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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 그림 길 (78) 연강임술첩 ②] 존재한 적 없는 ‘소동파 적벽’ 읊고 칭송한 조선 문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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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701호 이한성 옛길 답사가⁄ 2021.06.14 11:36:33

(문화경제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우리 땅에는 적벽(赤壁)이라고 이름 붙은 물가 절벽이 참 많다. 자존심 상하는 일이지만 송나라 소동파(蘇東坡, 본명 蘇軾)의 적벽부(赤壁賦)에서 받은 영향이 그만큼 컸기 때문이다. 소동파의 삼부자(三父子: 蘇洵, 蘇軾, 蘇轍)는 글을 잘해서 이른바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에 드는 문장가들이었다. 이들이 얼마나 부러웠으면 삼국사기(三國史記)의 저자 김부식의 아버지는 아들 이름을 부식(富軾), 부철(富轍)로 지었겠는가. 이런 소동파는 고려를 아주 싫어한 인물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한반도 땅 지식인들은 소동파 마니아들이었다. 그는 개혁 정치를 추구하던 왕안석과 대립하는 자리에 섰으며 급기야는 필화 사건으로 장강(長江, 양자강) 아래 호북성(湖北省) 황주(黃州, 현 黃岡)로 유배되었다.

이곳 생활 중 1082년 7월 16일(旣望)과 10월 15일(望)에 각각 장강에 배 띄우고 뱃놀이한 감상과 정황을 글로 남겼는데 이를 전적벽부(前赤壁賦)와 후적벽부(後赤壁賦)라 한다. 이 적벽부는 송(宋), 원(元)을 거쳐 명(明), 청(淸)으로 이어졌고 적벽부를 테마로 한 그림들이 그려졌다. 그만큼 중국에서도 소동파는 인기가 있었다. 그 결과 소동파가 만들어 먹었다는 동파육(東坡肉)도 있고 요즈음 황강 시에서는 동파병(東坡餠)도 등장하였다.
 

소동파의 적벽이 있었다는 지역의 현재 지도. 적벽은 어디에 있을까?
‘동파병’도 만들어 판다.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한반도에 숱하게 탄생한 ‘소동파 아류들’

고려 때에는 과거에 급제한 관원들의 시풍은 거의가 소동파 풍이었다 한다. 오죽했으면 33명의 급제자를 냈는데 과거가 끝나면 30명의 동파가 탄생했다는 말이 나왔다 한다. 조선도 예외는 아니었다. 주희(朱熹)의 무이구곡가(武夷九曲歌)에서 비롯한 구곡문화(九曲文化)와 소수(瀟水), 상수(湘水)의 팔경을 꿈꾼 팔경문화(八景文化)와 함께 적벽문화(赤壁文化)도 조선 양반 사회의 대표 문화로 자리 잡았다. 그들은 보름날 달이 뜨면 뱃놀이를 하고 싶어했고 더욱이 7월, 10월 보름이면 적벽부를 잊지 못했다. 그림도 그리고 시구마다 소선(蘇仙: 소동파를 신선시하여 부른 이름)을 떠올리고 적벽을 그리워했다. 오래전 그림으로 안견의 그림으로 여겨지는 적벽도부터 겸재, 기야 이방운(李肪運), 조석진 등등 적벽을 테마로 한 그림들이 전해진다. 그림뿐만이 아니다. 동문선을 비롯한 문집들에는 동파의 뱃놀이를 따라 한 후 쓴 글들이 전해진다.

 

적벽도. 조선 전기, 작가 미상. 안견의 작품이라는 의견이 있다. 

언젠가 잠두봉을 소개할 때 이야기했듯이 마포와 잠두봉도 적벽부를 따라 하기에 좋은 장소였다. 1502년(연산 8년)에는 이행, 남곤, 박은이 7월 기망(16일)과 10월 보름에 잠두봉(蠶頭峰) 아래에서 뱃놀이하며 잠두록과 후잠두록을 남겼다. 물론 적벽부와 후적벽부를 따라 한 것이다. 번암 채재공도 임술년에 마포에서 배 띄우고 이 같은 뱃놀이를 하였다. 참고로 긴 시(詩) 중 앞 꼭지만 보자.
 

