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NB저널 = 김금영 기자) 이것도 특별한 인연인가 싶다. 이원희 작가를 만나기로 한 날, 좀처럼 내리지 않던 눈이 온 세상을 덮었다. 노화랑에서 작가의 전시가 시작된 이래 벌써 두 번째로 내리는 눈이다. 이에 노승진 노화랑 대표는 “삭막하던 풍경에 눈을 몰고 온 신비한 작가”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작가를 만난 전시장도 그가 그린 설경으로 가득했다. 회색빛 도시를 새하얗게 감싸 안은 설경이 전시장 안과 밖에서 눈부시게 빛났다. 마음이 정화되는 기분.
작가를 처음 만난 곳도 노화랑이었다. 2016년 그는 설경을 담은 풍경화 작업을 선보였다. 이후 지난해 여름 인사아트센터에서 열린 ‘2019 아트바캉스: 스타 작가와 함께’전에서는 초상화 작업들을 선보였다. 그리고 다시 노화랑에서 만난 작가는 처음 만났을 때처럼 풍경화 작업을 들고 나왔다. 풍경화와의 재회가 사뭇 반갑다. 하지만 이에 작가는 “나는 그리고 싶은 것을 그려왔을 뿐”이라고 답했다.
작가는 초상화와 풍경화의 대가로 알려졌다. 장르적으로 초상화와 풍경화는 다른 것으로 구분되지만, 작가에게는 이 구분보다 중요한 게 ‘그리고 싶은 마음’이란다. 그는 “천장화 ‘천지창조’로 유명한 미켈란젤로는 원래 조각가였다. 미켈란젤로뿐 아니라 다빈치 등 많은 작가들이 한 장르에만 천착하지 않고 그림, 조각 등 다양한 시각 예술을 시도했다”며 “한국 미술계는 그림, 조각, 설치 또 그 안에서도 풍경화, 단색화 등 한 분야에만 몰두해야 하는 것처럼 가치관이 보편화돼 있는데 이런 제약 안에서 그림을 그리기보다는 자유롭게 예술 활동을 하고 싶은 게 내 솔직한 바람”이라고 말했다.
애초에 작가가 풍경화를 시작한 것도 거창한 이유에서가 아니라 마음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작가는 “어렸을 때 시골에서 통학하면서 매일 봤던 게 자연이 변하는 풍경이었다. 아침 이른 시간에 보는 풍경과 학교가 끝나고 노을이 질 무렵 보이는 풍경은 매순간 각각의 아름다움을 드러냈다. 정말 아름다워서 그리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들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풍경화를 그리기 시작하면서 작가에게 생긴 습관이 있다. 직접 발품을 팔면서 풍경 사진을 찍고 스케치하는 것. 작가의 그림 속 풍경들은 모두 실존하는 곳으로, 직접 가본 곳들이기도 하다. 직접 가보지 않은 곳을 상상해서 또는 사진만 보고 그리지 않는다. “직접 어떤 풍경을 마주했을 때 내가 느낀 감동을 꾸며내거나 지어낼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게 이유다. 설악산은 1년에 10번도 넘게 왔다 갔다 한, 이제는 너무도 친숙해진 곳이고 국내뿐 아니라 해외의 설경도 보러 다닌다.
이것은 겸재 정선의 정신을 이어받은 것이기도 하다는 게 작가의 설명이다. 그는 “겸재 정선과 단원 김홍도의 진경산수화는 지금 봐도 큰 감동을 준다. 겸재와 단원은 직접 스케치 여행을 다니며 우리나라의 정말 좋은 풍경들을 화폭에 남겨 놓았다”며 “부암동 쪽에 이사한 이유도 겸재의 마음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인왕제색도’를 보고 ‘겸재는 인왕산을 그릴 때 어떤 느낌이었을까?’ 궁금했고 인왕산을 매일 보면서 살고 싶어 이사했다. 이제 아침에 눈을 뜨면 저 멀리 인왕산뿐 아니라 북한산 풍경까지 보인다. 굉장히 아름답다”고 말했다.
눈을 몰고 온 이원희 작가의 붓끝 맛
특히 시간이 지날수록 설경이 더욱 마음에 들어온다고 한다. 작가는 “세상에 수많은 풍경이 있다. 젊었을 때는 햇살이 쨍쨍하고 아삭아삭한 공기가 느껴지는 풍경이 좋았다.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눈 오는 풍경이 좋더라”며 “설경은 상반된 감정을 동반한다. 눈이 오면 발밑이 질척거려 귀찮기도 하지만, 하늘에서 하얀 눈이 내려오는 풍경은 또 축복처럼 느껴진다. 세상사가 반드시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고, 상반된 것들이 공존한다는 것을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느끼는데 이 감정을 설경이 은유적으로 표현해주는 것 같다”고 말했다.
