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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성의 옛절터 가는 길 - 20] 구기동~북한산성 절터 길

“만산홍엽 천하명산 북한산에서 도성의 천년 흥망성쇠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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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300호 박현준⁄ 2012.11.12 10:57:47

서울의 북한산만큼 현존하는 절이나 옛절터가 산재해 있는 산도 많지 않을 것이다. 현존하는 절이 종단 소속과 개인 사찰을 합쳐 70 여 곳이라 하니 가히 불국토(佛國土)를 이루고 있다 할 만 하다. 역사 속에서도 많은 절들이 있었다. 아마도 가장 오래된 절의 흔적은 삼양동 불당골(佛堂골)일 것이다. 1967년 무렵 이 지역은 천막집이나 판자집을 짓고 사는 가난한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 던 곳이었다. 그 해 2월 판자집의 집터를 고르던 주민의 삽에 쇠붙이 부딪는 소리가 들렸다. 걸려 나온 물건은 20cm 정도의 금동관음보살, 그 주민은 당시로서는 거금인 60만원의 보상금을 받았다. 당시 황수영 박사는 전형적인 백제 양식이라 했고 그 뒤 연구자들은 고신라, 또는 고구려 양식으로 보는 이들이 있다. 이 금동관음은 출토지역이 확실한 소중한 유물로 인정되어 국보 127호가 됐다. 그렇다면 삼양동 불당골에는 이미 7세기에 신라(또는 백제나 고구려)의 절이 있었던 것이다. 또 세검정 초등학교 자리에는 신라 무열왕 때 세운 장의사(壯義寺 )가 자리잡고 있었다. 한편 은평뉴타운 공사과정에서는 후기신라 화엄10찰의 하나인 청담사(靑潭寺)란 명문이 기록된 기와가 출토되었으니 북한산은 삼국시대를 거쳐 후기신라의 절들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가장 오래된 흔적, 삼양동 불당골 고려로 넘어 오면 무수히 많은 절들이 자리했으니 승가사, 문수사, 진관사, 삼천사, 사현사, 신혈사, 향림사, 태고사, 인수사, 중흥사... 등 가히 불국토를 이루었다. 또한 적어도 조선초에는 나암사, 적석사가 문헌에 나타나고 북한산성이 축성되면서 성(城)안에만 중흥사, 용암사, 보국사, 보광사, 부왕사, 원각사, 국녕사, 상운사, 태고사, 진국사, 봉성암, 원효암, 서암사가 신축되거나 중수되어 산성(山城)을 지키는 호국사찰이 되었다. 이밖에도 기록에 남아 있는 성밖 절들도 있었다. 세종임금의 둘째 공주인 정의공주 원찰 도성암을 비롯해 화계사, 조계사, 도선사, 정토사, 수도암, 내원암, 금선사, 연화사 등도 나타난다. 여기에는 현존하는 절도 있고 이름만 남기고 사라진 절들도 있다. 이뿐이랴? 골짜기 곳곳에서 만나는 기와편들은 그 곳이 절터였음을 우리에게 전해 준다. 그 곳들은 이름도 그 곳이 절터였음도 우리 시대 사람들에게는 잊혀진 지 오래다. 어느덧 늦가을, 낙엽을 밟으며 구기동길로 들어선다. 북한산을 오르는 가장 전통적인 코스이다. 구기 파출소 앞에서 이북오도청길을 버리고 우측코스로 들어선다. 다행히 시멘트 구거에 갇힌 계곡수는 분리하수관을 해 놓아 맑음을 유지하고 있다. 