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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성의 옛절터 가는 길 - 24] 민회빈(愍懷嬪)을 그리며 (노온사터, 영회원, 구름산)

“살았다면 조선제일의 국모, 위대한 사업가이자 외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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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309호 박현준⁄ 2013.01.14 14:47:55

살면서 문득 만나고 싶은 이들이 있다. 삶의 어느 길목에서 우연히 마주쳤던 사람일 수도 있고, 책을 읽다가 만난 책 속의 사람일 수도 있고, 역사의 한 페이지에서 만난 이일 수도 있다. 이렇게 만나고 싶은 이들 중에 내 마음에 아픔의 회오리바람을 일으키는 이가 있다. 이 나라의 세자빈(世子嬪)으로 졸지에 남편을 잃고, 여섯 아이의 어머니로 30대 초반에 시아버지에 의해 죽임을 당한 이, 친정도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하고 어린 세 아들마저 귀양길에 올라 두 아들을 잃은 어미, 역사에 가정은 없으나 이런 일만 없었다면 조선(朝鮮) 제일의 국모(國母)가 되었을 가장 멋진 여인. 흰 눈이 세상을 덮은 다음날 소현세자(昭顯世子) 빈(嬪) 강씨(姜氏)의 묘소를 찾아 나선다. 눈이 쌓여 길이 미끄럽다. 영등포역 중앙차로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탄다. 광명 노온사동(老溫寺洞)으로 가는 버스다. 이곳에서 301번, 320번 좌석버스가 있고, 목동(6637번)이나 1호선 안양역(11번)에서는 일반버스가 있다. 버스에 올라 하차 정류장을 확인코자 노선도를 보니 낯선 지명들이 가득하다. 가락골, 사들, 동창골, 장전리, 원가학, 아방리, 원노온사, 벌말... ‘길라잡이 귀신’이 씌였는지 낯선 지명은 언제나 내게 신선한 느낌을 준다. 버스는 서쪽으로 옛 경인국도를 달리다가 남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사람 사는 훈김 가득한 광명사거리역을 지나 반농반도(半農半都) 지역인 원노온사 정류장에서 내린다. 이 지역이 노온사동(老溫寺洞)인데 예전 노온사가 자리잡고 있었던 데서 유래한 지명이다.

어느 자료에 이곳에서 1km 정도 앞에 자리잡고 있는 노온초등학교 뒤로 옛절터가 있었다 하기에 찾아가 보았으나 아쉽게도 이미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이런 곳이 어디 한두 곳이던가. 다시 원노온사 정류장으로 돌아온다. 도로표지판에 ‘원노온사 -->’ 표지가 분명하고 도로명도 ‘원노온사로’라고 씌여 있는 길로 접어든다. 길 어귀에는 ‘조선곰탕’집이 있다. 반가운 ‘천주교 노은사동 공소’ 편액 길 안 300m쯤 되는 곳에 다다르면 우측으로 마을길이 갈라지고 앞쪽 주택 넘어로 낮은 구릉에 ‘장원가든’ 간판을 단 집이 보인다. 우측 마을길로 들어서면 1950년대에 지었을 것 같은 농가를 만난다. 문화유산은 아니지만 급속히 사라져가고 있는 양기와를 얹은 조선시대 형태의 집, 보존되기 어려운 한 세대의 흔적이 사라져가는 모습이 보인다. 김건필씨 가옥이라고 한다. 이 가옥을 지나 사람 하나 지나칠 정도의 좁은 골목길로 들어서면 김건필씨 가옥 같은 형태의 집을 새로 손질해 어색하게 화장해 놓은 것 같은 집이 있는데 ‘천주교 노온사동 공소(광문성당)’이라고 편액을 달아 놓았다. 반갑구나. 아무도 알 수 없는 이 골목에 공소(公所)라니.

