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부터 카페, 페어 등 다양한 키덜트(kidult, 아이를 뜻하는 kid와 성인을 뜻하는 adult의 합성어) 성지들을 찾아가 그곳의 특징을 짚어보는 ‘키덜트 성지순례’ 다섯 번째 장소는 ‘바비, 디 아이콘’전이다.
(CNB저널 = 김금영 기자) 어렸을 때 소녀들 사이에서 제대로 놀려면 꼭 필요한 인형이 있었다. 사람 모습의 구체 관절 인형에 직접 옷을 입히고 마치 내가 인형이 된 듯 말을 붙이며 놀았다. 대체적으로 바비, 미미, 쥬쥬의 3파전이 이어지면서 서로 자기 인형이 최고라며 경쟁이 붙곤 했다.
어릴 때 끝날 것만 같았던 이 가슴 두근두근한 놀이가 커서도 키덜트의 취향을 저격하고 있다. 일례로 배우 조니 뎁은 유명한 바비인형 덕후다. 그는 딸과 함께 놀아주기 위해 바비인형을 구입하기 시작했다가 정작 자신이 빠져서 인형 수집을 하게 됐다고 한다. 인형 놀이를 할 때 다양한 목소리를 내면서 배우 생활에서 캐릭터 연구에도 도움을 받았다는 비하인드 스토리도 유명하다. 조니 뎁의 유명한 바비인형 사랑에, 그가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에서 연기한 잭 스페로우 캐릭터가 ‘바비 컬렉터’ 시리즈로 제작되기도 했다. 이쯤 되면 성공한 바비 덕후다.
이 조니 뎁을 비롯해 바비인형 컬렉터들이 눈을 밝힐만한 전시가 있다. 롯데백화점이 4월 28일~5월 28일 롯데백화점 잠실점 에비뉴엘아트홀에서 바비인형 제작사 마텔과 함께 여는 ‘바비, 디 아이콘’전이다.
특히 바비인형 컬렉터들이 전시에 주목할 만한 이유가 있다. 희소성이 큰 바비들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전 세계 5대 바비 컬렉터로 꼽히는 일본의 한 컬렉터가 수집한 약 1만 개의 바비인형 중 소장품 10여 점이 한국에 최초로 공개된다. 전시에는 약 200여 점의 인형과 일러스트, 제작 과정을 알려주는 동영상이 전시되는데, 전시 인형들 또한 전 세계에서 4000개 미만으로 생산된 리미티드 에디션(한정판) 라인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유명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와의 협업으로 999개밖에 제작되지 않은 바비인형도 등장한다.
친근한 장난감이긴 하지만, 컬렉터 사이에서 바비인형은 특별한 가치가 있다. 단순한 장난감을 벗어나 예술성을 겸비한 ‘아트 토이’로서의 가치도 평가받고 있다. 마텔코리아 측은 “마텔코리아에서 파악하고 있는 현재까지 가장 비싸게 팔린 바비인형 가격은 30만 2500불로, 호주의 쥬얼리 디자이너가 특별 쥬얼리로 바비인형 의상을 제작해 옥션 이벤트에 선보인 제품이었다. 이밖에 경매 시장에서 바비인형이 거래되는 경우가 있는데 일일이 파악하기는 어렵다. 더 저렴하게, 더 비싸게 팔린 경우도 있을 것이라 예상된다”고 밝혔다. 아이들의 장난감에서 더 나아가 이토록 바비인형이 다양한 연령층의 마음을 사로잡은 이유가 뭘까?
① “유 캔 비 애니띵” 페미니즘을 입다
‘타임지’ 모델로 등장한 이유
그 이유를 이번 전시에서 짐작해볼 수 있다. 전시는 크게 1부 ‘바비의 역사’, 2부 ‘바비와 패션’, 3부 ‘바비의 직업’, 4부 ‘셀러브리티 바비’, 5부 ‘컬렉터의 방’으로 구성된다. 5부는 앞서 언급했던 것과 같이 희소성 있는 바비인형을 강조했다. 그리고 또 다른 바비의 특성을 짚어본 1부와 3부가 눈길을 끈다.
사실 바비인형에 대한 인식이 항상 긍정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부정적인 인식이 더 많을 때도 있었다. 여성 인권이 신장되면서 바비인형이 비판의 대상에 올랐을 때다. 과거 바비인형은 예쁜 얼굴에 풍만한 볼륨감, 잘록한 허리 등이 특징이었다. 또한 백인에 금발머리였다. 이런 바비인형의 외형이 여성미의 대표인양 일반화되고, 또 이를 바탕으로 외모지상주의, 인종차별을 부추긴다는 비판이 일었다. 그런데 이번 전시는 오히려 ‘바비가 페미니스트’라는 콘셉트로 이런 비판에 맞선다.
