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NB저널 = 김금영 기자) 연말을 앞두고 갤러리에 선물 꾸러미가 가득 펼쳐졌다. 지난해 11월 개관 전시를 열고 1주년을 맞이한 신사동의 갤러리오가 ‘그림그대로 - 아트 프린트’전을 마련했다. 박성림, 여강연, 이돈아, 이보형, 이익재, 신상철, 타타루가까지 작가 7명의 작품을 선보이는 자리다. 그런데 전시명이 눈길을 끈다. ‘그림그대로 - 아트 프린트’전은 말 그대로 작가들의 원화를 디지털 프린팅한 작품을 선보인다.
이 전시는 약 1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오재란 관장이 미술 분야의 여러 전문가들의 자문을 구하며 준비해 왔다. 전시의 대표 콘셉트를 ‘예술의 일상화, 대중화’에 두고 기획 과정을 거쳤다. 원화 작품을 소장하고는 싶지만 높은 가격에 발길을 돌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이 사람들의 발길을 돌리고자 오 관장이 주목한 것이 디지털 프린팅 작품이다.
“컬렉터 층은 매우 다양하죠. 고가의 원화를 구입하는 컬렉터가 있고, 중저가의 작품을 선호하는 컬렉터도 있어요. 그리고 거기엔 원화를 구입할 수 있는 여력은 안 되지만 작품에 대한 흥미로 작품을 소유하고픈, 컬렉터로서 첫 발걸음을 떼려는 사람들도 있죠. 각 갤러리마다 역할이 있어요. 대형 갤러리나 경매 시장은 고가의 원화를 선호하는 컬렉터를 위한 작품들을 선보이죠. 갤러리오는 첫 발걸음을 떼는 컬렉터에 집중하려 했어요. 저렴한 가격으로도 작가의 작품을 살 수 있도록 디지털 프린팅 작품을 제작했죠. ‘그림그대로’는 이를 나타내는 하나의 브랜드와도 같아요.”
그리고 각 디지털 프린팅 작품을 만들 때 그냥 원화 작품의 화면을 그대로 찍어내는 식으로 제작하지 않았다. 작가들과 상의해 디지털 프린팅할 화면을 재구성했다. 한 예로 여강연 작가의 원화 중 일부 부분에 집중해 전면에 드러내는 방식으로 만든 작품도 있다. 변한 구성에 어울리도록 색감도 일부 변화를 주고, 에디션 넘버도 부여했으며, 친필사인도 넣었다. 이른바 원화의 재해석이 이뤄진 디지털 프린팅이다. 이 작품들 또한 각각의 고유성을 갖고 태어났다고 볼 수 있다. 가격은 원화보다 훨씬 저렴해졌다. 소품용의 작은 크기의 작품부터 45호까지 다양한 크기의 디지털 프린팅 작품이 출품됐는데, 9만 원대의 작품도 있고, 전체적으로 평균 100만 원이 넘지 않는 수준이다.
“디지털 프린팅 작품이 과거엔 주목받지 못했지만, 수요가 늘어나면서 이에 주목하는 곳들도 점차 늘어나고 있어요. 이번 전시를 기획하면서 가나아트의 ‘프린트 베이커리’도 살펴봤죠. 좋은 사례들을 벤치마킹해 갤러리오도 더욱 대중에게 다가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디지털 프린팅으로 작품 사는 연습시키기
스페인에서 마주한 풍경이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계기다. 스페인에 여행 갔을 때 하이퍼마켓에서 1년에 한 번 열리는 컬렉션을 구경할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카트에 편안하게 작품을 담는 모습이 특별히 인상적이었다고.
“작품을 사는 것, 갤러리에 들어오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국내의 풍경과 달리, 스페인에서는 사람들이 작품을 친근하게 다루고 느끼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어요. 그래서 갤러리를 운영하는 입장에서 저는 어떤 것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이번 전시를 마련하게 된 거죠. 시기도 잘 맞은 것 같아요. 당시 스페인에서 크리스마스 시기 사람들이 작품을 선물로 구매하는 풍경이 참 좋았는데, ‘아트 프린트’전도 한해를 마감하는 연말을 맞아 선물과 같은 기획전으로 꾸렸어요.”