공소는 주임신부가 주재하지 못하는 지역에 교우들끼리 모여 미사를 보는 장소이며 신앙결속체라고 한다. 초창기 우리나라 천주교는 자생적이었기 때문에 200년 가까이 공소 시대였다고 하는데 의외의 장소에 공소가 자리한 것이다. 공소 뒷집은 정원가든이다. 이미 영업은 접은 지 오래인 것 같다. 골목길을 오른다. 구릉지가 나타나면서 눈이 하얗게 덮인 평탄지가 있다. 노온사터(老溫寺:노온사동 220-1)이다. 전하는 말로는 자그마한 절이었지만 마을과 구릉이 대부분 노온사 경내에 해당됐었다 한다. 어떤 이들은 이 절이 억울하게 죽어 고개 넘어 구름산 기슭에 묻힌 소현세자의 아내 강빈(姜嬪)의 원찰이 아니었겠느냐고 한다. 그랬었으면 좋겠다. 원통하고 외로운 넋을 위로해 줄 종소리라도 고개 넘어로 들렸었다면 빈(嬪)께서는 조금은 위로 받았을 것이다. 눈 쌓인 길을 쓸면서 오는 이가 있다. 이 절터만큼 오래되고 힘없어 보이는 노인이시다. 우선은 빗자루를 넘겨받아 오르는 길만큼은 눈을 쓴다. 절터야 쓸어 무엇하리. 절터에 대해 묻는다. 당신은 절터 아랫집에 40여년째 살고 계시단다. 절터라는 말은 오래전에 들었는데 아는 것은 없다 하신다. 그 때는 기와 조각과 그릇조각이 많았는데 이제는 눈에 잘 띄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면서 오래전에 잘려 나간 큰 나무등걸이 있다고 눈을 걷으며 찾아 주신다. 건너다 보이는 앞동네 느티나무와 향나무를 가르치며 그것들과 짝을 이루었을 큰 나무라 한다. 그나마 이 터도 곧 개발이 된다 하니 끝날 것이라고 섭섭해 하신다. 그렇구나 노온사동이라는 지명만 남기고 사라진 절, 이제 그 절터마저 사라져가겠구나.

절터를 떠나 골목길을 되내려온다. 마을길 지나 강빈이 잠든 곳, 영회원(永懷圓)을 찾아 나선다. 눈 덮인 길은 깨끗하고 아름답다. 논에 올망졸망 물이 고여 있는데 파란 미나리가 그 속에 수줍게 숨어 숨쉬고 있다. 길은 아무도 없어 산 깊은 곳으로 가는 듯하다. 2km쯤 갔을까 앞으로는 높이 옹벽을 친 노온정수장이 보인다. 길은 자연스럽게 우측으로 돌아 고개 넘어로 이어진다. 야트막한 고개 위에 서면 바로 앞이 ‘애기능농장’이다. 애기능이라 불린 강빈의 묘 앞쪽으로는 한치고개에서 넘어오는 지방도가 있고 다행히 도로 밑으로 통과하는 반가운 굴다리가 있다. 요즈음은 국도는 물론 한적한 지방도에도 중앙분리대가 설치되어 있어 운 사나운 날은 건널목을 찾아 먼 길을 돌아야 하는 일이 종종 있다. 굴다리 지나오니 애기능저수지이다. 플래카드를 붙여 놓았는데 ‘아방리 낚시터 개장’을 알리고 있다. 길옆으로는 ‘영회원 900m' 를 알리는 안내판이 서 있다. ‘애기능’이란 어떤 애기의 능(陵)을 말하는 것일까? 옛사람들은 큰 무덤을 능(陵)이라 불렀다. 그 중에서도 임금의 능보다 좀 작으나 큰 무덤이 애기능이다. 일례로 북아현동 굴레방다리 안쪽 마을은 지금도 능안(陵안)으로 불린다. 중앙여고(추계예대) 뒷산에 사도세자의 장남 의소세손(懿昭世孫)의 묘가 있었는데 이 묘를 애기능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고양시 신원동에는 월산대군의 묘가 있는데 이 곳 마을이름도 능골이다.

