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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 그림 길 (24) 동소문 ~ 동대문 ⑤] 백성 고생시켜 성 세우더니 倭 오자 장수들 줄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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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622호 이한성 동국대 교수⁄ 2019.01.14 09:19:42

(CNB저널 = 이한성 동국대 교수) 이제 동묘(東廟)를 뒤로 하고 동대문을 향하여 간다. 이 길은 ‘양화진 ~ 신촌 ~ 서대문 ~ 종로 거리(운종가) ~ 동대문 ~ 신설동 ~ 제기동 ~ 청량리 ~ 중랑천’으로 이어지는 조선시대 한양의 동서 성저십리(城底十里: 성밖 십리)와 경조(京兆: 문안)를 잇는 가장 핵심도로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서울의 동서를 잇는 핵심도로이기는 조선시대와 마찬가지였다. 60년대 말까지만 해도 서대문에서 청량리까지 다니던 전차가 이 메인도로를 다녔고, 70년대까지도 신촌에서 중량교까지 다니던 시내버스는 서울에서 가장 긴 노선 중 하나였다.

여진인 머물던 곳에 이제 중동인까지

동묘에서 동대문에 이르는 길은 온갖 난전(亂廛) 스타일의 가게들이 자리 잡고 있다. 옷 가게, 화장품 가게, 장난감, 문구, 액세서리, 먹을거리, 식당, 때로는 야채와 생선…. 일상생활에 쓸 수 있는 물건들이 너무나도 싼 값에 나와 있는 서민의 시장이다. 특이한 음식점으로는 양꼬치(羊串) 집들도 자리 잡았다. 중국인이나 중앙아시아인들이 그들의 음식 문화를 전파한 서민의 음식이다.

길 건너 창신동 쪽도 비슷한데 큰길 안쪽으로는 조선시대에 문밖으로 쫓겨난 사찰과 관련된 점(占)집도 있고, 평화시장, 동대문 패션과 관련해 봉제 업종도 있는데 새로 등장한 것은 네팔, 파키스탄 쪽 사람들이 문을 연 식당들도 있다.

동대문 문안에는 여진인 사신이 오면 머물던 북평관(北平館)이 있었으니 이와 관련된 여진인들도 동대문 안팎에 있었을 터인데 이제는 대상국이 달라진 것이다.
 

‘동문조도’의 각도에서 바라본 동대문. 사진 = 이한성 교수
‘동문조도’의 시각에서 바라본 동대문의 성밖 길. 사진 = 이한성 교수

동쪽엔 채소, 칠패엔 어물” 이유

겸재의 동문조도(東門祖道)를 보면 동대문 밖 남북으로 오밀조밀 모여 있는 집들이 보인다(그림의 번호 4, 11). 이 집들은 무엇 하는 집들이었을까? 아마 현재의 이곳 모습과 다르지 않은 조선시대 스타일의 집들이 있었을 것이다. 조선시대 한양의 상권은 기본적으로 운종가(雲從街: 지금의 종로 거리)에 자리 잡은 육의전(六矣廛)과 허가받은 시전(市廛)에게만 허용되었다. 따라서 도성 안에서 임의로 상점을 여는 일은 금지됐다. 이 육의전과 시전에게는 금난전권(禁亂廛權)이라 하여 임의로 가게를 여는 행위를 규제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되어 있었다.

 

겸재의 ‘동문조도’에 글 속의 방문지를 표시해 봤다.

등짐장수, 봇짐장수, 방물장수나 자신이 만든 물건이나 소출 농산물을 이웃과 거래하는 정도야 문제가 없었지만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상행위는 어려웠다. 왜란(倭亂)과 호란(胡亂) 두 번의 난(亂)을 거치는 동안 영정조 시대에 오면 많은 유민이 한양으로 몰려들게 된다. 자연 이들은 동대문과 서대문 밖에서 여러 물건들을 거래하게 되었는데 남대문 밖 염천교 근처에는 칠패시장(七牌市場)이라는 난전이 섰고, 동대문 쪽에는 아예 지금의 종로 4가 네거리 쪽 배오개(梨峴)에 배오개시장이 섰다.