기획전을 마련하면서 또 오 관장이 신경 쓴 게 작품 판매의 순환 구조다. 오 관장은 이것을 “사람들에게 작품 사는 습관 들이기”라고 설명했다. 이른바 리세일(resale)이다. 이번 전시에서 100개 에디션이 모두 판매된 뒤 또 작품을 사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기존에 작품을 샀던 사람에게 재판매 의지가 있는지 물어본다. 재판매 될 경우 기존 팔렸던 가격에서 20% 상향된 가격으로 판매가 이뤄진다.
“계속해서 작품 판매가 순환하는 형태예요. 기존 작품을 되판 사람은 재판매해 생긴 돈으로 또 다른 작품을 구매할 수도 있겠죠. 작품을 소장할 수 있는 기회를 계속 제공하면서, 여기서 즐거움을 느낄 수 있게 하려는 목적이에요. 또한 완판된 작품의 가치를 높이고, 발생하는 수익은 작가 후원으로도 쓰일 수 있고요. 이번 전시에서 이 리세일 방식을 시도해 보려고 해요.”
그래서 일단 중요했던 게 작가들 선별이었다. 첫 발걸음을 잘 뗄 수 있도록 사람들의 눈길을 끌 수 있는 작품들이 필요했다. 여기에 미술 전문가들의 조언과 오 관장의 경험이 녹아 들어갔다. 오 관장은 미술을 전공하지 않았다. 그는 갤러리를 열기 전 공간 디자인 분야에서 활약해 왔다. 그런데 이 경험이 도움이 됐다.
“공간 디자인을 하면서, 사람들이 공간을 꾸밀 때 어떤 그림을 놓고 싶어 하는지 많은 이야기를 듣게 됐어요. 그림에 대해 전혀 모를 때는 이에 대해 고려하지 않고 아무 그림이나 넣으면 되지 않나 싶었는데, 어떤 그림을 놓느냐에 따라 공간의 분위기가 확 바뀌더군요. 제가 전시를 꾸릴 때는 이 점을 많이 봤어요. 공간 디자인을 해치지 않고 조화를 이루는지, 또 공간의 매력을 어떻게 끌어낼 수 있는지 중점으로 봤죠.”
부족한 부분은 미술 전문가들의 조언을 구했다. 이를 총체적으로 조합해 전시를 열었고, 이번 특별전은 갤러리오에서 그간 전시를 열었던 작가들 중 7명을 선발했다. 갤러리오는 앞으로도 함께 전시를 여는 작가들에게 특별전의 기회를 제공할 계획이다.
7명의 작가가 보내는 선물 꾸러미
이번엔 크게 세 가지 특성이 눈에 보인다. 자연의 계절감을 느낄 수 있는 여강연, 이돈아, 이익재, 박성림의 작품, 그리고 글자를 중심으로 한 이보형과 신상철의 작품, 마지막으로 귀여운 느낌이 특징인 타타루가의 작품이다.
여강연과 이돈아의 작품에서는 꽃이 눈에 띈다. 여강연은 화사한 부케, 그리고 이돈아는 옛 민화에 등장하는 꽃을 화면에 내세웠다. 두 작가의 작품은 화사한 봄을 연상케 한다. 여강연은 “현재 살고 있는 공간 속에 휴식을 떠날 수 있는 캠핑을 마련해주고 싶었다. 화면의 꽃은 힘든 현실의 고통을 잊게 해주는 매체다. 여기에 구석구석 선물 상자도 마련됐고, 행복해지고 싶은 사람들의 얼굴도 보인다. 이 모든 것들이 부케처럼 어우러져 행복을 전하는 의미를 담았다”고 말했다.
과거 비구상 작업을 주로 해온 이돈아는 변화를 겪었다. 그의 화면엔 여러 꽃과 육각형이 함께 등장한다. 여기서 육각형은 불완전한 작가 자신이자 현대인을 상징한다. 쓰러질 듯 불안하지만 그래도 견고하게 서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여기에 민화의 꽃이 아름답게 어우러진다. 이돈아는 “과거의 그림에 자연의 소재를 더했고, 여기에 기하학적 매치를 시도했다. 이 과정이 부자연스럽지 않게 공감을 이끌어내길 바랐다”며 “이 모든 요소들의 만남이 사람들에게 에너지를 주기를 바랐다”고 설명했다.