이곳의 애기능은 강빈(姜嬪)의 묘소를 그렇게 부른 것이었다. 처음 죽음을 맞았을 때에는 아무도 돌보는 이 없는 보잘것없는 묘였으나 숙종(肅宗) 이후 신원(伸寃)되었기에 제대로 된 묘를 쓸 수 있었으니 이곳 아방리(鵝房里) 민초들에게는 능으로 보였을 것이다. 동네도 능골이라 불리우고 묘도 애기능(阿王陵)이라 했던 것이다. 영회원 가는 길은 달리 갈래길이 없다. 300여m 나아가면 왼쪽 언덕 위로 누군가의 신도비가 보인다. “大匡輔國 崇錄大夫 議政府 右議政 兼 領經筵事 監春秋館事 世子傅 諡 文貞 月塘 姜先生 神道碑銘(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우의정 겸 영경연사 감춘추관사 세자부 시 문정 월당 강선생 신도비명)”. 소현세자의 장인이며 강빈의 아버지 문정공(文貞公) 강석기(姜碩期)의 졸기(卒記)와 금천강씨(衿川姜氏) 세장기(世葬記(藏紀))를 기록한 신도비(神道碑)이다. 이곳 아방리는 고려 강감찬 장군을 중시조로 하는 금천(현 시흥) 강씨의 최대 집성촌이었다. 강빈의 아버지 문정공 강석기는 1643년(인조 21년) 사망하여 이곳 선영에 묻혔다. 비문을 지은 이는 신익성(申翊聖)으로 인조 때 사람이며, 글씨를 쓴 사람은 민병승(閔丙承)으로 고종 때 태어나 일제강점기를 보낸 이이다. 전서(篆書)를 쓴 김용진(金容鎭)도 일제강점기에 작품활동을 한 이이니 무슨 까닭으로 300년이란 시간을 격(隔)한 이들이 한 비석에 등장하는 것일까? 여기에는 가슴 아픈 사연이 있다. 아버지가 죽자 맏아들 문성(文星) 등이 오위도총부 도총관 신익성(申翊聖)에게 아버지의 비문을 요청하였다. 이렇게 해서 쓰여진 것이 이 비문인데 미처 비(碑)를 만들기도 전에 소현세자가 죽고 그 따님 강빈이 시아버지에게 죽임을 당하는 참혹한 일이 벌어졌으며 강씨 일족이 멸문지화를 당하니 비는 물론 그 묘도 돌보는 이 없는 폐묘가 되어 버렸다. 그러다가 10세손의 주도로 1940년 무렵 이 비를 세웠다. 참으로 먼 길을 돌아왔다.

신도비에서 영회원 가는 길로 100여m 나아가면 ‘영회원 500m’ 안내판이 보이고 그 옆으로 구름산 방향 갈래길이 있다. 안쪽 100여m 되는 곳에 금천강씨 세장지(世葬地: 선영)가 있다. 모두 46기의 묘라 하는데 구름산 품에 안겨 편안하다. 아방리(鵝房里), 아마도 거위의 품처럼 따듯해서 그렇게 이름붙였을 것이다. 요즈음 이 지역 이름을 기록한 한자를 보면 阿方里라 쓰고 있는데 신도비에는 분명 鵝房里로 기록되어 있으니 오류가 있었던 듯하다. 구름산을 일명 아왕봉(阿王峰 또는 阿王山)이라 하는데 이는 애기능을 한자화한 이름 (阿 王陵: 작은 왕릉)의 뒷산이라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된다. 요즈음 쓰는 지명 阿方里는 아마도 阿王山이 빌미를 제공한 것 같다. 빈(嬪)의 부친 문정공의 묘를 둘러 보고 돌아 나온다. 묘표(墓表)에는 이렇게 씌여 있다. “議政府 右議政 衿川姜公 / 月塘 諡 文貞 諱 碩期之墓 의정부 우의정 금천강공 / 월당 시 문정 휘 석기지묘” 호는 월당이고 사망 후 나라에서 내려준 시호는 문정공이며 (죽은 이의)이름은 석기라는 말이다. 편안한 농장길 걸어 잠시 후 강빈의 묘소 영회원(永懷圓) 입구에 도착한다. 입구에 선 400년 된 느티나무는 그 날의 일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산 쪽으로 100여m 들어가면 낮은 언덕 위에 강빈이 잠들어 계신다. 불원천리(不遠千里) 먼 길을 찾아 왔건만 무심히도 철펜스를 쳐 놓아 참배도 드릴 수 없다. 향이라도 하나 지피고 술이라도 한 잔 따라드릴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강빈의 묘 영회원 입구에 400년 느티나무 1637년 병자호란으로 치욕의 항복을 겪은 후 국왕 인조를 대신해 소현세자 내외는 청나라 인질로 온 가족이 심양으로 떠난다. 모진 고초를 겪으면서 조선 세자 내외는 청나라와 신뢰관계를 구축하는 한편 농장을 일구고, 무역을 일으켜 막대한 부를 축적한다. 이 돈으로 거대한 농장을 일구어 청나라에 포로로 잡혀간 백성들을 속환(贖還: 노예에서 벗어나게 함)시키는 한편 외교자금으로 사용한다. 그때 세자빈 강씨의 활약은 참으로 컸다.

