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NB저널 = 이한성 동국대 교수) 겸재의 그림 따라 가는 목멱산(남산) 길에서 오늘은 인왕산 자락에서 바라본 그림 ‘필운상화(弼雲賞花)’와 고려대가 소장하고 있는 ‘백납병풍(百衲屛風)’ 속 목멱산을 떠올리며 가 보려 한다. 다행히 조선시대 마지막 모습을 알 수 있는 한성부지도(漢城府地圖)가 있고 1910년대 일제강점기 때 그린 지도가 있어 그 시절을 떠올리며 가 보기로 한다.
지하철 3호선 충무로역에서 하차, 1번 출구를 나서서 잠시 후 남산 방향으로 우회전한다. 이른바 필동인데 남산의 북록(北麓)을 바라보며 가는 길이다. 예전에는 남산의 냇물이 흘러내리던 아름다운 계곡이었다고 한다. 이제는 모두 복개되었고 하류로 내려가면서 수원이 말라 예부터 아래쪽은 마른내라 불렸다. 이제는 아래쪽 동네 인현동에 인쇄업이 성하다 보니 이 골짜기도 종이를 공급하는 지업(紙業)이 대부분을 점하는 업종이 되었고 간간히 인쇄소도 보인다. 매니어층이 많은 냉면집 OO면옥도 이 골목에 있다.
좌측 제일병원이 있는 동국대 후문의 북쪽은 묵정동(墨井洞)인데 동명 자료에 의하면 먹적골, 묵절골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 한다. 지금은 물론 절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가상의 인물이지만 이곳에 살던 유명한 인물이 있었다. 연암 박지원의 소설 ‘허생전(許生傳)’의 주인공 허생이다. 연암 특유의 재치 있는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許生居墨積洞 : 허생은 묵적골에 살았다.
直抵南山下 : 곧장 남산 밑에 이르면,
井上有古杏樹: 우물 위에 오래 된 은행나무가 서 있고,
柴扉向樹而開 : 사립문이 은행나무를 향하여 열렸는데,
草屋數間 : 두어 칸 초가는
不蔽風雨 : 비바람을 막지 못했다.
然許生好讀書 : 그러나 허생은 글 읽기만 좋아하고,
妻爲人縫刺以糊口 : 그의 처가 삯바느질을 해 입에 풀칠을 했다.
一日妻甚饑 : 하루는 그 처가 몹시 배가 고파서
泣曰 : 울먹이며 말했다.
子平生不赴擧 : 당신은 평생 과거에 나가지 않으니,
讀書何爲 : 글을 읽어 무엇 합니까?
許生笑曰 : 허생은 웃으며 대답했다.
吾讀書未熟 : 나는 아직 독서에 익숙하지 못하다오.
妻曰 : 처가 말하기를
不有工乎: 그럼 장인 일도 있잖아요?
生曰 : 허생이 이르기를
工未素學奈何 : 장인 일은 배우지 않았는데 어떻게 하겠소?
妻曰: 처가 이르기를
不有商乎: 장사도 있지 않나요?
生曰 : 허생이 이르기를
商無本錢奈何 : 장사는 밑천이 없는 걸 어떻게 하겠소?
其妻恚且罵曰 : 처는 성이 나서 꾸짖기를
晝夜讀書: 밤낮으로 글을 읽더니
只學奈何: 배운 게 단지 ‘어찌 하겠소?’란 말씀이오?
........................... ( 중략 )
7년째 글만 읽는 남편에게 지친 아내가 다그친다. 과연 허생은 어찌했을까?
이야기를 간추려 보자.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허생은 탄식을 하며 집을 나선다.
그는 한양에서 제일 부자라는 변 씨를 찾아가, 돈 1만 냥을 꾼다. 그리고는 안성에 내려가 과일 장사를 하여 큰돈을 벌었고, 제주도에 들어가 말총 장사를 하여 더 큰돈을 벌었다. 그의 장사 방법은 요즈음 말로 표현하면 매점매석이었다.
