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NB저널 = 김금영 기자) 서브컬처가 아닌 어엿한 예술의 한 장르로서 애니메이션을 바라보고 주목하는 전시가 5월에 나란히 열린다. 피비갤러리의 ‘피비플러스_애니메이션’전과 일민미술관의 ‘플립북: 21세기 애니메이션의 혁명’전이다. 먼저 ‘피비플러스_애니메이션’전 현장을 찾았다.
애니메이션은 과거 서브컬처를 대표하는 매체로서 인식되는 경향이 강해 예술과는 동떨어진 장르로 이야기되곤 했다. 하지만 이제 이런 이야기는 고리타분한 말. 현 시대에 애니메이션은 영화의 한 장르로 인정받으며 예술적 측면 또한 높게 평가받고 있다. 여기에 정교해진 컴퓨터 프로그램이 이용되면서 테크닉 측면에서도 높은 완성도를 갖췄다.
이런 가운데 피비갤러리는 시각예술의 다양한 매체를 소개하기 위한 목적으로 ‘피비플러스 _ 애니메이션’전을 기획했다. 시각예술의 한 분야로 다양하게 분화하면서 광범위하게 대중과 소통하는 영상 애니메이션 작품이 이번 전시의 중심에 있다.
참여 작가들의 이력도 눈길을 끈다. 순수미술을 전공한 후 영상 애니메이션 작업으로 전환한 작가, 그리고 애니메이션을 전공하고 전문 애니메이터로 활동하고 있는 젊은 감독들이 전시에 참여했다. 순수미술과 애니메이션을 공부한 각 작가들 사이의 접점이 전시에서 생기는 것.
피비갤러리 측은 “신진 작가부터 해외 영화제 수상 및 초청 등으로 주목 받고 있는, 각각의 개성이 뚜렷한 젊은 감독 6인(김영준, 김희예, 오서로, 이정민, 장나리, 최성록)의 작업을 소개한다. 영상 애니메이션의 매체 확장성과 순수예술로서의 가능성을 실험하기 위한 의도”라며 “이들은 과거와 현재의 기술이 중첩된 애니메이션 작업에 살아 숨 쉬는 메시지를 불어 넣어 자신들만의 언어를 풀어낸다”고 밝혔다.
김영준의 작업에서는 애니메이션과 예술 사이 경계에 대한 고민이 엿보였다. 이번 전시에서 인간만을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의 폐해를 벗어나 공존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빙 앤 낫빙(Being And Not Being)’, 그리고 인간의 전지적인 시점을 뒤집어 관찰 대상으로서의 인간 존재론을 부각시키는 ‘50m: 두려움과 경이로움의 허구적 관찰자’를 선보인다. 이 두 작업의 공통점은 영상 중 어떤 스틸컷을 잡아도 전시장에 전시된 회화처럼 보인다는 것.
이런 작업 방식은 작가의 전작 ‘앵그리 테이블’에서도 엿보인다. 마치 화가 난 것처럼 뿔이 솟은 테이블이 등장한 작업이다. 김영준은 “나는 시각디자인과를 졸업하고 디자이너로서도 활동해 왔다. 디자이너가 전시를 한다는 것에 부정적인 시각도 있었다. 그래서 디자인과 예술의 경계가 과연 어디까지인지 고민했다”고 말했다.
“그래서 위에 볼록 뿔이 솟아올라 위에 물건을 놓거나 앉을 수 있는 본래의 기능을 상실한 테이블을 보여주면서 ‘내가 왜 여기 있을까?’ ‘왜 내가 가공이 돼서 전시장에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도록 했다. 내 나름대로 애니메이션의 장르적 확장성과 예술성에 대한 실험을 지속하는 시도”라고 덧붙였다. 만들어진 방식은 애니메이션이지만 순수미술의 회화처럼 보이는 순간까지 포착하며 ‘나(애니메이션)는 여기(예술을 전시하는 전시장)에 있어도 되는 걸까?’ 질문을 던지는 작가의 고뇌가 느껴진다.
작가 자신의 자전적 고민부터
시각적 즐거움 주는 작업까지
김영준을 비롯해 작가의 자전적인 고민이 녹아들어간 작업들을 이번 전시에서 볼 수 있다. 김희예와 장나리의 작업은 인간의 수많은 감정 중 ‘불안감’에 주목한 점이 눈길을 끌었다. 김희예의 ‘그림자 도둑’은 처음엔 희망적으로 시작한다.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젊은이는 면접장으로 향한다. 그런데 이상하다. 등장하는 사람들의 얼굴이 다 똑같이 생겼다. 그리고 면접장에선 어떤 틀을 제시하는데, 이 틀에 맞는 그림자를 가진 사람만이 선택받을 수 있다. 계속 자신의 그림자를 망치질하며 틀에 맞추려고 하지만 배제되는 주인공. 그리고 이 주인공은 다른 사람의 그림자를 탐내는 선택으로 향한다.