실록에 실린 기사를 잠깐 보자 “세자가 심양에 있을 때 집을 지어 단확(丹艧)을 발라서 단장하고, 또 포로로 잡혀간 조선 사람들을 모집하여 둔전을 경작해서 곡식을 쌓아 두고는 그것으로 진기한 물품과 무역을 하느라 관소의 문이 마치 시장 같았다 (世子在瀋陽時, 作室塗以丹雘, 又募東人之被俘者, 屯田積粟, 貿換異物, 館門如市)”는 것이다. 이 때 세자빈은 사대부가에서 자란 요조숙녀가 아니라 기품있고 유능한 사업가이자 외교관으로 빼어난 능력을 발휘하였다던 것이다. 이것이 문제였다. 심양에는 조정에서 파견한 관리들이 있었는데 국내로 보내는 보고서가 이른 바 ‘심양장계(瀋陽狀啓)’였다. 조선왕조실록 곳곳에는 이들 부부의 심양에서의 활동과 청인들로부터의 후의(厚誼)가 기록되어 있는데 어느새 청인(淸人)들은 소현세자를 소군(小君: 작은 임금)이라 칭하며 소현세자를 인정했다. 세자부부의 활동이 활발해질수록 인조의 노여움과 불안감은 커져 갔다. 세자내외는 자신의 아들과 며느리가 아니라 청나라를 뒤에 업은 강력한 정적으로 보였던 것이다. 9년의 인질 끝에 세자부부는 설레는 가슴을 안고 1645년(인조 23년) 2월 귀국했다. 그러나 기다리는 것은 인조의 냉대뿐이었다. 귀국 후 두 달 후 멀쩡하던 세자는 갑자기 병을 얻고 발병 한 지 사흘 만에 침 세 번 맞고 횡사했다. 실록에 기록된 세자의 주검은 ‘온 몸이 전부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이 흘러나왔다(擧體盡黑, 七竅皆出鮮血)’. 그뿐 아니었다. 세자의 묘(墓)는 응당 원(圓)이어야 하건만 소현묘(昭顯墓)로 230년을 지내야했다. 불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제는 인조의 칼날이 며느리 강빈을 겨누었다. 오빠 문성(文星)을 귀양 보내더니 새해로 접어들자 임금의 수라에 독을 탔다고 강빈 처소의 궁인에 대한 고문이 시작되었다. 그들은 고문으로 죽고 압슬(壓膝)로 죽어가면서도 끝내 상전을 지켜내었다.

그러나 무슨 보람이 있으리. 무수한 피를 보고도 끝내 어느 궁녀로부터도 자백을 받아내지 못한 인조는 비망기를 내려 강씨를 처단토록 한다. 뒤채에 가두어 일체 사람들과 접촉하지 못하게 하면서 구멍을 뚫어 음식을 그곳으로 넣어주는 참으로 이해 못할 일도 계속되었다. 1646년(인조 24년) 1월, 2월의 실록의 기록은 인조의 무리수와 신료들의 만류로 가득 채워진다. 2월 29일 드디어 두 오빠 문성, 문명은 곤장을 맞고 명을 다한다. 3월 2일에는 강빈의 재산이 몰수된다. 1646년(인조 24년) 3월 15일 드디어 강빈은 옛집으로 쫓겨 나가 목숨을 빼앗긴다.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강빈이 지니고 있던 패물도 몰수되고, 심지어는 철원 보개사에 시주했던 시주물까지 회수하여 압수한다. 그러함에도 인조에게는 켕기는 것이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며느리를 죽인 일에 대한 정당성이 확보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말은 못해도 온 나라가 강빈의 무고함을 믿고 있다는 것을 본인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또 한 번 일을 벌였다. 강빈의 친정집 식구들과 심양에서 세자 내외를 모셨던 사람들, 강빈을 모셨던 궁녀들을 고문하여 자백을 받는 일이었다. 1647년 4월 25일 강빈의 어머니를 비롯하여 또 14명이 처형당했고, 무수한 사람들이 고문에 죽었다. 강빈 친정은 멸문지화를 면치 못했다.

