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X그룹 모체인 (주)STX의 전신은 쌍용중공업으로 김성곤(金成坤, 1913~1975)이 창업한 쌍용그룹 주요 계열사 중의 하나였다. 김성곤은 몸무게가 90kg에 이르는 호걸 형으로, 경북 달성에서 태어나 대구고보를 거쳐 1937년에 보성전문(고려대학교)을 졸업했다. 그는 대구 상공은행에서 은행원 생활을 하면서 대구 칠성동에 있는 비누제조업체인 송전석감 공장을 인수, 1939년 3월에 삼공유지합자회사(三共油脂合資會社)를 설립했다. 송전비누공장은 종업원 수 9명 정도의 중소기업으로 일본인이 경영했으나, 원료확보에 애로가 커 매물로 나온 것을 김성곤이 동업자들과 함께 공동으로 인수한 것이다. 삼공유지는 태평양전쟁(1941~1945) 중에는 생활필수품 품귀현상으로 호황을 누렸으나 1949년에 매각했다. 해방 후 귀속기업 금성방직 헐값 인수로 쌍용그룹 태동 한편, 김성곤은 1945년 해방과 함께 건국준비위원회 경북지부 재정부장 및 미군정 대구지부 고문으로 활동하면서 1948년 10월 서울 소공동 116번지에서 자본금 1억 원(圓)의 대규모 금성방직(金星紡織)을 설립했다. 경기도 안양 소재의 귀속기업인 조선직물(朝鮮織物) 공장건물 일부를 임차 받아 영등포역과 안양역전에 방치된 일본 동경방직(東京紡織) 소유의 방적기 2000추를 설치하고 생산을 개시한 것이다. 방적기는 포장도 뜯지 않은 새 제품으로 태평양전쟁 종전 직전에 미군의 공습을 피하기 위해 동경방직이 황급히 국내에 옮겨놓았었다. 전쟁이 막바지로 접어들면서 미국 공군기들의 일본본토에 대한 공습이 점차 극심해졌는데, 군수업체를 비롯한 주요 산업시설들이 집중공격 대상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당시 주요 군수업체들은 주요 산업시설 및 생산품들을 서둘러 한국으로 이전하곤 했는데, 해방과 함께 미처 철수하지 못해 이 물자들은 주인 없는 처지로 전락했던 것이다. 김성곤이 이 물자들에 주목한 결과, 정부와 접촉해서 헐값에 불하받은 것이다. 그는 금성방직 설립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1949년에 삼공유지를 처분한 것으로 추정된다. 해방 직후 물자부족 탓에 인견사를 생산했던 금성방직은 호황을 누려 설립 2년 만인 1950년에 자본이 2억5000원(圓)으로 확대되는 등 대규모 방직회사로 성장하여 쌍용그룹의 모체가 됐다.
1952년 4월에는 동양통신을 설립했다. 야당 정치인이었던 정일형이 경영하던 대한통신을 김성곤이 인수해서 상호를 변경한 것이다. 김성곤은 그의 대구고보 선배이자, 이승만 대통령의 측근 언론인인 양우정(梁又正)을 동양통신 사장에 임명했다. 당시 국내에는 동양통신 외에 대한, 시사, 중앙, 국회, 상공, 국제통신 등이 있었으나, 동양통신은 세계적 뉴스 공급원인 UP통신의 국내대리점으로서 합동통신에 이어 2위로 부상했다. 김성곤은 사업경영에 언론을 적극 활용한 기업인이기도 했다. 1954년 7월에 자본금 2000만 환의 금성산업((주)쌍용)이란 무역회사를 설립하는 한편, 1956년 3월에는 삼흥방직(三興紡織)을 인수해 태평방직으로 상호를 바꾸고 UNKRA 원조자금을 끌어들여 생산시설을 확대해 대형 방직회사로 탈바꿈시켰다. 이후 쌍용그룹은 금성방직과 태평방직을 양축으로 하는 그룹기반을 형성했다. 1962년 5월에는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일환으로 쌍용양회공업을 설립했다. 당시 정부는 외자도입 대상으로 비료, 제철, 인조섬유, 자동차, 시멘트 등 17개 기간사업을 확정하고, 관련 기업들이 생산시설을 확충할 때 해외차관자금 알선 및 정부지불보증 혜택까지 제공했던 것이다.
쌍용은 국내의 대표적 석회석 지대인 강원도 영월일대의 석회석광산을 개발하기로 했다. 소요되는 자금은 외자 650만 달러와 내자 4억 원 등이었다. 외자는 연리 6%로 서독 재건은행으로부터 확보, 서독의 유명 시멘트 제조설비업체인 험볼트사로부터 설비일체를 도입해서 시멘트를 생산했다. 국내 시판은 물론 1966년에는 베트남 수출 등으로 급성장했는데 당시까지 국내적으로 시멘트수요에 비해 공급량이 여전히 부족한 때문이었다. 사업다각화 추진…시멘트공장에서 언론까지 손대 1967년 7월에는 서독 도리스(Dorries)사로부터 168만408달러의 차관을 도입해 오산시 청학동에 일산(日産) 70톤 규모의 크라프트지 생산공장을 건설하고 삼화제지(쌍용제지)를 설립했다. 골판지 등의 원료로 사용되는 미(未)표백의 다갈색 종이로 시멘트봉투 수요가 점증한 때문이었다. 1967년 12월에는 금성해운을 설립했다. 정부는 급속한 공업화에 따른 물동량을 커버할 목적으로 1967년 2월 28일 해운진흥법을 공포하는 등 해운업육성에 박차를 가했다. 쌍용양회 북평(동해)공장 확장에 소요되는 건설기자재 및 시멘트 수송이 직접적인 이유였다. 금성해운은 1968년 4월에 일본 마루베니(丸紅飯田)로부터 20만3000달러의 차관을 제공받아 1073DWT급 중고화물선을, 4월 13일에는 일본 교또(京都)기선으로부터 23만7000달러를 들여와 추가로 화물선을 확보했다.