너무 많은 저택과 업소가 이렇게 산 깊숙이 들어설 수 있게 허가되었던 지난 날 우리들의 수준이 부끄럽다. 산으로 접어드는 길 거의 끝 무렵에는 자연을 지키자는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는데 그 아래쪽에는 ‘대동단(大同團)본부터’를 알리는 표지석이 앉아 있다. 의친왕 이강(義親王 李堈) 공(公)의 망명을 추진했다는 내용이 간단히 적혀 있다. 우리에게도 일제 침략기에 분연히 일제에 맞선 자랑스러운 왕족(王族)이 있었다. 바로 고종의 5번째 왕자 의왕 이강공이다. 이 분은 일찍이 미국 유학을 다녀왔고 3.1독립선언에 이은 2차 독립선언서에 왕족으로서는 유일하게 서명하는 등 적극적으로 독립정신을 표출했던 시대의 남아였다.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난 그 해에 상해임시정부에서는 국내요인 망명작전을 추진하였다. 대상은 의왕 이강공과 중추원 의장 동농 김가진 선생이었다. 동농 선생은 일산에서 기차를 타고 압록강을 건너 상해에 도착 다행히 망명에 성공하였으나 의왕 이강공은 아깝게 실패하였다. 일제의 감시를 받던 이강공은 이 곳 (조선민족)대동단에서 변복을 한 후 수색에서 기차를 타고 압록강을 건너 안동(安東: 지금의 단동)역까지는 무사히 감시를 따돌렸으나 그만 안동에서 발각되어 국내로 압송되었다. 그 때가 1919년 11월 11일이었다. 비밀아지트를 불과 200m 남겨 놓은 지점이었으니 아쉽기 이를 데 없다. 단풍이 잘 어울리는 문수사의 추억 이제 산길로 접어든다. 구기분소를 지나니 맑은 계곡수에 단풍이 떠 내려 온다. 이 계곡이 구기계곡이다. 이 곳에서 첫 번째 목적지 문수사(文殊寺)까지는 1시간 남짓 걸리는 거리이다. 계곡에는 버들치들이 헤엄치고 있다. 산길 20여 분 오르면 대남문과 승가사(僧伽寺)로 나누어지는 갈림길을 만난다. 길만 갈리는 것이 아니라 계곡의 물길도 갈린다. 주 물길은 승가사쪽 물길이다.

이 곳은 1차 휴식장소로서 의자와 탁자도 마련되어 있어서 잠시 커피 한 잔 마시고 출발이다. 가파르게 오르기 시작하는 대남문 방향으로 길을 잡는다. 이 길도 엄살을 부린다면 깔딱고개 구간이 있다. 한 30분 땀을 흘리고 나면 두 번째 갈림길을 만난다. 좌측 갈림길 문수사(文殊寺)와 곧바로 오르는 대남문 방향길이다. 오늘의 첫 목표는 문수사이다. 길이 갈려 문수사 방향으로 향하는 발길에는 여기저기 기와편들이 발길에 채인다. 가파르게 올려치는 길 위로는 문수사의 건물들이 올려다 보인다. 이 곳 문수사 아래 평탄지에 무슨 기와편이 이리도 많은 것일까? 길 안쪽 좌우를 살펴보면 특히 우측(대남문 쪽)으로 초석으로 보이는 돌들과 기와편이 여기저기 우거진 잡초 속에 흩어져 있다. (왼쪽 보현봉 오른쪽 문수봉, 천혜의 요새) 문득 이 곳에서 몸 돌려 온 길을 되돌아본다. 방향은 거의 정남(正南)에 가깝다. 골짜기 사이로 시야가 확보되면서 멀리까지 시야가 트여 있다. 좌로는 보현봉(普賢峰)이, 우로는 문수봉(文殊峰)이 좌우로 협시(挾侍: 양쪽을 끼고 시중듦)하는 곳이다. 이 곳에 금당을 앉히고 부처를 모신다면... 그렇다 고려적 문수사는 절벽이나 다름없는 저 가파른 위가 아니라 이 곳 평탄지에 있었을 것 같다. 지금의 위쪽은 문수굴 기도터였을 것이다. 법당 부처님 양쪽 곁에 지혜(智慧)의 문수보살과원행(願行) 보현보살이 협시하듯 이 곳에 절을 앉히고 양봉우리의 이름을 보현과 문수로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절은 어느 길로 올라왔던 것일까? 