소현세자 내외에 닥친 멸문지화의 고난 이제는 그쳤으면 좋으련만 그렇지 않았다. 청나라 장수 용골대가 소현세자의 큰아들 석철을 자신이 데려다 키우겠다 한 일이 있었다. 만일에 석철이가 용골대의 보호 아래 청나라에서 장성한다면... 그들 외할머니마저 죽인 10여일 뒤, 인조는 드디어 자신의 손주 셋을 제주도로 귀양보낸다. 어미 없는 그들은 첫째 석철이 12세, 둘째 석린이 8세, 셋째 석견이 4세였다. 첫째 석철은 세달 뒤 제주에서 죽었다. 둘째 석린도 다음 해 제주에서 죽었다. 4살짜리 셋째는 살아남아 신산(辛酸)한 일생을 살았다. (세 아들 이야기는 졸고 옛절터 가는 길④ 참조) 강빈은 이곳 선산에 이름없이 묻혔다가 숙종 44년(1718년)에 신원되어 민회빈(愍懷嬪)이란 시호를 받았다. 묘소도 민회원이 되었다. 고종 때에 이르러 소현세자의 묘도 소경원(昭慶圓)이 되어 서오릉에 묻혀 있고, 민회원도 영회원(永懷圓)이 되었다. 석철과 석린의 묘는 서오릉 군부대 지역에 묻혀 있다 한다. 어느 분이 찍은 자료사진을 보니 너무나 쓸쓸히 두 형제가 비석 하나에 기대어 400년을 견뎌 온 것 같다. 이 가족을 서오릉에 함께 모셔드릴 수는 없는 것일까? 부부를 합장묘로 모셔드리고 두 아드님의 묘도 그 앞에 모시면 안 되는 것일까? 막내 석견(경안군)은 후손들과 함께 대자동에 잠들어 있으니 혼이라도 있으면 자주 다녀가면 될 것이다. 이제 뒷산 구름산에 오른다. 정상 아래에는 겨울에도 마르지 않는 천연약수가 있다. 정상에는 237m라고 기록한 작은 정상석이 있고 주민들을 위한 반듯한 정자도 세워 놓았다. 시야가 트여 관악산, 삼성산, 수리산, 소래산, 성주산, 계양산, 북한산, 인왕산, 남산... 모든 산이 보인다. 구름산은 비록 다른 지역 산에 비해서는 고도는 낮지만 광명의 주산(主山)이다. 그래서 아방리쪽에는 구름산산신제가 있고, 소하동쪽에서는 구름산도당굿이 열린다고 한다. 북쪽도덕산(183m)부터 구름산(237m)~가학산(220m)~서독산(180m)으로 이어지는 종주길은 10km가 넘는 멋진 산길이다. 이제 구름산 긴 능선길을 따라 보건소 방향으로 길을 잡는다. 눈길 포근한 능선이 찬 바람 일던 내 마음을 갈아앉힌다. 빈이시여, 편히 잠드소서. - 이한성 동국대 교수 교통편 1. 여의도, 영등포, 신도림역 좌석버스 301, 320번~ 원노온사 하차 2. 목동, 신도림, 구일역 시내버스 6637번~ 원노온사 하차 3. 안양역 시내버스 11번~ 원노온사 하차 걷기 코스 원노온사 정류장 ~ 노온사터 ~ 애기능농원 ~ 애기능저수지 ~ 문정공신도비/묘소 ~ 영회원 ~ 구름산 ~ 광명보건소 ※‘이야기가 있는 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월 마지막 토요일에 함께 모여 서울 근교의 옛절터 탐방을 합니다. 3, 4시간 정도 등산과 걷기를 하며 선인들의 숨겨진 발자취와 미의식을 찾아가니, 참가할 분은 comtou@hanmail.net(조운조 총무)로 메일 보내 주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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