그 와중인 1967년 10월에는 금성방직과 태평방직을 한꺼번에 대농그룹(박용학)에 매각했다. 이 무렵 금성방직은 자본금 8억 원에 방기 6만4704추, 직기 1650대를 갖추고 종업원만 1294명을 보유한 국내 최대의 방직회사로 성장했다. 태평방직도 대규모 업체로 성장했으나, 그룹의 사활을 걸고 시멘트공장을 건설 중이었기 때문에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던 것이다. 쌍용은 쌍용양회 완성을 계기로 다각화작업에 더욱 박차를 가해 1971년에는 서열 5위의 재벌로 부상했다. 창업자 김성곤 사망 직후인 1978년 현재 쌍용그룹은 쌍용양회, (주)쌍용, 한국·이란석유(S오일), 쌍용해운, 고려화재, 쌍용제지, 쌍용중기, 쌍용전기, 쌍용종합건설, (주)승리기계, 쌍용제사, 승리전자, 동양통신, 대구문화방송, 쌍용엔지니어링, 쌍용해운, 유국개발, 쌍용스카트제지, 국민대학, 현풍중고, 성곡언론재단, 성곡학술재단 등을 거느리는 대규모 복합기업집단으로 거듭났다. 쌍용그룹이 정상의 재벌로 성장하는 동안, 창업주 김성곤은 사업가로서보다는 정치인, 언론인으로써 더 많이 활약했다. 1958년에 집권당인 자유당의 공천을 받아 4대 민의원에 당선되었을 뿐만 아니라, 1960~1970년대에는 집권당인 공화당 국회의원과 재정위원장을 맡는 등 오랜 기간 동안 여권의 실세 정치인으로 활약했던 것이다. 우리나라 재벌 창업자들 대부분이 오로지 사업에만 전념했으나, 김성곤은 사업과 정치를 병행하면서 재벌화를 도모한 특이한 기업가였다. 2000년대 들어 재계 전면에 급부상한 대표적 재벌은 STX그룹인데, 강덕수(姜德壽)가 2001년에 인수한 쌍용중공업을 모체로 해서 대규모 기업집단으로 발전시켰던 것이다.
쌍용그룹은 1976년 10월에 경남 창원기계공단 내의 진일공업(進一工業)을 인수해서 같은 해 12월 24일자로 쌍용중기로 상호를 변경했다. 진일공업은 일제 치하인 1936년에 설립되어 농기계를 생산해오던 업체로 소형 디젤엔진 생산도 병행했는데, 정부의 중화학공업화 육성정책에 편승하기 위해 1975년부터 중형 디젤엔진(2000hp 이하) 공장건설에 착수했다. 그러나 자금난에 허덕이다가 쌍용그룹에 인수되었던 것이다. STX그룹, 2001년 인수한 쌍용중공업이 모체 이후 쌍용중기는 최대 출력기종을 1만hp급으로 확대하기로 하고, 1978년에 창원공단 A-1블럭에 엔진생산 50만hp/년, 엔진정비 100만hp/년, 주조공장 1만5000톤/년의 국제 규모의 대단위 공장을 마련했다. 자금으로는 내·외자 250억 원이 소요됐다. 그러나 쌍용중기는 시작부터 고전을 면치 못했다. 정부가 1973년에 중화학공업화를 선언하며 철강, 비철금속, 중기계, 조선, 전자, 석유화학 등 6대 산업을 중점육성 대상으로 선정하고, 대대적인 지원정책을 강구하면서 재벌들이 경쟁적으로 뛰어든 것이 화근이 됐다. 중화학 육성정책에 편승할 경우 그 자체만으로도 재벌들의 순위 변동을 초래할 만큼 엄청난 기회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과는 과잉투자를 초래, 중화학 분야 부실이 자칫 한국경제를 나락으로 빠뜨릴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정부는 1980년 10월에 중화학 분야의 과잉투자 해소차원에서 업종 전문화를 유도했다. 아울러 당시까지 전량 수입에 의존하던 디젤엔진의 조기(早期) 국산화를 위해 선박용은 1980년부터, 육상 산업용은 1982년부터 각각 수입을 규제하고 1980년부터 계획조선사업에 의거해서 일반선박 건조 시에는 국산 디젤엔진 사용을 강화했다. 쌍용중기는 1979년 12월 엔진공장을 준공하고 1980년 11월에 쌍용중공업으로 상호를 변경했다. 대우중공업으로부터 선박용 및 산업용 디젤엔진사업을 인수해서 새로 선박용 엔진제작 착수 내지는, 방산사업을 본격화하는 등 사업영역을 크게 확대한 것이다. 그 결과 쌍용중공업은 설립 이래 만성적자에서 점차 벗어나면서 1987년에는 매출액 1129억 원에 당기순이익 78억 원의 흑자기업으로 전환하는데 성공했다. 1988년 11월 방산전용공장을 준공했으며, 1990년 9월에 기업공개를 통해 증권시장에 상장했다. - 이한구 수원대학교 경제금융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