순간 문수사의 옛그림이 그려진다. 옛절터를 보면 한결같이 계곡가 산등성이에 자리잡거나 계곡이 끝나는 곳 샘터 양지바른 곳에 자리잡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우선은 식수가 확보되고 또 하나는 계곡가로 오르는 길을 내면 가장 쉽게 다닐 수 있는 통행로가 확보되는 것이다. 문수사는 어떠했을까? 아마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고려적에는 오늘 우리가 오른 산등성이를 넘는 길이 아니라 계곡길로 다녔을 것이다. 이 지역 계곡의 흐름을 보면 조지서동(세검정) 골자기 지나 구기계곡길로 접어들면 승가사 오르는 계곡길이 있다. 승가사도 고려적에는 이 계곡길이 주통로였을 것이다. 이 계곡길 500m 정도 오르면 지금은 자연보호구역으로 막혀 있는 우측 계곡길이 있다. 이 계곡의 끝이 바로 문수사이다. 그러니까 승가사와 문수사는 같은 계곡길로 올라와 갈렸던 것이다. 필자의 기억으로는 문수사 오는 계곡길에는 아담한 두 개의 절터가 있었다. 무너진 축대와 흩어진 기와편들... 아마도 문수사 오르는 길 목마르고 숨차면 쉬어가는 암자들이었을 것이다. 이제 사람들 발길이 그쳤으니 이 가을 다람쥐와 산새들의 놀이터로 잘 있는 것일까. 가파른 층계를 올라 문수사에 닿는다. 고려 예종4년(1109년) 명필 탄연이 창건하였다. 문수사 사찰설명문에는 고려적 의종(1167년), 문종과 그 따님 연창공주가 다녀갔다 하고 어사 박문수와 이승만 대통령도 이 곳에 기도하여 얻은 자식이라 한다. 문수굴이라고 부르는 자연굴이 있는데 그 안에 모셔졌던 삼불(三佛)과 오백나한에 대한 기록들이 전해진다. 이 곳을 찾았던 실학자 이덕무 선생의 북한산 산행기인 유북한기(遊北漢記)를 보자. “굴 이름은 보현굴인데 혹 문수굴이라고도 한다. 세 부처가 계시는데 돌은 문수보살, 옥은 지장보살, 금 입힌 것은 관음보살이기에 삼성굴이라고도 한다.(窟名普賢 或曰文殊 有三佛 石曰文殊 玉曰地藏 金塗者爲觀音菩薩 以是亦曰三聖窟)”

이승만 대통령 출생의 비밀이 서린 곳 지금 문수굴이라고 부르는 자연동굴은 문수굴, 보현굴, 삼성굴로 불렸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좌우로 500나한이 층층이 앉았다(左右五百羅漢 坐累累也) 했건만 삼불(三佛)도 오백나한도 없다. 굴 안은 근래에 봉안한 생경한 불상과 나한상들이 있을 뿐이다. 다행히 굴 안에는 그 시절 돌틈에서 떨어지던 운근수(雲根水: 石水)가 변함없이 떨어지고 있다. 목마른 이 목축이고 갈 일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북한지(北漢誌)에는 고려, 조선의 시인 묵객들이 읊은 문수사 詩가 여러 편 실려 있다. 이 절을 창건한 탄연선사가 읊었다. 路穿石罅通 泉透雲根落(노천석하통 천투운근락: 길은 바위 틈으로 뚫렸고 샘은 돌을 스며 떨어지네) 선사시여! 다행히 선사께서 읊으신 그 석간수는 아직도 그대로 떨어집니다. 이 덕무 선생이 문수사에서 식사 후 문수성문(文殊城門: 지금의 대남문)으로 들어 가셨기에 필자도 보현봉을 마주하고 김밥 한 줄 먹는다. 보현봉은 변함없이 우뚝하다. 30년 전 선친(先親)을 모시고 20대의 내 젊은 아내와 저 앞 사자능선을 지나 보현봉에 올랐던 기억이 새롭다. 그 날도 이 곳 문수사 앞마당에 앉아 보현봉을 바라보며 김밥을 먹었었다.