그 뒤 그는 무인도 하나를 얻어 변산의 도둑들을 설득하여 각기 소 한 필, 여자 한 사람씩을 데려오게 하여 같이 무인도로 들어가 농사를 지었는데, 3년 동안 지어서 먹고 남은 농작물을 흉년이 든 지방에 팔아 또 돈을 번다.
그는 섬 사람들을 모아 놓고 뒷일을 부탁한 뒤 육지로 돌아온다.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였고, 남은 돈으로 변 씨에게 빌린 돈의 두 배로 빚을 갚는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영영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이런 묵적골은 일제 강점기 때 신정(新町: 신마찌)의 일부가 되었는데 신정(新町) 지역은 일제 강점기에 유곽(遊廓)이 번성한 지역이기도 했으니 허생이 알았더라면 기절초풍을 했을 일이다.
남산 딸각발이가 글 읽던 묵적골이
일제 땐 신마찌가 됐으니
이제 길을 따라 남산을 바라보며 간다. 좌측으로는 동국대 후문 방향이니 이미 소개한 동악 이안눌의 시단(詩壇)이 있던 곳이다. 남산 쪽으로 조금 더 내려가는 곳에 중구청 자료에 의하면 풍광빌라 뒤로 조선시대의 절 남산사(南山寺: 필동로 6길 17) 터가 있다 하는데 개인 소유 땅이라서 울타리를 쳐 놓아 절터로 갈 수 없으니 아쉽다.
남산을 향해 필동 길을 더 내려가면 푸른마을(필동 134-2)이라는 빌라를 만난다. 거의 길의 끝 부근이다. 경비실 앞을 지나 이 빌라 마당으로 들어서면 마당 끝 암벽 위에 반가운 각자(刻字)를 만난다. 趙氏老基(조씨노기). 조씨가 살던 옛 터전이라는 뜻을 쓴 것이리라. 도대체 어떤 조 씨가 살았기에 훗날 이런 글자가 새겨진 것일까? 궁금증은 잠시 미루고 남산을 향해 이 길의 끝까지 나아가 보자. 전회에 소개했던 ‘노인정터’ 안내석과 길 반대편 연합유통(필동6길 22) 건물 뒤편에 있는 각자를 다시 만난다. 알아볼 수 없는 각자를 다행히 탁본을 뜨고 읽어낸 연구자의 노고에 감사하며 바위에 새겨진 글을 여기에 옮겨 읽어 본다.
先人種德地 : 선인이 덕의 씨앗 뿌린 땅
荒廢幾多年 : 황폐하기 몇 년이던가
襟帶雙溪合 ; 두 개울 모이는 곳에
煙霞一局圓 ; 안개와 노을이 둥글게 감쌌네
胡爲損白璧 : 어찌 소중한 곳 잃고서
終愧失靑氈 ; 끝내 푸른 터전 잃고 부끄러워하네
是有堂構責 ; 여기 집을 지을 책임 있으니
吾將結數椽 ; 장차 석가래 몇 개 엮으리라
鹿翁(녹옹)
과연 누가 이곳에 이런 오언율시(五言律詩)를 남긴 것일까? 한경지략(漢京識略)에는 묵사동(墨寺洞)을 설명하면서 이곳에 대한 힌트를 주는 구절이 있다.
有趙豊原顯命歸鹿亭遺址 豊原嘗以靑絲繫鹿於亭下卽共挽鹿車歸鄕里志也.
