겼고 이로부터 아침저녁으로 마주앉아 가르치셨다.” 원회운세란 우주의 발달단계를 숫자로 계산하는 원리인데 장계향이 셈에도 빨랐음을 보여준다.

어린 시절 장계향은 여러 편의 시와 개성 강한 그림을 남긴 소녀 예술가이기도 했다. 그녀가 어릴 때 초서로 쓴 ‘적벽부’는 당대 서예의 대가였던 정윤목이 기풍과 필체가 호기로워 우리나라 사람의 글씨와는 다르다고 극찬할 정도였다. 유일하게 전해지는 그림 ‘맹호도’는 사나운 호랑이가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특히 시인으로서 그녀의 재능은 천부적인데, ‘학발시’, ‘경신음’, ‘소소음’ 같은 주옥같은 시들이 전해진다. 이런 시·서·화 작품들의 대부분이 12세를 전후해 이루어졌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광풍정과 제월대, 경당종택 안동에서 봉정사 방면으로 접어들어 가다보면 학봉종택을 지나 광풍정(光風亭)과 제월대(霽月臺)를 만날 수 있다. 두 건물이 상하 수직으로 우뚝 서 있어 멀리서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으며, 저렇게 멋진 정자들은 어디일까라는 궁금증과 감탄을 자아낸다. 광풍정은 경당이 제자들에게 강학한 곳이고, 광풍정 뒤로 절벽을 오르면 커다란 암벽 위에 제월대가 훤칠하게 버티고 서 있다. 광풍정에서 강학이 끝난 후 경당이 제자들과 함께 이곳에 올라 시를 읊곤 했다고 한다. 제월대에 올라 앞을 바라보니 마을이 한 눈에 들어온다. 높은 곳에 자리해 눈 맛이 정말 시원하다. 경당 생전에는 제월대라 직접 명명한 바위뿐이었으나 후대에 누각을 만들어 올렸다고 한다.

제월대라는 사유의 공간이 있었기에 경당이 세상을 발아래 두고 구름 속 바위에 앉아 자신의 학문을 ‘경(敬)의 철학’으로 정립할 수 있지 않았을까. 장계향이 태어난 생가터는 광풍정 옆 현재 주차장 자리라고 한다. 원래 경당종택은 광풍정 옆에 있었으나 장성진 종손(74세)이 9살 때인 1946년 지금의 종택 자리로 옮겼다고 한다. 장계향 순례길을 디자인할 때 광풍정과 제월대와 묶어 장계향 생가를 복원하는 작업이 필요해 보인다. 광풍정을 떠나 서후면 사무소에서 조금 더 들어가면 경당종택이 있다. 원래 경당과 권씨 부인은 슬하에 외동딸 장계향만 두었다. 더구나 1619년 권씨 부인이 세상을 뜨자, 홀로 남게 된 아버지와 차마 떨어질 수 없었던 장계향은 시아버지와 남편의 허락 하에 친정에서 2년을 더 머물면서 아버지를 모셨다. 새어머니를 맞아 친정의 후사를 잇도록 하고, 아버지가 70세를 일기로 세상을 뜨자 계모와 4남매를 데려와 살아갈 터전을 마련해주었다. 근처에 친정의 사당을 짓고 조상 제사를 받들게 했으며, 친정 동생들을 남편에게 교육받도록 하고, 이후 동생들이 고향 검재에서 일문을 형성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주었다. 장계향의 결단과 보살핌이 없었다면 지금 경당의 후손은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장계향을 현대적 의미에서 Mom-CEO라고 부르는 맥락이 여기에 있다. 당시 '출가외인'이라는 가부장적 유교시대의 예법과 제약에 얽매이지 않고 전통을 존중하면서도 현실을 적극적으로 개척해 나간 창조정신을 지녔기 때문이다.

종가음식의 대표 칠첩반상과 손칼국수 경당종택에는 반가의 손맛도 이어진다. 권순 종부(73세)의 7첩 반상은 가히 입에 넣기 아까울 정도로 예술적이다. 바늘귀도 통과할 만큼 실처럼 가늘게 썬 우엉채볶음이나 입에 넣으면 솜사탕처럼 그대로 녹아버리는 명태보푸름은 과연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게 맞는지 맛을 보면서도 의심케 한다. 반상에 오르는 모든 채소는 직접 농사지은 유기농 야채만 쓰고, 육류와 문어는 단골집의 검증된 재료가 아니면 사용하질 않는다. 무엇보다 경당종택의 특미는 콩가루를 넣은 안동식 손칼국수이다. 종부가 직접 반죽을 홍두깨로 밀고 칼로 고르고 얇게 채쳐 끓여낸다. 반죽이 얼마나 얇은가 하면 창호지마냥 글씨가 비칠 정도이다. 반죽을 얇게 밀어 균일한 간격으로 긴 국수발을 만들어내는 것 자체가 하나의 행위예술처럼 보인다. 경당종택에서는 종가음식 체험뿐만 아니라 제사나 잔치상에 올라가는 과일고임 체험도 가능하다. 밤, 대추, 땅콩, 호두, 다식 5가지 고임상을 차려내는 일은 종손의 몫이다. 땅콩고임의 경우 생땅콩을 사다 볶고 반을 갈라 눈을 따내고 30여 층으로 괴어 올려 완성하는 데까지 꼬박 사흘은 걸린다고 한다. 밥을 먹었으면 소화도 시킬 겸 후원으로 가볼 일이다. 500평 가까이 되는 너른 후원은 풀 한포기 허투루 나지 않고 말끔히 정리되어 있다. 매일같이 풀을 뽑고 잔디를 정리하고 나무를 가꾸기 때문이다. 종손의 노고와 정성이 어떠한지 알 수 있다. 후원 뒤편 나무에는 운치 있게 그네도 매어져 있다. 후원에 발을 들인 여인네는 누구나 그 그네를 타보고 싶어 한다. 바람에 그네를 실어도 좋고 그저 그네에 앉아 후원을 바라봐도 평화롭기 그지없다.