상념을 떨치고 대남문으로 들어간다. 오늘 두 번째 찾아가는 절터는 이름도 생소한 나암사(蘿岩寺, 羅岩寺)이다. 나암사는 청수동암문 아래 계곡가에 있다. 대남문에서 좌(서북쪽)로 방향을 틀어 문수봉 뒤 성벽길 옆 등산로로 10분 미처 못가면 청수동암문이 있다. 바로 아래로는 사람이 거의 다니지 않는 계곡길 등산로 나무계단이 있는데 이 계단 아래 100여m 좌측 언덕에 무너져 내린 석축 위에 절터가 있다. 북한산관리공단에서 노트만한 안내판을 꽂아 놓았는데 ‘나암사터’를 알리고 있다. 곧 안내판도 세우겠다고 한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있는 나암사 기록 북한산성 모든 것을 기록한 북한지에도 이 곳 나암사에 대한 기록은 없다. 조선왕조실록과 양명학자 계곡 장유(谿谷 長維) 선생 문집에는 나암사에 대한 기록이 전해진다. 동국여지승람에는 고양군(高陽郡)조에 나암사가 기록되어 있다. 종단에서 발행한 ‘한국의 사지’에는 이들 기록을 현 위치(북한동 산1-1)로 해석하고 있는 듯하다. 필자가 보기에 이 절터(산1-1)를 나암사로 본다면 나암사는 두 곳에 있었다고 보여진다. 이 곳 나암사와 고양군에 있었던 나암사이다. 이 곳을 북한산 나암사라 한다면 근거가 될 만한 기록이 세종실록 15년(1499년) 7월 기사에서 볼 수 있다. 도성의 풍수를 논하는 기사인데 “삼각산에서부터 서남쪽으로 감돌아 한 산줄기가 되는데 나암사의 남쪽 끝을 돌고 그 산줄기가 또한 서남으로 돌아 무악의 경계에 이르니.. 自三角西南回作大一枝 環至羅巖寺之南極 其一枝亦西南回至毋嶽之西畔...” 한편 다른 기록에 있는 나암사는 고양군 행주에 있었던 나암사의 기록이다. 태종 11년(1411년) 기사에는 상왕 태조가 행주 나암사에서 목욕하고 7일간 매사냥하고 돌아온 기록이 보인다(上王至幸州羅庵寺沐浴, 因放鷹七日而還). 세종 즉위년(1418년) 기록에도 태조가 나암사로 돌아갔다는 기록이 있다. (老上王還羅庵寺) 더욱 분명한 것은 계곡선생집에 있는 두 편의 詩이다. 한편은 ‘고양의 농막에서 술에 취해 저녁에 나암사에서 묵다(高陽村墅被酒 暮宿蘿巖寺)’라는 시인데 북한산성 안에 있는 나암사는 아니다.

두 번째 시는 나암사(蘿巖寺)라는 제목으로 읊은 시이다. ‘산루 저 멀리론 석양 무렵 마을 풍경 (山樓遙對夕陽村 ) 먼지 낀 사리탑(舍利塔)에 희미한 석등(石燈) 불빛 (古龕塵滿佛燈昏). 현재 북한산성 안 나암사터로 알려진 곳에는 마을도 사리탑도 석등도 없다. 그러면 고양 행주의 나암사는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군 동쪽 15리(郡東十五里)에 있다 했는데 서오릉 앞 봉산(졸고 옛절터 ? 봉산~ 서오릉길 참조)도 군동쪽 15리라 했으니 나암사는 이 곳 봉산줄기 서쪽 어딘가에 그 흔적이 있을 것이다. 북한산 나암사터로 알려진 이 절터는 의외로 자그마하다. 사람들이 많지 않은 곳이라 부서진 기와편과 흩어져 있고 분청사기 조각들도 보인다. 이제 다시 내려 왔던 청수동암문으로 돌아간다. 남장대와 행궁터를 둘러보기 위해서이다. 암문 바로 위 의상봉 방향으로는 높은 둔덕 같은 봉우리가 있다. 그 위에는 산성보루가 있던 터의 흔적이 완연하고 길안내판이 서 있다. 행궁지 1.1km, 의상봉 2.4km, 대남문 0.4km. 잠시 1785년(정조 9년)으로 돌아가 보자. 사명감 강한 신기(申耆)가 북한산성 안찰어사 발령을 받았는데 그 때 북한산성을 실사하고 정조께 올린 보고서(書啓)가 실록에 실려 있다. 중요한 내용이 있다. “가사봉과 문수봉 사이는 가사 암문(袈裟暗門)이요, 문수봉 오른쪽에 문수봉암문이 있는데, 지금은 대남문(大南門)이 되었으며... (袈裟、文殊之間, 爲袈裟暗門, 文殊之右, 有文殊暗門, 而今爲大南門...)”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 봉우리 이름이 가사봉이며 청수동암문으로 부르고 있는 암문은 가사암문(袈裟暗門)이라 하였다.

