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NB저널 = 김금영 기자) 붓 대신 주사기를 사용하는 작가. 윤종석 작가는 작업 초창기 때 주사기를 사용해 화면에 점을 찍었다. 그리고 2016년 롯데 에비뉴엘 아트홀에서 열렸던 개인전에서는 그 점이 선으로 이어진 화면을 볼 수 있었다. 2년여의 시간이 흐른 지금, 이번엔 화면을 위아래로 분할하고, 선 위에 또 선을 그으며 지움과 그림의 과정을 동시에 이뤄냈다.
소피스갤러리가 윤종석 작가의 개인전 ‘날개 밑의 바람’을 11월 29일까지 연다. 작가는 “여전히 붓보다 주사기가 손에 익숙하다”며 웃었다. 작가는 대학원 시절 때부터 주사기를 사용했다. “깔끔하게 딱 떨어지는 점을 찍을 수 있는 점이 질감적인 측면에서 붓보다 매력적으로 느껴졌다”는 게 이유다. 작업에 들어가기 전 주사기 쇼핑에 나서는데 판매자 측에서 당연히 구매자가 의사일 것이라 여겨 "의사 선생님"이라는 말도 들어봤단다.
점을 찍다가 선을 긋게 된 계기가 있다. 작가의 주변 사람들이 예상치 못한 죽음을 맞으면서 큰 충격을 받았다. 당시 새로운 작업에 목말라 했었던 작가는 갑자기 주변에서 맞닥뜨린 죽음에 삶의 허무함과 덧없음을 느꼈다. 하지만 그렇기에 뭔가를 고민한다면 당장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고. 작가는 “당장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른다. 그래서 점찍는 작업이 사람들에게 인식되고 안정화 시기를 맞았을 때 오히려 선으로 새로운 출발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렇게 선 작업이 익숙해지는가 싶었더니 이번엔 작품을 다각도에서 볼 수 있도록 또 새로운 시도를 했다. ‘주사기를 사용한 선 그리기’라는 조형 방식의 맥락은 유지했다. 그런데 한 화면이 위아래로 분할돼 각기 다른 그림을 볼 수 있고, 마치 창문을 여는 것처럼 설치된 그림의 앞과 뒷면에도 또한 다른 그림이 그려졌다. 전시장에는 창문이 없지만 이 그림들로 인해 마치 창문이 설치된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다.
먼저 위아래 분할된 화면엔 각각의 이야기가 있다. 작가가 평소 찍은 사진을 보고 그린 그림, 그리고 그 사진을 찍은 날 있었던 역사적인 사건 등 정보를 찾아 이를 바탕으로 그림이 한 화면에서 만난다.
한 예로 앵무새 그리고 작은 촛불을 그린 화면에서 앵무새는 작가가 파리 재래시장을 갔을 때 찍은 대상이다. 사진을 찍고 보니 이 예쁜 새의 발목엔 고리가 달려 있어서 날개가 있지만 자유롭게 날지 못하는 모습이 안타까웠다고 한다.
그리고 사진을 찍은 7월 13일에 일어났던 일들을 과거부터 찬찬히 살펴보니, 중국의 인권운동가 류샤오보의 이야기를 찾을 수 있었다. 당국의 감금 결정으로 노벨평화상 시상식에 참석하지도 못하던 중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난 류샤오보를 기리는 촛불이 타오른 날이었다. 자유롭게 날지 못하는 앵무새와 억압 속 세상을 떠난 류샤오보. 두 화면은 그냥 보기엔 아무 상관도 없는 것 같지만 연결고리를 지녔다.
신호등과 산을 그린 그림도 있다. 신호등은 작가가 평소 많이 접하고 찍은 대상이다. 그는 “가끔 신호등을 보면서 누군가 내게도 가야할 때와 멈춰야할 때를 알려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한다. 사진을 찍은 10월 18일 일어난 일들을 찾아보니 안나푸르나로 향했던 한국인 등반가의 걸음이 그곳에서 멈춘 날이었다. “이 등반가는 어떤 신호를 받고 그 산으로 향했던 걸까? 이런 궁금증이 생겼고, 신호등과도 연관이 있다고 생각해 한 화면에 함께 그렸다”고 작가는 설명했다.
현재의 사진과 과거의 정보가 만난 화면
이 화면을 지우면서 또 그리다
이것이 그림의 끝이 아니다. 작가는 유리와 같이 투명한 플렉시글라스에 그림을 그린다. 앞선 예를 들자면 앵무새와 촛불을 먼저 그린다. 그러면 투명한 플렉시글라스엔 앵무새와 촛불이 나타난다. 그런데 이 위에 다시 주사기로 선을 쭉 긋는다. 그렇게 선을 다 긋고 나면 플렉시글라스의 특성상 한쪽 면에는 기존에 그렸던 앵무새와 촛불이 그대로 남아 있고, 선을 그은 면엔 단조로운 선들만 남는다. 그래서 앞과 뒤 그림은 매우 다른 것 같지만 또 조화롭기도 하다. 완전 제각각 이질적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두 화면 사이 중간색을 찾아 선을 그었기 때문.