96년생으로 대학을 갓 졸업한 젊은 감독 김희예 개인, 더 나아가서는 현재 이 나이 또래의 젊은이들이 느끼는 심리적 박탈감이 쓸쓸하게 와 닿는 작품이다. 김희예는 “개인의 개성을 인정해주지 않는 사회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래서 작품 속에는 각자의 개성 없이 흑백 톤의 사람들이 등장한다. 2D 애니메이션과 3D 애니메이션을 함께 사용해 그림자 이야기를 풀어냈다”고 설명했다.
장나리의 ‘검은 악어’에도 불안함과 쓸쓸함이 가득하다. 작품 속 여자는 옆집 남자가 자살 시도를 한 뒤 병원에 실려 가는 모습을 보면서 불안감에 시달리고, 이 불안감은 실체화돼 악어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 악어는 여자의 주위를 계속해서 맴돌고 공격도 한다. 하지만 여자는 이 악어조차 자신의 일부임을 느낀다.
이 작업은 작가의 실제 경험에서 비롯됐다. 장나리는 “실제로 옆집에서 자살을 시도한 사람이 실려 가는 소리를 들었다. 당시 나 또한 굉장히 우울하고 힘든 시기였기에 그 사람의 모습에서 내가 느껴졌다”며 “많은 현대인이 밑도 끝도 없이 생기는 불안감에 시달린다. 하지만 스스로를 괴롭히는 불안감조차 자신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 내러티브를 작업에 담았다”고 말했다.
김희예와 장나리가 스토리텔링을 기반으로 한 작업을 보여준다면 오서로의 작업 ‘(O.O)’은 스토리나 내러티브보다는 시각적 측면을 강조했다. 독특한 작품 제목은 콧구멍 모양을 형상화한 것이다. 내용은 간단하다. 코가 막힌 주인공이 코를 끊임없이 푼다. 그런데 이 단순한 이야기를 재미있게 시각화시키는 능력이 탁월하다.
주인공의 코 안에서는 그야말로 전쟁이 벌어진다. 줄줄 흐르는 콧물은 폭포처럼 쏟아지고, 코를 풀다가 살이 까져 살짝만 휴지가 닿아도 마치 불이 나는 듯한 따가움, 계속 코를 풀어도 수풀이 가득한 밀림처럼 꽉 막혀 답답하기만 한 콧구멍. 그러다 막혔던 코가 뚫리고 공기를 한껏 들이마시는 순간 콧구멍 안에 천국이 찾아온다. 누구나 겪고 느껴봤을 이 단순한 이야기를 극적으로 표현한 이 작품엔 공감대 어린 웃음이 터지는 포인트가 많다.
오서로는 “학생 때 만들었던 16분짜리 첫 작품 ‘아티스트-110’에는 캐릭터와 세계관이 존재했다. 그런데 이야기를 푼다는 게 쉽지 않더라. 어깨에 잔뜩 들어간 힘을 풀고 싶어서 스토리나 내러티브가 딱히 없이 애니메이션만으로 할 수 있는 형태가 있지 않을까 고민했다”고 말했다.
그 결과 나왔던 작품이 ‘애프터눈 클래스’다. 주인공이 졸기만 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졸음에 대한 직설적 표현이 많은 관심을 받아 안시 애니메이션 국제 영화제, 자그레브 국제 애니메이션 페스티벌 등 국내외 주요 영화제에서 상영 및 초청을 받았다. 오서로는 “많은 사람들이 작품을 좋아해줬다. 작품을 보고 웃는 사람들을 보면서 왜 내가 애니메이션을 만들고 있는지 깨달았다”며 “이번 전시에서 상영되는 ‘(O.O)’은 내가 가진 비염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전 작품과 달리 배경을 아예 없앴고, 캐릭터 하나만이 등장해 코 푸는 장면을 큰 의미부여 없이 직설적으로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이밖에 MS오피스의 파워포인트를 이용해 단순하면서도 독특한 애니메이션 ‘브릿지(Bridge)’ ‘윈도우(Window)’를 보여주는 이정민, 그리고 드론의 시점에서 가상화된 공간을 보여주는 최성록의 작품도 볼 수 있다. 각각의 개성이 뚜렷한 6인의 젊은 감독들이 풀어내는 다채로운 서사와 다양한 기법을 사용한 애니메이션 작품들이 매우 흥미롭다. 전시는 6월 2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