이곳에는 어영청(御營廳)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군영의 군인들, 관청의 서리들, 세도가의 노비나 끈을 대고 있는 이들이 군영이나 관청들과 상부상조하면서 난전을 이어갔다 한다. 이때 유행한 말이 ‘동부채 칠패어(東部菜 七牌魚)’이었다고 한다. 용산에 가까운 칠패시장에는 어물이 풍부했고, 동대문 밖 용두동, 제기동, 답십리, 왕십리, 뚝섬 등지에서 생산한 채소가 동대문을 통해 배오개시장으로 모이니 자연 야채가 풍부해 나온 말이다.

 

조선시대 여진인 사신이 머물렀던 북평관이 있던 자리. 사진 = 이한성 교수

도봉산역 옆에 있었던 다락원시장은 또 다른 큰손이었는데 함경도와 강원도 물산이 여기에 모여 배오개와 칠패로 공급되었다 한다. 자연 그 물류의 길은 동대문을 통해서였다. 전하는 이야기로는 다락원시장에서 누군가 북어를 매점하면 한양 사람들이 포를 구하지 못해 제사를 못 지낼 지경이었다는 이야기도 있으니 난전의 힘이 보통은 아니었나 보다.

또한 동대문 밖 새벽시장(朝市)에서 거래된 필수품이 있었는데 바로 땔감이었다. 솔가지를 솜뭉치처럼 단단히 묶어 바리바리 소등에 싣던가 장작을 달구지에 싣고 청량리 너머로부터 오면 동틀 무렵 동대문 밖에 도착했다고 한다. 한양 문안(사대문 안)에는 이미 산이란 산은 벌거숭이가 되었으니 밥 지어 먹을 나무 구하기가 참으로 어려웠다. 노복들은 일찌감치 동틀 무렵 동대문 밖으로 나가 나무장수와 흥정을 해 나무를 사와야 했다. 서대문 밖도 예외는 아니어서 홍제원 너머께서 무악재 너머 서대문 밖에 이른 나무꾼들이 나무를 팔았다 한다.

필자가 어렸을 때까지도 이런 생활 모습이 남아 있었다. 추수철 되면 쌀 한두 가마 사 놓고, 김장 200포기쯤 하고, 연탄 200~300 장 들여 광에 쌓고, 아버지가 장작 한 바리 사다가 쪼개어 대청 밑에 차곡차곡 쌓으면 엄마는 너무나도 행복해 하셨다.

동과 북으로 뻗은 길의 출발점

물류가 많아지니 자연 사람의 왕래도 많아졌다. 또한 동대문은 평해대로(관동대로)와 경흥대로(관북대로)의 출발점이었다. 평해대로는 동대문 ~ 중랑포 ~ 망우리 ~ 양근(양평) ~ 지평 ~ 원주 ~ 안흥 ~ 진부 ~ 횡계 ~ 대관령 ~ 강릉 ~ 옥계 ~ 삼척 ~ 울진~ 평해로 이어지는 길이다. 경흥대로(관북대로)는 동대문 ~ 종암리 ~ 수유리 ~ 다락원(도봉동) ~ 의정부 ~ 축석령 ~ 송우리 ~ 포천 ~ 영평 ~ 김화 ~ (휴전선) ~ 회양 ~ 철령 ~ 안변 ~ 원산 ~ 영흥 ~ 함주로 이어지는 길이다.

 

예나 지금이나 분주한 동대문 성안의 풍경. 사진 = 이한성 교수

동대문은 동쪽으로 발령받은 벼슬아치들이 떠나는 길이었으며, 금강산 탐승길에 오르는 길손들의 행유(行遊) 길이었다. 또한 유배당해 적거지(謫居地)로 가는 가슴 아픈 이들의 무거운 출발 지점이기도 했다. 겸재가 그려 놓은 동대문 밖 집들 중에는 나무장수가 후후 불어가며 먹었을 술국집도 있었을 것이다. 서민들 먹고 살 푸성귀며 일용품 파는 난전도 있었고, 인정(人定) 후 문밖에 도착한 길손 하룻밤 묶어야 할 몽놋방, 거나하게 한 잔 하면서 걸쭉한 농담 걸칠 주모네 주막인들 어찌 없었겠는가?