이런 방식으로 이뤄진 작품들의 이름은 모두 ‘같은 날의 잔상’이다. 굳이 번거로워 보이는 작업을 시도한 특별한 이유라도 있을까? 작가는 “현재의 우리에게 영향을 끼치는 모든 것들의 이야기를 담아보고 싶었다”고 했다. 주변의 사람들이 갑자기 죽음을 맞았을 때도 자신의 주변에 어떤 사람들이 있었고, 어떤 관계들이 있는지 살펴보게 됐다고 한다. 그 관계를 관찰하는 것이 사진을 찍는 습관으로 이어졌다. 특별할 것 없이 자신의 마음에 들어오는 장면이 있으면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었다.
그렇게 쌓인 사진을 보다보니 또 새로운 흥미가 생겼다. 작가는 “결국 사진엔 내 취향이 반영된다. 그리고 이 취향은 단지 오늘날의 나뿐 아니라 과거부터 현재까지의 시간, 그리고 내 주변에 있었던 사람들과 수많은 일들이 반영돼 만들어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보니 과거의 같은 날에는 무슨 일들이 있었을지 궁금해지기 시작했고, 과거와 현재 사이 연결고리를 찾는 데 몰두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결국 작가의 작업에서 드러나 온 점과 선은 그의 삶과 가치관이 반영된 결과로도 볼 수 있겠다. 처음엔 각각의 독립적인 존재에 관심이 있어 점을 하나하나 찍었지만, 나중엔 이 점들 사이의 관계를 살피고 연결고리를 찾아 선으로 잇기 시작한 것. 혼자의 세계에 몰두했던 작가가 보다 넓은 시각을 갖고 세상을 살펴보기 시작했다는 점이 느껴지는 지점이다.
작가는 “과거의 영향이 있기에 오늘이 있다. 이 이야기를 플렉시글라스에 그리면 보다 효과적일 것이라 생각했다. 먼저 그린 앵무새와 촛불을 새로운 선으로 지우는 것 같지만 앵무새와 촛불은 그대로 화면 위에 존재한다. 마치 잠들어져 있는 과거처럼. 그렇게 앵무새와 촛불, 그리고 선의 이야기는 연결된다”며 “추상적으로 보이는 겉면과 그 속에 존재하는 구상 이야기 이런 이중적인 코드를 건드리기에 좋은 스타일의 작업”이라고 말했다. 플렉시글라스를 사용한 지는 1년 반 정도 됐는데 아직 예민한 상태라 꾸준히 연구 중이라 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플렉시글라스 작업을 비롯해 캔버스에 그린 그림, 조각 작업까지 작가의 작업을 전반적으로 살펴볼 수 있도록 구성됐다. 캔버스에는 역대 대통령들의 손가락을 그리며 지나가는 순간들을 포착했다. 뇌리에 남은 강한 잔상과 희미해지는 기억들을 주사기라는 특수한 수단을 통해 화면에 구현했다.
조각 작업에서는 작가가 느끼는 삶의 무게가 느껴진다. 한 인물을 수많은 거품이 뒤덮고 있는데, 여기에 주사기로 뿌린 물감들이 흘러내린다. 작가는 “시간이 지나면서 모든 것은 사라진다. 하지만 사람들은 순간에 집착한다. 그러다보면 어느새 자신은 사라지고 그 순간만 남는 느낌이 들 때도 있는데, 참 허무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허무함에 묻히기보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어진 순간을 살자는 게 작가의 이야기다. 꽃과 해골이 함께 한 작업에서 해골은 서늘하지만 이와 함께 하는 꽃은 해골에 주눅 들기보다는 강렬한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심장을 형상화한 화면도 붉은 이미지가 불안감을 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또 멈췄던 심장이 다시금 강하게 뛸 듯 생명력이 불끈불끈 느껴져 아름답기도 하다. 그리고 주어진 시간을 사는 건, 과거부터 현재의 시간을 모두 끌어안는 노력이기도 하다. 작가의 작업이 점에서 선으로 이어져온 것처럼.
“삶은 덧없으되, 작업은 치열하다.” 이것이 과거부터 쭉 밝혀 온 작가의 작업관이다. 그는 “결국엔 모든 게 허무할지도 모르지만 지금 살아 있음에 어떤 것이든 할 수 있는 것도 있지 않을까? 치열하게 충실하게 살 수 있는 현재가 우리에겐 주어져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지우는 것 같지만 그리고, 허무한 것 같지만 강렬함을 담는 작가의 시도는 현재 진행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