이 능선길을 따라 남장대로 향한다. 의상봉능선과 백운대를 비롯한 삼각산의 모습이 선연하다. 잠시 후 능선길 중간에서 남장대터를 만난다. 남장대는 북한산의 동장대, 북장대와 함께 세 장대 중 하나였으며 어영청 관할구역이었다. 흔적은 흙 속에 초석 몇 개뿐 세월 속에 사라져 버렸다. 계속 능선길을 따라 800여m 내려가면 능선이 끝나는 평탄지에 행궁(行宮)터가 있다. 초석과 장대석 깨진 기와편 말고는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우리에게 장희빈과 인현왕후, 숙빈 최씨를 통해 알려진 숙종은 여자들도 사랑했지만 정치적 역량도 만만치 않았던 임금이었다. 37년간 논의만 거듭하는 신하들의 반대를 끊고 북한산성 축성의 결단을 내린 것도 숙종 자신이었다. 그 때 숙종의 결단의 말이 내게는 참으로 신선하다. 북한산 동장대, 북장대, 그리고 남장대 사람의 소견이라는 것이 사람 얼굴이 다 다른 것과 같아서(人之所見如人面之不同) 의견이 같아지기를 기다리면 날샌다고 하면서 공사를 밀어 붙였다. 그 때 행궁도 같이 지었다. 임진년, 병자년에 선조와 인조는 몽진을 했지만 숙종은 이 곳에 와서 서울 도성과 연결된 방어선을 치고 적과 대치하겠다는 방어전략을 짰던 것이다. 행궁지에서 내려 가면 경리청상창터이다. 넓은 터 석축에 돌수구(水口)가 눈길을 끈다. 산성의 큰 창고인 동시에 관성소(管城所)가 있던 곳이다. 이 곳 갈림길에서 보국문 방향으로 길을 잡는다. 보국문 이르는 중간쯤 되는 곳에 좌우로 평탄지가 있다. 보국사(輔國寺)터이다. 북한산성 축성시에 창건한 절인데 북한지에는 불승 탁심(琢心)과 명희(明熙)가 177간으로 창건하였다 한다. 기와편과 흩어진 초석밖에는 흔적이 없는데 절 뒤 비탈길에 흙에 묻힌 조그마한 부도가 눈에 띈다. 어느 운수납자의 흔적일까. 잠시 보국문으로 올라 7부능선 샛길로 대성암(서쪽)쪽으로 향한다. 사람 발길 없는 무너진 옛돌길을 올라 보광사터에 이른다.(찾기 어려우면 거꾸로 대성암 앞쪽 산등성이 샛길로 오를 것) 불승 설휘(雪輝)가 창건한 71간의 자그마한 절이었다.

보국문 중간 평판한 곳, 보국사 터 대남문에서 대서문으로 통하는 산성내 큰길로 내려오면 근래에 새로 자리잡은 절 대성암이 있다. 어영청 옛터에 자리잡은 것이다. 그 때의 듬직한 초석들이 남아 있다. 여기에서 큰길을 따라 잠시 내려온다. 길가에 금위영터 였음을 알리는 안내판이 서 있다. 그 안쪽으로는 보국문 앞에 있었던 금위영을 이 곳 아래로 옮겼다는 이건비가 이끼를 잔뜩 쓰고 서 있다. 오늘의 절터길은 여기에서 마감이다. 늦가을 대서문 방향으로 간다. 그 곳에는 새로 형성된 산성마을의 따뜻한 먹거리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 이한성 동국대 교수 교통편 3호선 경복궁역 3번출구 7212/0212 환승 3호선 불광역 2번 출구 7111/7022/7211 환승 구기동 하차 걷기 코스 구기파출소~ 구기매표소~ 문수사(터)~ 대남문~ 청수동암문 ~ 나암사~ 가사봉~ 남장대~ 행궁터~ 상창터~ 보국사터~ 보광사터~ 대성암(어영청터)~ 금위영터~ 대서문 ※‘이야기가 있는 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월 마지막 토요일에 함께 모여 서울 근교의 옛절터 탐방을 합니다. 3, 4시간 정도 등산과 걷기를 하며 선인들의 숨겨진 발자취와 미의식을 찾아가니, 참가할 분은 comtou@hanmail.net(조운조 총무)로 메일 보내 주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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