이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선조 광해군 연간을 살던 석주(石洲) 권필(權韠, 1569~1612)이다. 그는 이곳 동대문 밖에서 죽었다. 석주는 구속받기 싫어하고 강직한 사람이었다 한다. 젊었을 때에는 이안눌(李安訥)과 함께 강계에서 귀양살이하던 송강 정철을 찾아가기도 했다.

예 갖추기 싫다며 벼슬 그만둔 권필

그는 벼슬길에 오르지 않아 가난했는데 이를 걱정한 주변 동료들이 동몽교관(童蒙敎官) 자리를 추천해 주었는데 관대를 하고 상부 부서 예조에 가서 예를 갖추지 않고(취임 인사도 안 하고) 그대로 학생들을 가르쳤는데 끝내 예를 갖추는 일을 못하겠다 하고는 그 직을 그만두었다는 것이다.

그는 방랑에 가까운 생활도 하였는데 33세 이후로는 강화에 머물며 후학을 가르쳤다. 강화 고려산 북록(北麓) 하도리에는 그의 흔적을 기념하는 石洲權先生遺墟碑(석주권선생유허비)가 있다. 이런 강직한 석주에게 어느 날 분개할 일이 알려진다. 임숙영(任叔英)이 과거에서 답안지 책문(策文)을 냈는데 그 내용이 광해군의 비(妃) 유씨(柳氏)의 오라버니 유희분(柳希奮)의 도를 넘는 방종함을 비방하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이 일이 알려져 임숙영은 과거급제가 취소되고 만다. 석주는 이 이야기를 듣고 비분강개했다. 그리고는 풍자하는 시를 썼다.

 

왕가의 비리에 분노하는 시를 지었다가 유배를 당했지만 유배 가는 날 술집에서 먼길을 떠나버렸다는 의기의 선비 석주를 기리는 유허비. 자료사진

宮柳 궁궐 버드나무
宮柳靑靑鶯亂飛 궁궐 버들 푸르르고 꾀꼬리 어지러이 나는데
滿城冠蓋媚春暉 성안 가득 벼슬아치들 봄햇살에 아첨하네
朝家共賀昇平樂 조정에서는 태평의 즐거움을 함께 축하했는데
誰遣危言出布衣 누가 바른 말해 관직 없이 쫓겨났나?

이 시가 광해군에게 알려졌다. 광해군은 분노했다. 석주는 잡혀가 국문을 당했다. 다행히 목숨은 부지하여 해남 귀양길에 올랐다. 그는 장독(杖毒: 곤장 후유증)을 안고 동대문 밖을 나섰다. 그는 술을 많이 좋아한 사람이었다. 아내가 술 좀 그만하라 했더니 아내에게 답한 시가 전해진다.

數日留連飮 연거푸 며칠 술을 마셔도
今朝興又多 오늘 아침도 또 흥이 많네
卿言也復是 당신 말이 옳기는 옳아
奈此菊枝何 이 국화 가지(향기)는 어찌 하겠오?

귀양 보내니 술집에서 먼길 떠난 석주

이렇듯 석주는 술을 사랑한 사람이었다. 그가 귀양 가는 길, 그를 아는 이들이 그냥 보낼 수 없었을 것이다. 동대문 밖 어느 집인지 기록은 없지만 어느 주막에서 ‘술이나 맘껏 자시고 떠나시게’ 권했을 것이고 그는 끝내 귀양길에 오르지 못하고 술 속에서 먼 길을 떠났다. 겸재의 그림 속 어느 집인가에서 석주는 마지막 술을 들었을 것이다. 그는 살아생전 마치 이날을 위해 쓴 시처럼 저승길에서도 어느 주막에 들지 않았을까?

途中 가는 길에
日入投孤店 날은 저물어 외딴 주막에 드네
山深不掩扉 산은 깊고 사립문을 닫지 않았네
鷄鳴問前路 새벽녘 갈 길 물었더니
黃葉向人飛 노란 단풍잎 내게 날아오네.

석주 선생이시여, 노란 단풍잎 날아간 곳 따라 잘 가셨는지요?

흥인지문의 옹성. 상습침수 지역이라 특별히 옹성을 쌓았다고 한다. 사진 = 이한성 교수

동대문에만 옹성이 둘러진 이유는?

