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5호 박현준⁄ 2013.12.02 13:38:43
“인사는 담당자의 엄밀한 선정 후에 과인이 다시 살펴서 제수하는 것이 옳다. 스스로 국가의 일을 자기의 임무로 여겼다.” 허조의 졸기의 마지막 부분에 실린 글이다. 허조는 조선 초기의 예학을 완성시킨 학자다. 능력이 뛰어난데다 청렴하고 결백하기까지 한 그를 태종은 특히 좋아해 “나의 기둥과 같다”고 표현했다. 그는 옳은 일에 대해서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그래서 세종은 ‘고집불통’이라고 불쾌함도 드러냈지만 줄곧 중용했다. 그가 주인의식을 갖고 업무를 처리했기 때문이다. 졸기에는 그의 강직함이 설명돼 있다. ‘낮이나 밤이나 직무에 충실했다. 만일 말할 것이 있으면 지위 밖으로 나오는 것을 혐의하지 아니하고 다 진술했다. 숨기는 바가 없었다.’ 태종이 세자이던 양녕대군에게 주위에서 존경할 사람이 누구인가를 물었다. 세자는 허조라고 답했다. 허조가 두 번째로 세자시강원의 교육 담당으로 임명됐다. 세자가 이 소식을 듣고 “허 문학이 다시 오는가”라며 부담스러워했다. 그의 엄격함을 꺼렸기 때문이다. 허조는 나랏일을 자신의 일로 생각하고 혼신의 힘을 다했다. 이 같은 모습을 그의 묘지명에서도 볼 수 있다. 태종이 승하 후 장례를 신하들은 상복을 벗고 연미색의 담복으로 갈아입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임금과 신하는 한 몸이다. 효성이 두터운 성상께서는 최질(상복)로 3년을 지나시라 한다. 신하만이 장례를 치르고 나서 곧바로 길복(吉服)으로 갈아입을 수는 없다”고 반대했다. 그의 주장에 따라 신하들은 집무 때에는 담복을 입고 배제 때에는 상복을 입었다. 마침 중국 사신이 최복을 입은 백관의 배제 모습을 보고 바른 예법에 탄복하였다. 예조참판 시절에는 봉상시 제조를 겸임했다. 이때 봉상시의 일을 성심을 다해 기획, 잘못된 것은 바로잡고 폐지된 것은 부활했다. 크고 작은 일들이 이루어져서 모두 의식에 잘 맞았다. 그는 과거시험 독권관 등 여러 차례 인사 전형을 맡았다. 심사가 공명해 한 명의 관원을 쓰더라도 반드시 보좌관들과 자세히 품평한 다음에 임명했다. 그래서 청탁이 자취를 감추었다. 또 효자 충현의 후손을 우선으로 기용했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 “무슨 효자 순손이 이렇게 많다는 말인가?”라고 하자, 그는 “비록 가짜가 있더라도 풍속을 장려하기 위하여서는 어쩔 수 없지 않소”라며 답했다. 나라의 일을 주인의 입장에서 자신의 일로 생각하고 처리한 것이다. 세종은 인재를 얻었으면 의심하지 않고 맡겼다. 13년 11월5일 인사 회의가 있었다. 장령 이사임과 도승지 안승선이 관리 인선을 이조에 맡기지 말고 직접 할 것을 주청했다. 이사임은 태조도 몸소 관리를 골라 등용했다는 사례를 들었다.
이에 대해 세종은 관리를 몸소 골라서 쓰는 뜻은 좋지만 여건상 제대로 파악하는 게 쉽지 않음을 들어 손을 내저었다. 또 모든 업무를 담당자에게 처리하게 하고, 과인이 결재하는데 인사 문제만 예외로 할 수 없음도 들었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인사는 담당자의 엄밀한 선정 후에 과인이 다시 살펴서 제수하는 것이 옳다.” 명재상 황희도 혼신의 힘을 다했다. 황희는 박포의 아내와 간통사건과 뇌물 사건으로 탄핵을 받았으나 세종은 감쌌다. ‘황희 말대로 하라’며 힘을 실어줬다. 그의 일목요연한 논리성을 높이 평하고 일을 맡겼다. 그는 20여년에 걸쳐 재상으로 있으면서 세종이 치적을 이룰 수 있도록 했다. 이는 김종서, 박연, 장영실 등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세종시절에 문물이 흥성하고 여러 제도가 정비될 수 있었다. 회의를 통해 반대의견도 수용, 저절로 움직이게 해 세종의 신뢰가 신하들의 주인의식을 끌어낸 것이다. 세종은 인간이 완벽할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다소 부족한 부문은 어루만지고 장점을 크게 주었다. 도덕적 비난소지의 황희, 무인으로 재상 승진에 대해 망설였던 최윤덕, 작전 실패를 했던 김종서, 노비출신의 장영실 등의 약점에 눈감는 대신 능력을 보았다. 또 회의를 통해 반대의견도 수용하고 종합결론을 내려 저절로 움직이게 했다. 특히 적임자에게 전권을 위임하는 방식을 택해 적극 참여를 유도했다. 주인의식은 학습에 적용하면 자기주도학습이다. 스스로 알아서 공부하는 것이다. 이는 교사나 부모가 방향을 정하고 가게 하는 타율학습과 대비된다. 주인의식은 요즘 직장인에게도 큰 의미를 갖는다. 그룹규모의 공기업 대표는 취임 무렵에 전 직원에게 주인의식을 강조하는 메일을 보낸 적이 있다. 재벌 기업이 아니고 직원 모두가 회사의 주인임을 알려주었다. 이처럼 많은 회사에서 생산성 향상과 애사심을 증대를 위해 주인의식을 심어주고 있다. 기업 대표의 입장에서는 강조하고 싶은 게 사원의 주인의식이다. 그러나 주인의식을 심어주는 데는 전제조건이 있다. 사원주주제처럼 직원이 주식을 보유하게 하는 방법과 함께 긍지와 자부심을 가질 게 능력에 따른 권한을 주어야 한다. 한 회사의 대표는 해마다 신년사에서 주인의식을 주장했다. 사원들은 보너스를 적게 받는 등 허리띠를 졸라매고 사옥을 지었다. 대표도 배당금을 받지 않았다. 10년 후에 사옥이 건립됐다. 그런데 사옥은 대주주의 것이다. 사원들은 사옥에 대한 권리가 없다. 10년 허리띠를 졸라맨 결과 대표 등 대주주만 수백억 원의 건물을 얻게 되었다. 이는 주인의식을 빙자한 사기행위라고 할 수 있다. 세종대왕 시절의 흥성은 군주의 위대함도 있었지만 신료들의 능력이 뛰어난 결과다. 이는 군주가 신료들에게 주인의식을 심어준 결과다. 진짜 주인의식과 가짜 주인의식을 세종대왕을 통해 알 수 있다. 글쓴이 이상주 서울시민대학에서 ‘한국의 세계문화유산’을 강의하는 베스트셀러 작가다. 또 여러 단체에서 ‘조선 명문가 독서 이야기’, ‘부모와 아이가 함께 듣는 세종의 공부법’, ‘CEO책쓰기’, ‘내 삶의 스토리 글쓰기’, ‘합격 자기소개서 작성법’ 등을 강의하고 있다. 조선왕실(전주이씨 대동종약원) 문화위원으로 지은 책은 ‘세종의 공부’, ‘조선 명문가 독서교육법’, ‘10대가 아프다’ 등이 있다. www.이상주글쓰기연구소.kr - 이상주 역사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