묵사동에는 풍원 조현명의 귀록정 유지가 있다. 풍원은 일찍이 푸른 실로 정자 아래에 사슴을 묶어 놓았는데 이는 곧 사슴이 끄는 수레를 함께 끌고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이곳은 귀록정 옛터로 조문명, 조현명 형제가 살던 곳이다. 조문명은 아호가 학암(鶴岩)이다. 문과에 급제하고 대제학을 역임했으며 1728년(영조 4년) 이인좌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풍릉군 작위를 받았다. 1730년(영조 6년)에는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까지 올랐다. 10년 아래 아우 조현명은 아호가 귀록(歸鹿)으로 문과에 급제하고 역시 이인좌의 난을 진압한 공으로 풍원군에 책봉되었다. 1750년(영조 26년) 영의정에 올라 균역법 제정을 통괄하였다.
아우 조현명은 우리가 이미 옥동척강도(玉洞陟崗)를 설명할 때 만났던 인물로 그 그림에 맨 앞장에 서서 산길을 오르던 이였다. 앞서 읽었던 조씨노기(趙氏老基) 각자도 이들 형제가 살던 곳임을 알리는 각자임에 틀림이 없다.
조현명, 그의 흔적은 도봉산에서 방학동으로 내려오는 물가에도 남아 있다. 귀록계산(歸鹿溪山). 훌륭한 재상으로 소문난 형제이지만 귀록은 몸도 상당히 건강했던 이였던 것 같다. 귀록집(歸鹿集)에 실려 있는 그의 시 한 편 읽고 가자. 정신도 건강했던 이였음이 읽혀진다.
淸樽自酌一琴鳴: 맑은 술 자작하며 거문고 소리 듣네
歸鹿亭前月正明: 귀록정 앞 달 정녕 밝은데
醉暫成眠眠更覺: 취해 잠시 졸다가 졸음에서 깼더니
宮聲已歇羽聲生: 궁(宮) 음은 끝나고 우(羽) 음으로 접어드네
산타클로스도 아니면서 사슴이 끄는 수레 타고 고향으로 가고 싶어한 사람 귀록(歸鹿). 귀록정에 앉아 자작(自酌)하며 한 잔 하다 깜박 졸았더니 벌써 궁(宮) 음은 끝나고 궁상각치우(宮商角徵羽)의 우(羽) 음으로 접어들었다. 제목은 ‘즉사(卽事)’인데 눈앞에서 일어나는 일을 편안히 쓰는 경우 붙이는 제목이다. 눈으로 마음으로 보는 스케치쯤 되는 제목이랄까. 운(韻)도 평성(平聲) 경(庚) 운으로 유려하게 시(詩)가 흐른다.
부동 → 붓동 → 필동 된 내력
이제 다음 계곡수가 흐르던 한옥마을 골짜기로 이동하려 한다. 나무층계를 올라 남산둘레길로 이동하는 것이 제일 편한 코스이지만 올라왔던 필동길을 다시 내려가려 한다. 동평관 터를 찾아보려 함이다. 동평관은 일본 사신이나 일본에서 오는 손님들이 머물던 곳이다. 가슴 아픈 일이지만 남산은 근년에 두 번의 큰 고통을 겪었다. 그 탓에 평화로운 명승지 목멱산은 목멱상화(木覓賞花: 남산 꽃구경)도, 남산팔영(南山八詠)도, 청학동(靑鶴洞)도 모두 어둠 속에 갇혔다. 하나는, 일제강점기 일본의 조선 침략 거점이 남산 주변에 자리잡았다는 점이다. 통감부, 총독부, 경무총감부, 헌병대본부, 군사령부 등이 그것이다. 두 번째는 군사정권 시절 정권 수호에 앞장선 중앙정보부가 남산에 똬리를 틀었기 때문이다.
지명 사전에 따르면, 필동이라는 동명은 이 마을에 조선시대 한성부 5부 중 하나인 남부의 부청이 있어 부동(部洞)이라 하였는데, 부동을 붓동으로 읽으면서 붓골이라고 칭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를 한자명으로 표기하면서 붓 ‘筆’ 자로 잘못 표기한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 때 지도를 보면 필동이 일제강점기 때에는 대화정(大和町)이었음을 알게 한다. 잠시 위 지도를 통해 이 지역을 살펴보자. 1은 현재의 충무로역이며, 2는 동평관이 있던 곳이다. 3은 묵정동이며 허생전의 허생이 살던 곳이다. 4는 조선시대와 일제시대에 있었던 남산사 터, 5는 조씨노기(趙氏老基) 터, 6은 귀록정 터, 7은 노인정 터, 8은 헌병대본부와 경무총감부 터, 9는 녹천정 터, 10은 통감부 후에 총독부 자리이다.