400년 전 멘토 장계향의 넋이 머문 곳 경당종택을 떠나 이제 여중군자 장계향의 묘소를 찾아 나서야 할 길이다. 서안동 IC 쪽으로 올라가다 안동과학대학 앞에서 왼편 굴다리를 통과해 건너편으로 길을 건너면 ‘여중군자 장계향 묘소’가는 길 표지판이 보인다. 안내 표지판이 곳곳에 세워져 있어 묘소가 있는 수곡리 마을을 찾기는 쉽다. 명나라가 청에 굴복해 나라를 잃자 남편 이시명은 이러한 현실에 낙담하여 세상의 연을 끊고 살 것을 결심한다. 부부가 안동 수곡리에 들어가 마을 이름을 명을 숭상한다는 의미에서 대명동(大明洞)이라 짓고 기거하면서 석계는 그곳에서 단고서당을 열어 아이들을 가르치다 세상을 떠난다. 남편이 별세한 후 장계향은 영양 석보로 돌아가 지내다 1680년 83세를 일기로 자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세상과 이별한다. 석보에서 육신의 겁은 벗었으나 영혼의 안식은 안동에서 이루어진다. 장계향의 묘소는 남편 석계 이시명의 묘소 뒤편 어른 걸음으로 120여 걸음을 옮기면 나타난다. 조그만 솔숲을 지나 만나는 낮고 둥근 봉분이 장계향의 묘소다. 석양에 비껴 양감을 얻은 그녀의 묘소는 원만하고 따뜻해 보인다. 현재 영양 석보 원리에서 안동 풍산읍 수곡리까지 자동차로 72km(180리)의 거리. 지금보다 도로사정이 좋지 않았던 그 시절, 석보 골짜기에서 상여를 매고 안동 장지까지 어떻게 왔을지 궁금하다. 석계종택 이돈 종손(75세)은 “아마도 장지까지 모시는 데 이틀은 족히 걸렸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달그림자가 비치는 곳, 장계향 시비 이제 후세들이 기념하는 장계향의 행적만이 남았다. 안동 시내로 들어와 임청각을 끼고 접어들면 안동댐이다. 임청각은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이었던 석주 이상룡의 생가이다. 석주는 나라가 망하자 사당에 모셔 놓았던 조상의 위패를 땅에 파묻고 노비를 해방하고 가산을 정리해 식솔을 이끌고 서간도로 떠난 항일 독립운동의 상징적 인물이다. 임청각을 지나 올라가면 ‘달의 그림자가 비치는 공원’이라는 월영공원이 나온다. 해거름 안동댐은 아름답다. 월영공원에 자리한 장계향 시비를 찾아본다. 이육사 기념비 건너 나란히 마주한 장계향 시비에는 ‘경신음(경건한 몸가짐을 다짐하며)’이 새겨져 있다. 장계향은 1999년 문화관광부가 지정한 이달(11월)의 문화인물로 세상에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는데, 그해 안동청년유도회에서 뜻을 모아 시비를 세웠다. 시비 뒤편에는 “이 시는 경당 장흥효 선생의 따님이자 석계 이시명 선생의 부인이며, 갈암 이현일 선생의 모친이신 장씨 부인이 10여세 무렵에 지은 시이다”로 시작하는 안내 글이 새겨져 있다. 그 당시로는 이름 없이 정부인 안동장씨로만 불렸던 장계향을 가장 잘 표현한 문구였겠지만, 시대를 앞서간 선각자, 깨달은 여성, 전인적 여성상으로 인식되는 오늘날에는 여전히 누구의 딸, 아내, 어머니로 먼저 소개되는 글귀가 여성의 삼종지도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아 살짝 아쉽게 느껴지기도 한다. 월영공원은 이름처럼 어두워져야 진면목이 드러난다. 주위가 사위어지고 월영교에 하나 둘 등불이 켜지면 불빛이 댐 수면에 비쳐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제는 여행을 끝내고 일상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장계향은 안동이란 터에서 세상에서 가장 긴 여행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그녀의 가르침은 평범하지만 특별하다. 위대한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삶을 정성껏 살아내는 것이 결국 성인(聖人)에 이르는 길이라는 것을 몸소 실천하며 보여줌으로써 400년 전 역사 속 박제된 인물이 아니라 현대, 또 미래 세대와 같이 호흡하는 멘토로 생생히 되살아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안동권 코스 : 광풍정·제월대 → 경당종택 → 단고서당 → 여중군자 장계향 묘소 → 월영공원 장계향 시비 - 정일선 경북여성정책개발원 정책개발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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