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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구의 한국 재벌사]금호그룹 편 4화

대형 M&A 주도…금융위기로 우여곡절 겪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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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314호 박현준⁄ 2013.02.18 14:13:15

산이 높으면 그만큼 골도 깊은 법. 계기는 1997년 말에 도래한 외환위기였다.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로의 전환은 재계의 판도변화에 엄청난 동인(動因)으로 작용했다. 당시 대우그룹을 비롯한 다수의 재벌이 좌초되면서 이 과정에서 대형 M&A시장이 형성된 것이다. 대우건설-대한통운 인수…그룹 성장세 발목 잡아 2006년 말에 금호산업, 금호석유화학, 금호타이어, 아시아나항공 등이 대우건설 주식 2억4466여만 주(72.1%)를 6조4255억 원에 공동으로 인수했다. 대우건설은 1973년 11월에 설립되어 1981년 무역부문과 통합, (주)대우 건설부문이 되었다가 1999년 8월 대우그룹 부도로 인해 워크아웃 대상기업으로 지정됐다. 이후에 막대한 공적자금을 투입하고 재무구조를 개선해서 2000년 12월 27일 (주)대우의 무역부문과 건설부문을 분할, (주)대우건설로 새롭게 출범했으며 2003년 12월 워크아웃에서 벗어났던 것이다. 그러나 금호그룹의 대우건설 인수가 화근의 단초가 됐다. 당시 금호는 인수대금 부족분을 충당키 위해 2009년까지 연이율 9%를 보장하는 조건으로 미래에셋, 신한은행 등 재무적 투자자들로부터 주당 2만6200원에 3조5000억 원(1억4000만여 주)의 자금을 조달했다. 2009년 말까지 대우건설 주가가 3만1500원에 못 미치면 차액을 보전해 주기로 한 풋옵션계약이었는데 2008년 하반기에 도래한 글로벌 금융위기가 결정적이었던 것이다. 2009년 6월 대우건설 주가가 1만1000원대로 추락하면서 금호는 재무적 투자자들에게 약 4조 원의 차액을 보전해야 할 처지가 됐다. 금호와 주채권은행인 산업은행은 2009년 6월 1일에 같은 해 7월말까지 제3의 재무적 투자자를 유치하지 못하면 대우건설을 매각하기로 재무개선약정을 체결했다. 이후 금호는 대우건설 매각설에 대해 부인으로 일관해오다 6월 29일에 공표함으로써 매각 건은 사실로 확인됐다. 2010년 12월 13일 산업은행은 자체 설립한 사모투자펀드(PEF)를 통해 대우건설 주식 총 1만2102만여 주, 37.16%를 2조1785억 원에 인수하면서 대우건설은 금호그룹으로부터 분리됐다. 주당 가격은 당초 금호그룹이 대우건설을 인수할 당시 미래에셋 등에게 풋백옵션으로 약속했던 1만8000원이었다. 그러나 항간에서는 산업은행이 대우건설을 너무 비싼 가격에 구입했다는 비판이 야기되기도 했다. 국내 최대의 현대건설 매각가격이 5조 원도 많다는 지적인데다 당시 대우건설의 주가가 1만2000원 근처에서 형성되었던 때문이었다.

대항통운 매각도 같은 맥락에서 이뤄졌다. 국내 최대의 물류기업인 대한통운은 일제하인 1930년 11월 15일 조선미곡창고로 설립된 뒤 1950년에는 국영(國營)의 한국미곡창고로 변경됐다. 1956년 주식을 상장했으며, 1962년 한국운수를 합병하고 1963년 2월에 대한통운으로 변경했다가 1968년에 동아건설그룹에 인수되어 완전 민영화됐다. 대한통운은 1977년에 사우디아라비아 담맘항(港) 항만운송사업과 카타르 운송사업 및 관련 사업에 진출했고, 1983년에는 국내 해외건설 역사상 최대 규모로 평가되던 리비아 대수로공사(Great Man-made River) 1단계, 1992년에 2단계 건설사업에 참여했다. 그러나 1997년 외환위기 여파로 모기업인 동아건설이 유동성 위기에 직면하자 2000년 11월 대한통운은 연대보증을 서준 동아건설과 함께 법정관리로 전환했다. 금호는 2008년 3월에 4조1040억 원에 법정관리중인 대한통운을 자회사들과 함께 인수했다. 이로써 금호는 항공물류에 이어 육상물류까지 완비함으로써 한진그룹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로 부상했다. 그러나 대한통운 인수는 금호의 자금난을 더욱 압박하는 요인이 됐다. 대우건설 인수로 재무상태가 극히 악화된 상태에서 또다시 무리수를 두었던 것이다.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는 설상가상이었다.