일본이 남산에 집중한 건 동평관 탓
일제가 조선을 침략하면서 남산 주변을 점하게 된 것은 필동의 북쪽 인현동에 동평관이 자리한 데 그 원인이 있다고 한다. 동평관의 옛터는 중구청 근처 덕수중학교 앞 인현어린이공원 자리에 해당한다. 동평관은 태종 때 세워졌다. 태종의 두 처남 민무구와 무질은 어린 세자 양녕대군을 등에 업고 국법을 어기는 행위를 해서 유배 길에 올랐다. 이때 그들의 집을 헐어 그 자재로 동평관과 서평관을 지었다. 태종9년 기축(1409) 2월 실록에는 이때의 기록이 있다.
민무구와 민무질의 서울에 있는 집을 헐어서 그 재목과 기와로 동평관(東平館)과 서평관(西平館)을 짓고, 그 값을 주도록 명하였다.
命撤無咎, 無疾京家材瓦, 作東西平館, 給其價.
동평관(東平館)과 서평관(西平館) 두 개를 지은 이유는 처음에 일본의 왜구(倭寇)에 대해서 회유(懷柔) 정책을 취하여 수많은 왜객(倭客)이 왕래하였기 때문에 동-서평관(東西平館) 둘을 두었었으나 세종조에 이르러 왜구(倭寇)가 어느 정도 진압되어 왜사(倭使)의 왕래가 억제되자, 서평관(西平館)은 폐지하고 동평관(東平館)만 남겨 두었다.
이제 남산골 한옥마을로 발걸음을 옮긴다. 충무로역 3, 4번 출구를 이용하면 접근성이 좋다. 예전부터 남산의 명소 청학동(靑鶴洞)은 이 주변 지역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한 역사지리 책에는 한결같이 청학동 이야기만 나오면 중종 때 정승을 지낸 청학도인 용재(容齋) 이행(李荇, 1478~1534)의 서옥(書屋)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 일예로 한경지략을 보자.
靑鶴洞: 在木覓山 舊有右議政李荇書屋 大明 唐皐有題李荇書屋詩 又有大明使道詩
청학동: 목멱산에 있는데 옛날에 우의정 이행의 서옥(書屋: 서재로 쓰는 집)이 있었다. 명나라 당고가 이행의 서옥에 대해 쓴 시가 있고, 또 명나라 사도의 시도 있다.
사도(史道)의 시를 한 번 읽는다.
“푸른 학 어느 해에 동문(洞門) 열었나,
도인이 이곳 찾아 좋은 집 지었네.
자줏빛 언덕 붉은 절벽에 샘물 소리 섞였고,
푸른 전나무와 소나무에 새소리 끊이지 않네.
마음은 성현을 짝지어 세월 가는 줄 모르고,
손으로 고금의 책 뒤지며 근원을 연구한
동국(東國)에 좋은 경치 많은 줄 내 알고 있지만,
한 번 가서 옥 술병 기울여 볼 길 없네.”
(원문은 위 원전 사진으로 대신함)
또 많은 자료에는 이곳 둔덕 바위 위에 ‘청학동이상국용재서사유지(靑鶴洞李相國容齋書舍遺址)’라 새긴 암각 글씨가 있다는데 안타깝게도 필자는 이 각자를 찾지 못했다.