이제 동대문에 닿는다. 동대문은 다른 문들과는 달리 옹성(甕城)을 둘렀다. 군사적으로 적의 침략에 대비하여 방어하기에 훨씬 유리하기는 한데 군사적 목적보다는 이 지역이 습지라서 구조물 보호 차원에서 옹성을 쌓았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군사적 목적이었다 하면 북문은 그렇더라도 남대문 서대문에는 왜 옹성을 쌓지 않았겠는가? 동대문이 선 지역은 지반의 높이가 청계천과 그다지 다르지 않아 우기만 되면 상습침수 지역이었다 한다. 지하철 동대문 구간 공사를 할 때도 물이 많이 고였다 한다. 1396년 태조 5년 처음 도성을 쌓을 때도 동대문 구간을 맡은 안동(安東)과 성산(星山) 사람들은 죽을 고생을 하였다. 이때의 상황을 실록의 기록으로 살펴보자.

동대문(東大門) 지세는 웅덩이처럼 낮으므로 밑에다가 돌을 포개어 올리고 난 다음에 성을 쌓아, 다른 곳보다 배나 공력을 들였다. 안동(安東)과 성산부(星山府) 사람들이 그 일을 맡았으나 마치지 못했으므로, 경상도 관찰사 심효생(沈孝生)이 “동대문의 역사는 10여 일은 더 두고 마치게 하여 다시 올라오지 않게 하옵소서” 하고 청했으나, 판한성부사 정희계(鄭熙啓)가 아뢰기를,

“백성들은 속일 수 없습니다. 근간에 분부가 계시기를, ‘씨 뿌릴 때가 되었으니, 모두 돌려보내어 농사를 짓게 하라’ 하시어, 듣는 자들이 기뻐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는데, 지금 유독 안동과 성산 사람만 남겨 두면 그 민심이 어떻겠습니까? 하물며 마치지 못한 것은 지세가 그런 까닭이지 백성들이 게을러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기고 함께 돌려보내게 하였다.

東大門以其地洿下, 排橛疊石, 而後城之, 故其功倍他. 安東、星山府人, 寔赴其役未畢, 慶尙道都觀察使沈孝生請曰: “東大門役人, 請留十餘日以畢, 無令再來” 判漢城府事鄭熙啓啓曰: “民不可誣也. 近有命曰: ‘時當耕種, 築城人, 悉放歸農.’ 聞者莫不欣喜. 今獨留安東、星山人, 則其民心何? 況其未畢, 地勢然也, 非民之怠也.” 上然之, 命幷放之.


백성의 안타까움 못 살핀 태조

도성을 쌓을 때 전체 구간을 97 구간으로 나누어 각 도읍 백성으로 하여금 자신의 구역을 당담케 하는 실명제 공사를 하였다. 운수 사납게도 안동과 성산 백성들이 이 물구덩이에 성을 쌓는 일을 맡았다. 고생은 고생대로 다하고도 성은 다 쌓지 못했다. 농사가 시작되는 음력 2월 하순이 되니 백성들을 귀향시키기로 이미 통보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경상도 관찰사 심효생은 자신의 백성들이 미완의 상태로 돌아오면 또 다시 상경하여 공사를 해야 하므로 열흘 더 걸리더라도 끝낸 후 귀향토록 해 달라고 건의한 것이었다. 그런데 태조는 백성들과의 약속을 지켜야 하므로 약속한 날에 되돌려 보냈다. 아마도 농사가 끝난 농한기에 이곳 백성들은 다시 불려와 공사를 마쳤을 것이다. 동대문을 바라보면 그날의 안동, 성산 백성들께 미안한 생각이 든다.

그런데 약 200 년 뒤 이곳에서는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일어났다. 선조 25년 1592년 5월 3일 왜군 1진 小西行長(고니시 유키나가) 군대가 총알 한 방 쏘지 않고 동대문을 통과하여 한양을 점령한 것이다. 이 성을 쌓은 안동, 성산 백성들이 저승에서라도 이 일을 알았다면 통곡했을 것이다. 이때 조선의 국왕 선조(宣祖)는 어떻게 대응하고 있었을까? 그날의 실록 기록을 보자. 임금과 신하 간에 오간 생생한 대화체 기록이 전해진다.

어서 도망가자는 선조와 안 된다는 신하들

임금: 적이 이미 강을 건넜는가?

잡과 이상홍(李尙弘): 어제 저녁에 이미 입성했다고 합니다.