전시를 준비한 성윤진 롯데갤러리 큐레이터는 “이번 바비 전시가 주목하는 콘셉트는 ‘유 캔 비 애니띵(You can be anything)’, 즉 당신은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점”이라며 “이것은 장난감 회사 마텔을 설립한 루스 핸들러 여사가 한 말이기도 하다. 핸들러는 ‘내가 바비에 담으려 했던 철학은 아이들이 상상을 통해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바비는 언제나 여성이 선택권을 가지고 있음을 상징한다’고 말했다. 단순히 예쁜 인형을 만드는 게 아니라 바비를 통해 다양한 직업을 보여주며 한계에 갇히지 않고 꿈을 펼치는 모습을 담으려 했다”는 설명이다.
‘바비의 역사’와 ‘바비의 직업’ 섹션이 이 점을 중점적으로 담았다. 1959년 처음 출시된 바비는 잘록한 허리와 풍만한 볼륨감을 갖추었다. 그런데 점차 바비의 모습이 변하기 시작했다. 백인에 늘씬한 바비뿐 아니라 통통하거나 키가 작은 바비 등 모습이 다양해진 것. 1부는 이 변화를 읽는다. 성윤진 큐레이터는 “1959년 첫 바비부터 2000년대를 지나 현재에 이르기까지 바비는 체형과 인종이 매우 다양해졌다. 여성에 대한 편협적인 시선에서 벗어나 여성의 다양한 모습을 담으려 했다. 2016년 2월엔 이런 점이 이슈가 돼 ‘타임지’ 표지로 바비가 선정되기도 했다”고 말했다.
바비 모습의 변천엔 바비의 직업이 크게 자리한다. 1959년 첫 등장한 바비의 직업은 패션모델이었다. 이후 조금씩 변화를 거쳤다. 성 큐레이터는 “60년대엔 당시 인기 직업이었던 승무원, 최초의 우주 여행사 모습의 바비가 출시됐다. 이후 1980~90년대 여권이 신장되면서 다양한 직업의 바비가 등장하기 시작했다”며 “록 스타 모습의 바비, 커리어우먼, 여성 CEO 바비도 구현됐다. 경찰, 축구선수 등 남성전용이라 여겨졌던 영역에서 뛰는 바비 모습도 볼 수 있었다. 2000년대엔 설문 조사를 통해 ‘꿈꾸는 직업’ 1위로 선정된 게임 프로그래머로 변신한 바비도 등장했다”고 말했다.
최로빈 마텔코리아 지사장은 “바비에 대한 비판도 알고 있고, 완구 시장이 예전 같지 않은 가운데 바비도 하락세가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 하지만 바비는 단순한 완구 판매가 목적이 아니라, 아이들이 상상하고 꿈을 꿀 수 있는 큰 그림을 갖고 다가선다는 목적성이 확실했다”며 “바비는 단순히 ‘예쁜 여자가 되세요’라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꿈을 이야기한다. 그 점에 있어서 바비는 출시된 순간부터 지금까지 시대에 맞게 달라지며 여성의 사회적 지위에 대해 짚어보는 작업을 이어 왔다. 이 점이 바비를 보다 대중적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② 바비에서 패션 흐름을 읽다
‘뉴 바비 룩’ 탄생 비화
패션을 빼놓고 바비를 이야기할 수 없다. 인형놀이의 백미는 인형에게 다양한 옷을 갈아입히는 것이었다. 그런데 바비 패션은 아이들만 좋아하지 않는다. 현직 패션계 종사자들 및 패션 디자이너를 꿈꾸는 학생들이 공부할 때 바비인형을 탐구한다. 김홍기 패션 큐레이터는 자신이 그 중 한 명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번 전시 소식을 듣고 먼저 연락해서 “전시 관련 글을 쓰고 싶다”고 이야기했을 정도로 바비에 관심이 많다.
김 큐레이터 또한 과거 바비인형을 모았었다. “컬렉터라고 하기엔 부끄러운 수준이다. 25~30개 정도를 모았었는데 어린 조카에게 다 빼앗겨 2개를 갖고 있다. 그런데 이제 그 조카가 어른이 돼 다시 되찾아올 기회를 노리고 있다”며 웃었다. 그가 바비인형에 매혹된 이유는 ‘패션’이다.
김 큐레이터는 “바비는 패션을 이야기할 때 항상 거론된다. 그 정도로 패션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말문을 열었다. 이어 “패션 돌(Fashion doll)은 과거에도 존재했다. 17~18세기부터 당시대의 패션을 반영한 인형 옷들이 만들어졌다. 아주 과거엔 평면적인 종이 인형이 많이 만들어졌는데, 입체감을 살리고 유통 또한 원활하게 하기 위해 인형이 제작되기 시작했다”며 “미니어처 옷이 인형에게 입혀졌는데, 실제 옷과 똑같이 정교하게 제작됐다. 그래서 직접 옷을 구해 볼 수 없는 경우, 인형 옷을 사서 뜯어본 뒤 안을 살펴보면서 공부한 재단사들이 많았다. 이건 현재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정교한 것은 물론이고, 바비인형을 통해 패션 역사도 살펴볼 수 있다는 설명이다.