여강연과 이돈아의 작품이 봄을 떠오르게 한다면 이익재의 화면엔 청량한 여름이 가득한 느낌이다. 이번 전시에서 하와이에서 찍은 풍경을 선보인다. 그런데 ‘신혼 여행지 1위’로서의 하와이 이미지가 아니라, 사람들이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놓치는 풍경들에 주목한다. 이익재는 “사람들은 특정 장소에 대해 ‘여기는 이렇겠지’ 식으로 단정지어버리는 선입견이 있다. 하지만 이 선입견 때문에 지나쳐 버리는, 숨어 있는 멋진 풍경들이 많다. 나는 유명한 장소의 이런 풍경들에 집중하는 작업을 해오고 있다”고 말했다.
박성림의 그림엔 자연의 하늘이 등장한다. 까만 밤하늘에 수놓아진 별들이 여러 형태로 표현돼 눈길을 끈다. 박성림은 “자연은 우리 주위에 늘 있는 것 같지만 막상 인식하기 힘들다. 그 존재를 인식하는 과정을 담고 싶었다”며 “힘들 때 늘 밤하늘을 보곤 했는데, 하늘에 떠 있는 별과 달을 보며 많은 위로를 받았다. 그 자연의 느낌을 작업에 담아서, 작품을 보는 이 또한 치유 받기를 원했다”고 말했다.
다음으로는 이보형과 신상철의 작업이 눈길을 끈다. 두 작가의 작업 모두에 글자가 등장한다. 먼저 이보형의 작업은 멀리서 보면 그냥 여러 면이 겹친 것 같지만, 잘 들여다보면 글자가 있다는 걸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또 보이는 글자가 있고, 잘 눈에 보이지 않는 글자가 있다. 이를 통해 작가가 말하는 건 사람들의 심리가 구축하는 자신만의 세계다. 객관적인 세계 또한 각자의 주관적 가치관으로 재해석, 구성된다는 것.
'더 리코그니션(The Recognition)’ 작품의 경우 작품의 경우 색을 인지하는 과정에서 러브(Love) 글자는 명확하게 보인다. 그런데 화면이 움푹 패고, 또 볼록 솟아오른 투명한 부분에 숨어 있는 헤이트(Hate)는 어떤 사람들 눈에는 잘 보이기도, 보이지 않기도 한다. 이보형은 “작품 자체의 화면은 변하지 않지만, 어떤 시선으로 화면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보이고, 또 보이지 않는 글자가 있다. 이것은 어떤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세상을 바라보는지에 따라 차이도 보인다. 사람들의 심리와도 연결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글자가 숨어 있는 이보형의 화면과 달리 신상철의 화면엔 전면적으로 글자가 드러난다. 이 글자들이 마구 뒤섞인 가운데 ‘모나리자’ 등 유명 작품이 전면에 깔려 있기도 하다. 이것은 바로 기억을 재구성하는 과정이다. 신상철은 “사람들은 여러 방식으로 기억을 쌓는데, 텍스트도 기억을 쌓는 한 요소다. 휴대폰 문자 메시지, SNS의 글, 일기장 등 텍스트는 기억을 끄집어내는 매체다. 다만 이 텍스트는 쌓이면서 변형을 거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러브’라는 글자가 이전엔 사랑스러운 느낌이었다면, 어떤 계기로 이 글자에 새로운 느낌이 생길 수 있다”며 “텍스트를 통해 과거와 현재의 내가 계속 대화하면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기억을 쌓아가고 알아가는 과정에 주목하고 있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신상철의 작품과 마주하며 전시된 타타루가의 작품이 있다. 그의 화면엔 비글, 웰시코기, 푸들, 볼테리어 등 귀여운 강아지들이 등장한다. 이 강아지들은 화면을 보고 해맑은 표정을 지으며 작품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행복을 느끼게 한다. 오 관장은 "이번 전시를 통해 사람들이 예술을 친근하게 느끼고, 작품을 감상하며 즐거움과 행복을 느끼길 바란다"고 말했다.
한편 일곱 작가들이 산타가 돼 선물로 다양한 작품들을 선보이는 이번 전시는 갤러리오에서 12월 31일까지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