대한통운 재매각은 불가피한 선택이어서 2011년 6월에 CJ제일제당과 CJ GLS를 주축으로 한 컨소시엄에 1조6600억 원에 넘겼다. CJ제일제당은 차입을 통해 5000억 원을 조달하고 CJ GLS는 5500억 원 규모의 자금을 유상증자를 통해 확보해 주당 가격 19만3500원에 대한통운 지분 37.6%을 확보했던 것이다. 인수전은 CJ와 포스코의 2파전으로 진행됐으나 막판에 삼성SDS가 뛰어들면서 경쟁이 치열해 세간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덕분에 금호의 금융사업 부문도 된서리를 맞았다. 첫 번째 신호는 광주, 전남지역 금융의 중심 고리역을 담당했던 광주은행이 2000년 12월 17일 완전 감자된 뒤 공적자금 지원을 받아 우리금융지주회사로 편입됐던 것이다. 최대주주였던 금호와 2대주주였던 교보생명그룹은 물론 4만7000여 명의 소액주주들도 큰 피해를 입었다. 글로벌 금융위기 때 금융사업 부문 된서리 금호생명보험은 대우건설, 대한통운 등 빅 M&A와 관련해서 2009년 산은금융그룹에 인수되어 2010년 6월에 KDB생명이 됐다. 금호생명은 1988년 4월 호남생명보험으로 설립된 뒤 1993년 1월 아주생명보험으로 간판을 바꿔달았다. 1996년 8월 금호에 인수되어 금호생명보험으로 변경되어 2000년 4월에 좌초한 동아그룹 계열의 동아생명보험(주)을 인수해서 덩치를 키웠다. 동아생명은 1973년 5월에 동해생명보험으로 설립되어 1983년 12월 동아그룹에 편입되면서 변경된 상호다. 아시아나항공과 금호산업 등이 지분 69.84%를 소유한 금호생명은 2007년 말 총자산 6조7000억 원에 당기순이익 851억 원을 시현한 국내 7,8위의 중형 생명보험사로 성장했다. 전도가 양양했던 금호생명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운 계기는 2009년 6월 대우건설을 인수하면서 제시한 풋백옵션으로 인한 유동성 위기였다. 같은 해 7월말까지 대우건설 풋백옵션 문제를 해결하기로 하고 주채권은행인 산업은행과 조건부 재무구조개선 약정을 맺은 금호는 약정 이행을 위해 금호생명 매각에 속도를 냈다. 초기에는 세계 유수의 보험사들이 관심을 보였으나 2008년 하반기에 금융위기가 불거지면서 매각작업이 지지부진해 금호생명의 몸값은 당초 1조 원 대에서 크게 하락했다. 2008년에 2000억 원 상당의 적자까지 겹쳐 장외 시장에서 3만 원을 호가하던 주가는 6000∼7000원대로 주저앉았던 것이다. 산업은행은 2009년 12월 주당 5000원씩, 총 4800억 원에 금호생명 경영권을 인수해서 KDB생명보험으로 간판을 바꿔달았던 것이다. 감사원은 2010년 9~10월에 진행한 감사에서 산업은행이 부실기업인 금호생명의 경영권을 고가에 인수해 최대 2589억 원의 손실이 염려된다고 지적함으로써 대우건설에 이어 또다시 고가매각 시비가 불거지기도 했다.