김 큐레이터는 “한 예로 크리스챤 디올의 ‘뉴 룩(가슴은 부풀리고 허리는 조인 스타일)’ 차림을 한 바비가 있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디올이 개발한 패션이다. 종전 직후 프랑스는 자존심이 무너졌다. 전쟁의 참화로 경제 상황은 비참했고, 특히 독일군에 상처받은 자존심 회복을 위한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때 뉴룩 스타일이 나왔고, 패션 흐름을 이끌었다”고 말했다.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김 큐레이터는 “프랑스는 패션 극장이라는 이벤트를 통해 인형 옷을 하나의 전시처럼 전 세계에 돌렸다. ‘우리 파리는 여전히 살아 있다’를 패션으로 이야기했다. 그만큼 패션 인형의 전통이 길다”며 “한 벌의 옷에는 한 사회의 역사와 정서, 라이프스타일은 물론 정치적인 상황 등 모든 것이 담겼다. 문화적인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 부분은 3부 ‘바비의 직업’과도 연결된다. 김 큐레이터는 “80년대 바비를 보면 킬힐과 어깨에 뽕이 들어간 의상이 등장한다. 여성들이 사회생활을 하고 리더의 위치에 오르면서 옷차림에도 변화가 생겼다”며 “이 변화가 현재의 바비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래서 이번 전시를 패션의 역사, 여성의 성장과 함께 해 온 대상이라는 관점에서 바비를 바라봐도 참신할 것 같다”고 말했다.
특히 바비인형은 유명 디자이너와의 컬래버레이션이 많이 이뤄졌다. 크리스챤 디올을 비롯해 디자이너 다이앤 본 퍼스텐버그는 1970년대 첫선을 보인 랩 드레스를 걸친 바비를 선보였고, 베라 왕은 웨딩드레스를 입은 바비를, 칼 라거펠트는 출시 10분 만에 완전 매진을 기록한, 자신의 패션 세계를 담은 바비를 선보였다. 이밖에 베르사체, 안나수이, 제레미 스캇(모스키노), 오스카 드라 렌타 등 80여 디자이너가 바비의 옷을 만들었다. 현재까지 바비는 약 10억벌 의상을 입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중 30여 점이 ‘바비의 패션’ 섹션에 전시된다.
김홍기 큐레이터는 “인형이 하나의 거대한 문화가 되면 예술가들이 여기에서 영감을 받기도 한다. 앤디 워홀은 바비인형을 보고 초상화를 그렸다고 한다”며 “그런데 이건 단순 유명 예술가와의 컬래버레이션으로 볼 일이 아니다. 다양한 영역과 손을 잡으면서 한 시대의 문화를 풍성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바비가 다시금 평가받는다는 건 긍정적으로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③ 바비와 스타 마케팅의 결합
먼로부터 헵번, 재클린까지
4부 ‘셀러브리티 바비’에는 익숙한 얼굴들이, 그것도 바비인형으로 등장한다. 바비는 당시대 유명 인사들의 모습을 담는 작업을 꾸준히 이어 왔다. 재클린 케네디 바비인형은 유명하다. 미국 대통령 영부인이었던 그는 여성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해박한 지식은 물론, 품위 있고 독특한 패션으로 연일 그녀의 의상이 화제가 됐었다. 이중 특히 인기가 많았던 새빨간 색의 옷을 입은 재클린 케네디 바비인형이 1962년 등장했다.
이밖에 영화 ‘7년만의 외출’ 속 마릴린 먼로, ‘로마의 휴일’ 속 오드리 헵번, 영화 ‘금발은 너무해’의 엘 우즈 역 리즈 위더스푼 등 다양한 유명인사의 모습이 바비로 재탄생했다.
이 여성들의 공통점은 단순 인기인이 아니라, 유행을 이끈 선도자들이라는 것. 또한 당당한 여성상의 상징으로도 꼽혔다. 영화 캐릭터인 엘 우즈는 바비와 상황이 비슷하다. ‘예쁘기만 하지, 머리에 든 것 없이 멍청한 금발 미녀’라는 세상의 편견에 맞선다. 결국엔 원하는 꿈도 이루고 사랑도 쟁취한다. 오드리 헵번이 ‘로마의 휴일’에서 연기했던 공주도 그랬다. ‘공주는 우아하고 품위가 있어야 한다’는 선입견을 보란 듯이 깨버리고 쾌활하고 자유를 꿈꾸는 모습을 보여줬다. 시대의 여성상과 대중문화의 상징이자, 사회 트렌드를 이끈 그녀들에 대한 사랑이 바비인형으로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성윤진 큐레이터는 “셀레브리티 바비들은 대중뿐 아니라 바비 컬렉터들이 눈독을 들이는 대표적 아이템이기도 하다”며 “실제 유명 인사와 바비인형을 비교해보는 재미도 있다”고 말했다.
5부 ‘컬렉터의 방’에선 희소성이 큰 바비인형을 만나는 재미가 있다. 최초 바비인형의 오리지널을 비롯해 버블컷으로 불리는 동그란 헤어스타일을 한 바비가 전시된다. 또한 처음으로 다리가 구부러지도록 고안된 1966년 바비 뿐 아니라 처음으로 허리가 돌아가게 제작된 바비 등 ‘최초’의 이름을 단 바비들이 특별 전시된다. 최로빈 마텔코리아 지사장은 “바비의 다양한 문화와 스토리를 연령과 성별에 관계없이 함께 교감하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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