한옥마을에는 4채의 조선말 대표적 한옥이 옮겨오고 1채는 재현되었다. 삼각동 도편수 이승업 가옥, 삼청동 오위장 김춘영 가옥, 관훈동 민씨 가옥, 제기동 해풍부원군 윤택영 재실은 옮겨 왔고, 재현한 옥인동 윤씨 가옥 등 5채의 단아한 한옥이 자리 잡고 있다.
옥인동 윤씨 가옥은 벽수산장 내에 있는 윤씨 가옥이다. 한옥으로 가는 앞마당에는 옛 정자 천우각(泉雨閣)을 복원해 놓았다. 상당한 규모로 그 앞으로는 청학지(靑鶴池)라는 연못도 팠다.
‘동국여지비고’에는 이곳에 있던 천우각을 소개하고 있는데 금위영(禁衛營)의 남별영 안에 있다 했고, 시냇물에 걸쳐 집을 지어서 여름철 피서에 좋다고 했다. 석벽에 아계(丫溪) 두 글자를 새겼다고 했으나 이제는 찾을 수가 없다. 가랑머리 스타일로 합수하는 물길이 있었나 보다.
이희승 학덕비가 이곳에 있는 이유
경계 내를 다니다 보면 관심 가는 몇몇 대상을 만날 수 있다. 우선 눈에 띄는 것이 서울천년 타임캡슐 광장을 알리는 자연석 비석이다. 그런데 보니 생각난다. 한 20년쯤 전이던가, 서울 정도 600년을 기념해서 우리 시대의 기록과 용품들은 서울 정도 1000년이 되는 해에 우리 후손들이 파 볼 수 있도록 묻은 행사가 있었다. 그때가 2394년 11월 29일이란다.
또 하나 무심히 보면 그냥 지나칠 기념비도 있다. ‘일석 이희승 선생 학덕추모비(一石李熙昇先生學德追慕碑)’다. 후학들이 세운 것인데 왜 이곳에 일석 선생 학덕 추모비가 있는 것일까? 생각해 보면 남산골 샌님에 대해 쓰신 수필 ‘딸깍발이’가 이곳 남산골과 관계가 있어 여기에 세운 듯하다. 술도 한 잔 하고 기방(妓房)에도 다니고 소설에 러브스토리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진사(進士)와는 달리 깐깐하고 융통성 없는 샌님(生員님)인데다가 허생전의 허생이 보여 주듯 벼슬 못해 가난하니 원칙과 지조로 살던 남산골 샌님을 잘도 표현하신 선생의 수필이었다.
이 경내에는 또 하나 작은 비석이 있다. ‘수도경비사령부 터’였음을 알리는 표지석이다. 수경사 이전에는 여기에 무엇이 있었을까? 1910년 조선을 합병한 경술국치를 지나면서 일제는 남산 주변에 조선 통치를 위한 조직들을 하나씩 주둔시키기 시작한다. 이곳 아름다운 청학동은 일본군 헌병대본부가 자리하여 총독부의 총칼이 되었다. 기미년 독립운동이 일어나 만세 행렬이 본정(本町)을 거쳐 그때까지는 남산에 있던 총독부를 향해가니 일제의 헌병대는 무자비하게 시위대를 살상하였다. 청학동은 일제의 헌병대 본부, 군사정권의 수도경비사령부를 거쳐 근년에야 간신히 한옥마을이란 이름을 통해서 시민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옛 청학동의 모습을 기억할 수 있는 이들도 없으니 남산골이 과연 그 청학동 맞는지 모르겠구나.
고생 많으셨오 청학동, 이제 잘 지내 봅시다.
<이야기 길에의 초대>: 2016년 CNB미디어에서 ‘이야기가 있는 길’ 시리즈 제1권(사진)을 펴낸 바 있는 이한성 교수의 이야기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달 마지막 토요일에 3~4시간 이 교수가 그 동안 연재했던 이야기 길을 함께 걷습니다. 회비는 없으며 걷는 속도는 다소 느리게 진행합니다. 참여하실 분은 문자로 신청하시면 됩니다. 간사 연락처 010-2730-77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