금호종합금융도 금호 계열로부터 이탈했다. 광주광역시 동구 금남로에 본점을 두고 예금, 할인어음, 단기금융, 팩토링 등을 영위하는 금호종합금융의 전신은 1974년 6월에 설립된 광주투자금융으로 1995년 5월에 간판을 바꾼 것이다. 2001년 4월 금호캐피탈을 흡수합병, 몸집을 키운 결과 2002년 5월에는 단기금융 수신액이 2조 원을 돌파했다. 1995년대 중반 40여개에 이르던 종금사들이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대부분 사라졌으나 금호금융만은 용케 살아남았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 우리사모투자전문회사(우리PEF)가 최대주주(지분율41.4%)로 부상, 2007년 9월에 금호아시아나그룹으로부터 계열 분리됐던 것이다. 이로써 금호아시아나그룹 소속의 공식 금융계열사는 단 한 곳도 없다. 메가톤급 금융위기에다 무리한 M&A의 결과로 해석된다. 무리한 M&A 실패 여파로 형제간 갈등 증폭도 그 와중에서 형제의 난 재연조짐도 간취됐다. 금호는 창업자 박인천 사후 아들 성용, 정구, 삼구, 찬구 등 4형제가 사이좋게 공동경영 했다. 그룹 총수도 형제간에 순서대로 돌아가면서 맡아 세간의 칭송이 자자했었다. 그러나 2009년 7월 박삼구 금호아시아나 회장과 박찬구 금호석유화학 회장간의 불편한 관계가 약간씩 노출되더니 2011년 6월 박찬구 회장측이 미공개 내부정보를 이용해 계열사 주식을 거래한 의혹이 불거지면서 형제간 갈등에 세간의 이목이 집중됐다.

2009년 6월 박찬구 부자가 대우건설의 재매각 사실을 사전에 간취하고 금호산업 주식을 대거 매각처분했다는 혐의였다. 박삼구 회장과 고(故) 박정구 전 회장 측도 금호산업 주식을 대거 처분했다는 소문도 함께 불거졌다. 금호아시아나그룹의 지주회사인 금호산업은 당시 대우건설 지분을 가장 많이 보유했던 탓에 대우건설 매각 시 주가폭락 등으로 위기를 맞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박찬구 회장의 아들 박준경 상무보는 2009년 6월 17일부터 22일까지 4일에 걸쳐 금호산업 주식 155만7690주를 매각했다. 주당 1만7800~1만9000원에 팔아 전체 매도액은 286억8000여만 원에 달했다. 박찬구도 6월 22~24일 사흘 동안 보유주식 106만2454주를 모두 매각했다. 박삼구의 장남 박세창 금호타이어 전무는 대우건설 매각 발표 직후인 7월 2~6일에 112만6000여 주를 팔고 금호석유 주식을 44만6000여 주를 샀다. 박성용 전 회장의 장남 박철완 금호석유 상무보도 같은 기간 금호산업 82만6000여 주를 팔고 금호석유 44만6000여 주를 매입했다. 금호가 대우건설 매각을 발표한 2009년 6월 29일 이후 금호산업 주가는 하한가 행진을 지속한 나머지 그해 연말에는 1만 원 밑으로 떨어졌다. 금호아시아나그룹의 오너 경영인들은 대규모 손실을 피한 셈이다. 이에 대해 증권업계 관계자는 “회사의 위기 상황에서 여타 주주들을 보호할 생각을 하지 않고 자신들의 이익만 고려, 서둘러 보유 주식을 대거 매각한 것은 대기업 오너 일가의 전형적인 도덕적 해이”라 쓴 소리를 해댄 바 있다. 금호아시아나그룹과 금호석유화학의 분리는 기정사실화됐다. 무리한 M&A가 형제간 갈등 증폭에 크게 이바지(?)한 것이다. - 이한구 수원대학교 경제금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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