“오늘도 눈이 내리는데 그림을 그리고 싶었겠다”는 말에 작가는 바로 그날 아침에 찍었다는 설경 사진을 보여줬다. 백사실계곡을 돌다가 찍은 것으로 이미 스케치 작업까지 들어갔다고 한다. 이밖에 매일 아침 산책길 풍경을 기록한 사진들도 보여줬다.
이 풍경들을 그릴 생각에 설레어 하는 작가의 삶은 그림으로 가득했다. 계명대 미대 학장을 지낸 작가는 2017년 정년을 5년 앞두고 작업에 몰두하기 위해 교직을 떠났다. 작가는 “이제 완전히 그림이 내 삶의 중심이 됐다. 하루의 시작이 화실에 출근하는 것이다. 그리고 싶은 그림을 마음껏 그릴 수 있어 행복하다”며 웃었다.
이번 전시는 작가의 행복한 마음이 반영된 그림들로 가득한데 특히 눈길을 끄는 건 작품의 사이즈와 출품작 개수다. 주로 대작을 선보여 온 작가가 이번 ‘이원희 겨울풍경’전에 6호 크기의 소품 100점을 내놓은 것. 이는 노승진 대표의 제안이기도 했다.
작가는 “2008년부터 10년 동안 설악산, 안동, 정선 등의 설경을 스케치한 1만 컷 중 100여 개를 골라 유화로 채색한 6호 크기의 설경 소품 100점을 이번 전시에 선보인다”며 “작품은 보고 즐기는 면도 있지만 소유를 통해 삶의 질을 높이는 측면도 있다. 큰 작품은 큰 작품대로의 수요가 있고, 이번엔 소품 크기의 작품 소유를 원하는 애호가들을 위한 시도를 했다”고 말했다.
작가 또한 소품을 작업하며 즐거움을 느꼈다고 한다. 그는 “큰 그림을 주로 그리다가 작은 그림을 이번에 많이 그렸는데 내게도 좋은 시간이었다. 내 직관과 흥을 화면에 한꺼번에 쏟으며 집약적인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밀도도 잘 채워졌다”고 말했다.
그림을 그릴 때 직관을 쏟아 붓는 건 단지 겉만 담지 않고 그 속을 들여다보기 위해서다. 이는 풍경화나 초상화나 마찬가지다. 작가는 직접 돌아다니면서 보고 느낀 감동으로 풍경화를 그리고, 초상화를 그릴 때는 그림의 주인공이 될 상대방과 교류의 시간을 짧게라도 꼭 갖고 그 사람에 대해 어느 정도 알게 됐다고 판단이 섰을 때 그림을 그린다. “이런 노력은 당연하다”는 게 그의 말이다.
작가는 “진정 잘 그린 그림은 설명할 필요 없이 감동으로 다가온다. 이건 미술뿐 아니라 다른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다. 소프라노 조수미의 노래, 피아니스트 조성진의 연주를 들을 때도 머리로 분석하기보다는 가슴으로 감동이 바로 다가오지 않느냐”며 “여기엔 피나는 노력이 필요하다. 음악도 그림도 충분한 내공이 없으면 구멍이 생길 수밖에 없고 그러면 감동을 전할 수 없다. 잘 그린 그림엔 억지가 없다. 가슴부터 울리는 그림을 그려야겠다는 생각으로 항상 붓을 잡는다”고 말했다. 작가가 유화로 그린 설경에서 끈적끈적한 점성보다는 수묵 담채와도 같은 담백한 맛이 느껴지는 것 또한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어 온 노력의 결과다. 노승진 대표는 “작가의 그림에서는 오랜 노력의 결과인 붓끝 맛이 느껴진다”고 평했다.
작가는 과거 한 인터뷰에서 “설경, 봄 풍경, 유럽 풍경, 초상화, 누드화 각 100점씩 총 500점의 그림을 그리는 게 목표”라고 한 바 있다. 이번 전시에서 벌써 설경 100점은 채운 셈이다. 작가는 앞으로도 목표를 향해 묵묵히 그림에 천착할 생각이다.
스스로의 목표도 있지만 후배들을 위한 바람 또한 앞으로의 그림 인생에 담겼다. 작가는 “오랜 시간 그림을 그리면서 느낀 점이 있다. 현대미술이 중심 사조가 되면서 한국 미술계에 유행을 따라 한쪽 판으로만 쏠리는 경향이 있어 안타깝다. 이 가운데 후배들이 유행에 휩쓸리지 않고 진정 마음이 따라가는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굳건하게 토대를 잡아주고 싶다”며 “물론 여기엔 피나는 노력이 필요하다. 아무리 아이디어가 중요한 시대라고 해도 자신의 손끝에서 나오는 붓끝 맛이 없으면 소용없다. 언젠가 다가올 자신들의 시대를 위해 열심히 훈련하고 준비할 수 있도록 돕고 싶다. 내가 좋은 롤모델이 될 수 있다면 정말 기쁘겠다”고 말했다. 전시는 노화랑에서 2월 23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