임금: 이곳에서 무엇을 하겠는가? 속히 피하는 것이 마땅하겠다.

잡과 상홍: 오늘 아침 장계(狀啓)에 오늘 떠나고자 한다고 하였습니다.

임금: 여기에 머물 수 없다.

두수: 오늘은 미처 떠날 수 없으니 내일 조용히 거둥하소서.

임금: 오늘 떠나 금교(金郊)에 가서 자려고 한다.

두수: 밤에 떠날 수는 없습니다. 사람들이 겁을 먹으면 뜻밖의 변이 생길지도 모릅니다. 내일 일찍 떠나셔야 합니다.

임금: 다른 말 하지 말고 속히 출발하라.

두수: 할 수 없습니다.

임금: 평산(平山)을 거치지 않고도 다른 길이 있는가?

상홍(尙弘): 용천(龍泉)에서 자비령(慈悲嶺)을 넘는 길이 있으나 천험(天險)입니다.

임금: 평양에 닿을 수는 있겠는가?

잡: 여기서는 조치할 수 없지만 서경(西京)으로 행행(行幸)하신다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상호: 신이 서경을 보았는데 역시 천험입니다.

두수: 먼저 황해 감사를 보내어 일로(一路)에 개유(開諭)하게 해야 합니다. 만약 경동(驚動)된다면 사람들이 틀림없이 놀라서 흩어질 것입니다.

임금: 우상(右相)은 나가서 모든 일을 정돈시키라.

상홍: 경성의 부고(府庫)는 이미 전부 다 타버렸으므로 적들은 얻은 것이 없을 것이어서 틀림없이 서둘러 이곳으로 올 것입니다.

임금: 그렇겠다. 속히 나가 일처리 해라.

上曰: 賊已渡江乎? 磼及李尙弘曰: 昨夕入城云. 上曰: 在此何爲? 速避爲當. 磼、尙弘曰: 朝日狀啓者, 欲於今日移發. 上曰: 不可留此. 斗壽曰: 今日不可及, 明日請從容動駕. 上曰: 今日欲往宿金郊. 斗壽曰: 不可犯夜. 人心可懼, 恐有意外之變. 明當早發. 上曰: 除他言, 速行. 斗壽曰: 不可爲. 上曰: 不由平山, 而有他路乎? 尙弘曰: 自龍泉, 越慈悲嶺, 則天險也. 上曰: 平壤可得達乎? 磼曰: 在此, 不得措置, 行幸西京, 則足以爲之矣. 尙弘曰: 臣見西京, 天險也. 斗壽曰: 先遣黃海監司, 開諭一路爲當. 若驚動, 則人必駭散. 上曰: 右相出而整齊. 尙弘曰: 京城, 則府庫已盡焚蕩, 賊無所得, 必速至此. 上曰: 然. 速出治事.

아, 부끄럽다. 피난길에 올라 서두르는 선조에게 ‘밤에 떠날 수는 없으니 내일 아침 일찍 가자’고 하자, 선조의 답변은 ‘여기 머물 수 없다(不可留此), 다른 말 말고 속히 가자(除他言 束行)’는 재촉 일색이다. 어찌 임금 된 사람이 도망칠 생각뿐이란 말인가?
 

히젠 나고야 성에 모여든 왜군의 훈련 배치도. 35 다이묘가 모였다고 한다. 사진 = 이한성 교수
히젠 나고야 성의 왜군 배치 그림. 사진 = 이한성 교수

일본군이 수영만 해도 혼비백산 조선군

그러면 수도 한양을 지키는 장수들은 어떠했을까? 같은 날 실록에 기록된 내용이다.

적이 경성을 함락시키니 도검찰사(都檢察使) 이양원, 도원수 김명원, 부원수 신각(申恪)이 모두 달아났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출발한 지점인 唐津(가라쓰) 바다. 사진 = 이한성 교수

이에 앞서 적들이 충주(忠州)에 도착하여 정예병을 아군처럼 꾸며 경성(京城)으로 잠입시켰다. 왕의 파천이 이미 결정되었음을 염탐한 뒤에 드디어 두 갈래로 나눠 진격하였으니, 일군(一軍)은 양지(陽智), 용인(龍仁)을 거쳐 한강으로 들어오고 나머지 일군은 여주(驪州), 이천(利川)을 거쳐 용진(龍津)으로 들어왔다. 적의 기병(騎兵) 두어 명이 한강 남쪽 언덕에 도착하여 장난삼아 헤엄쳐 건너는 시늉을 하자 우리의 장수들은 얼굴빛을 잃고 부하들을 시켜 말에 안장을 얹도록 명하니 군사들이 다 붕괴하였다.

