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NB저널 = 문규상 법무법인 대륙아주 변호사) 문재인 정부가 출범하고 최근까지 대법원장과 헌법재판소장을 비롯한 여러 분의 대법관과 헌법재판관들이 퇴임하였고, 새로운 분들이 인사청문회를 거쳐 그 자리를 메웠습니다. 대법관인지 헌법재판관인지에 따라, 그리고 어느 쪽 지명 몫인지에 따라 국회의 인준표결 필요 여부가 달라지지만 공통적으로 국회에서 청문회가 열리고, 국회방송을 통해 생중계가 이루어집니다.
법조의 고위직에 대한 인사청문회가 시작된 지 2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청문회의 질문은 거의 바뀐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최근 진행된 청문회에서도 위장전입과 부동산 다운거래가 단골 메뉴로 나왔고, 동성애 합법화와 사형제 찬성 여부에 대한 의견을 묻는 질문들이 양념거리 정도로 나왔으며, 이념의 편향성에 대한 지적도 있었습니다.
질문의 수준도 기대 이하였지만 청문 후보자들 역시 평소 청문직위에 나서도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자기관리에 철저하였는지 의심스런 경우도 눈에 많이 띠었습니다. 일부 후보자들의 경우였지만 위장전입 횟수가 3회, 5회, 심지어 8회나 이르고, 부동산 다운거래는 약방의 감초 격으로 따라다녔습니다.
물론 당시의 법 기준만 따진다면 법 위반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 부분도 있겠지만, 과연 남에게 벌을 주고 시비를 가리는 법조 고위직들의 청문회에서조차 여전히 위와 같은 질문들이 단골메뉴로 회자되는 것은, 청문회를 지켜보는 사람들을 오히려 더욱 진땀나고 안타깝게 느껴지게 할 정도였습니다.
공자가 대사구를 맡았을 때
기원전 497년, 54세의 공자는 자신의 고국인 노나라 대사구(大司寇)의 자리에서 갑자기 물러나 기원전 484년 노나라로 다시 돌아올 때까지 정처 없는 유랑 길에 올랐습니다. 대사구는 법무를 담당하는 자리였는데 그리 높은 관직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공자가 대사구로 재직하는 동안 노나라에는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한나라의 역사가 사마천은 ‘史記’에서 공자가 대사구로 재직하는 동안의 업적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공자가 시행한 행정 효과가 너무 좋아서 양고기와 돼지고기 파는 자들이 값 부풀리기를 그만두고, 남자와 여자가 길을 따로 걷게 되었고, 땅에 떨어진 물건을 줍는 사람이 없었고, 밖에서 온 사람들 모두에게 묵을 곳을 제공했기 때문에 관리를 찾을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러나 공자를 견제하기 위하여 이웃 제나라 사람들이 꾸민 계략에 빠져 당시 노나라의 실권자인 계환자가 공자를 알아주지 않고 제나라에서 보내온 미녀들에 정신이 팔려 정사를 게을리 하게 되자 이에 실망한 공자는 제자들과 함께 유랑 길에 오르게 된 것입니다.
벼슬 걱정말고 자격을 걱정했으면…
물론 당시의 대사구 벼슬이 지금의 사법부와 같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공자가 공직생활을 하는 동안 가장 높은 벼슬이 대사구의 직위였고, 그것도 54세에 이르러 천신만고 끝에 얻은 벼슬이었지만, 미련 없이 벼슬을 버리고 유랑 길에 올랐던 것입니다.
공자는 論語 里人 편에서 “벼슬자리가 없는 것을 걱정할 것이 아니라 벼슬길에 오를 자격조건이 갖추어져 있는지를 걱정해야 하며(不患無位 患所以立), 주위에서 자신의 존재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걱정하지 말고(不患莫己知), 남이 나를 알아줄 만하게 되도록 노력하라(求爲可知也)”고 하였습니다.
이는 자신에게 기회가 주어질 때까지 내면의 덕을 닦아 자기 자신을 충실하게 하는 공부에 더욱 힘을 쓰던 공자의 모습입니다.
앞으로는 법조인 청문회에서도 위장전입, 부동산 다운거래를 성토하는 대신 후보자가 그 직위에 대한 자격조건을 갖추었는지에 대한 질문이 쏟아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법무법인 대륙아주 문규상 변호사: 1978년 서울대 법대 졸업. 1987년 검사로 임용돼 ‘특수통’으로서 전두환 전 대통령의 비자금 수사와 ‘강호순 연쇄 살인사건’ 등을 맡아 성과를 냈다. 2006~2008년 국가청렴위원회(현 국민권익위원회)의 초대 심사본부장, 2009~2014년 대우조선해양 부사장, 2018년 9월 한국해양진흥공사 초대 투자 심의위원 위촉. 2013년 성균관대학교 유학대학원 석사과정 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