이양원 등은 성을 버리고 달아났고, 김명원·신각 등은 뿔뿔이 흩어져 도망하였으므로 경성이 텅 비게 되었다. 적이 흥인문(興仁門) 밖에 이르러서 문이 활짝 열려 있고 시설이 모두 철거된 것을 보고 의심쩍어 선뜻 들어오지 못하다가 먼저 십수 명의 군사를 뽑아 입성시킨 뒤 수십 번을 탐지하고 종루(鍾樓)에까지 이르러 군병 한 사람도 없음을 확인한 뒤에 입성하였다.

賊陷京城, 都檢察使李陽元, 都元帥金命元, 副元帥申恪, 皆走. 先是, 賊至忠州, 潛遣銳卒, 扮作我軍貌樣, 入京城. 偵知西幸已決, 遂分道進兵, 一軍由陽智、龍仁, 趨漢江, 一軍由驪州、利川, 趨龍津. 賊數騎至漢江南岸, 戲作浮渡之狀, 諸將色變, 命左右鞍其馬, 衆遂潰. 李陽元等棄城走, 金命元、申恪等各自逃散, 京城遂空. 賊到興仁門外, 見開門撤備, 疑不敢入, 先遣兵數十人, 入城探視數十番, 至鍾樓, 明知其無一箇軍兵, 然後乃入.

임진왜란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 출병을 위해 특별히 쌓은 히젠 나고야 성이 있었던 곳임을 알리는 표지석. 사진 = 이한성 교수

성 놔두고 도망간 지배층엔 처벌 없고

도성을 지키는 장수도 이와 같았다. 그 임금에 그 장수다. 적들은 활짝 열린 무인지경의 동대문을 통해 입성했다. 200년 전 선조들이 땀 흘려 쌓은 성을 싸움 한 번 없이 적에게 내준 것이다. 연전 일본 북규슈(北九州)에 있는 히젠 나고야(肥前 名護屋) 성(城)에 다녀왔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전국 다이묘(大名)들의 군대를 징발하여 이곳에서 1년이 넘는 기간 동안 조선 침략 훈련을 실시하였다. 그곳 히젠 나고야 성을 둘러보면서 우리 일행은 너무도 참담함에 마음으로 울었다. 이렇게 철저히 준비를 했구나.

아, 조선은? “히데요시가 침공하느냐 마느냐?”로 세월을 보내다가 마음 편하게 “침공은 없다”로 결론을 내렸다. 준비는 물론 없었다. 주장한 사람들에 대한 응징도 없었다. 침공 20일 만에 한양은 함락되었다. 왜적(倭賊)이 부산포에 4월 13일 내려 한양에 5월 3일 입성했으니. 백성들은 7년 동안 재산과 목숨을 잃었고 여인들은 정조를 잃었다. 임금과 장수들은 도망치기 바빴다. 그 엄동설한에 습지에 말뚝을 세우고 그 사이 돌을 모두 채우는 고생 끝에 세운 동대문은 이렇게 구실 한 번 못해보고 적의 통로가 되었다. 이런 아픔을 잊었는지 동대문은 겸재의 그림 속 모습과 같은 모습으로 오늘도 거기 서 있다. 엊그제 찬바람 속에 동대문에 다시 갔다. 안동 백성, 성주 백성을 생각했다. 그때의 지도층을 생각하면서 분노를 삼켰다. 형편없는 인간들….

 

<이야기 길에의 초대>: 2016년 CNB미디어에서 ‘이야기가 있는 길’ 시리즈 제1권(사진)을 펴낸 바 있는 이한성 교수의 이야기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달 마지막 토요일에 3~4시간 이 교수가 그 동안 연재했던 이야기 길을 함께 걷습니다. 회비는 없으며 걷는 속도는 다소 느리게 진행합니다. 참여하실 분은 문자로 신청하시면 됩니다. 간사 연락처 010-2730-77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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