동파적벽에는 후적벽부를 새겨놓은 바위가 있다.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임술년(1742, 영조18) 7월 16일 마포에 배를 띄우다(壬戌七月旣望 泛舟麻浦)

적벽이 천하에서 으뜸도 아니거니 赤壁未必天下奇
세상에 가을 달빛 어찌 한량 있겠는가 世間何限秋月色
그런데도 임술이라 칠월이 유명한 건 壬戌七月最藉甚
소선이 적벽에서 노닐었기 때문일 터 以有蘇仙遊赤壁
육백 년이 지난 지금 바다 건너 조선에서 六百年後東海外
오늘 밤을 만난 것을 모두 기뻐하는데 濟也踴躍逢今夕
마포의 작은 배가 내 손에 떨어져서 麻浦輕舟落吾手
고니보다 신속하게 달려가서 취하였네 策馬一取迅於鵠
(기존 번역 전재)

 

이방운 작 적벽부도.
조석진 작 적벽야유.
중국의 적벽도. (자료사진)

왜 이들은 적벽부를 그리도 좋아한 것일까?

연강임술첩(漣江壬戌帖)을 탄생시킨 후적벽부(後赤壁賦)를 한번 보자.

後赤壁賦

是歲。十月之望。步自雪堂。將歸於臨皋。二客從予。過黃泥之阪。霜露既降。木葉盡脫。人影在地。仰見明月。顧而樂之。行歌相答。

已而歎曰。有客無酒。有酒無肴。月白風清。如此良夜何。客曰。今者薄暮。舉網得魚。巨口細鱗。狀似松江之鱸。顧安所得酒乎。歸而謀諸婦。婦曰。我有斗酒。藏之久矣。以待子不時須。

於是攜酒與魚。復游於赤壁之下。江流。有聲斷岸千尺。山高月小。水落石出。曾日月之幾何。而江山。不可復識矣。

予乃攝衣而上。覆巉巖。披蒙茸。踞虎豹。登虯龍。攀栖鶻之危巢。俯馮夷之幽宮。蓋二客。不能從焉。畫然長嘯 草木震動 山鳴谷應 風起水涌 予亦悄然而悲 肅然而恐 凜乎其不可留也

反而登舟。放乎中流。聽其所止而終焉。時將夜半。四顧寂寥。適有孤鶴。橫江東來。翅如車輪。元裳縞衣。戛然長鳴。掠予舟而西也。

須臾客去。予亦就睡。夢一道士。羽衣蹁躚。過臨皋之下。揖予而言曰。赤壁之遊樂乎。問其姓名。俛而不答。嗚呼噫嘻。我知之矣。疇昔之夜。飛鳴而過我者。非子也耶。道士顧笑。予亦驚寤。開戶視之。不見其處。

그해(1082년) 시월 보름에 설당(雪堂)에서 걸어 나와 임고정(臨皐亭)으로 돌아가려는데 두 손님이 나를 따라 왔다. 황니(黃泥) 고개를 지나는데 이미 서리와 이슬이 내려 나뭇잎은 모두 지고 사람의 그림자가 땅에 비치고 있기에 고개를 들어 밝은 달을 바라보았다. 주위를 돌아보고 즐거워하며 걸어가면서 노래 불러 화답하는데 잠시 후 나의 탄식은, “객은 있는데 술이 없고 술이 있는데 안주가 없으니 달 밝고 바람 맑아도 이 같은 좋은 밤을 어찌 보내야 하나”였다. 객이 말하기를, “오늘 해 질 무렵에 그물로 고기를 잡았는데 입이 크고 비늘이 가는 것이 꼭 송강(松江)의 농어 같이 생겼소. 살피건대, 술은 어디서 구한단 말입니까?” 집에 돌아가 아내와 상의했더니 아내가 말하기를, “제게 술 한 말이 있는데 저장해 둔 지 오래된 것입니다. 당신이 갑자기 찾을 것에 대비하여 둔 것입니다” 했다.

이에 술과 고기를 가지고 다시 적벽 아래에 가서 놀았으니 흐르는 강물은 소리를 내고 깎아지른 언덕은 천척(千尺)이나 되었다. 산이 높아 달은 작은데 강물이 떨어져 돌들이 드러나 있었다. 일찍이 세월이 얼마나 지나서 강산을 다시 알아볼 수 없단 말인가? 나는 옷을 걷고 올라가서 깎아지를 듯 높이 솟은 바위를 밟으며 무성히 자란 풀숲을 헤치고 호랑이나 표범 모양의 바위에 걸터앉기도 하고 뱀이나 용같이 구부러진 나무에 올라 매가 사는 높이 솟은 둥지를 잡아보고 풍이(馮夷: 水神)의 궁전이 있는 깊은 물 속도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두 객은 나를 따르지 못하였다. 휘~익 긴 휘파람 소리가 나더니 풀과 나무가 흔들리고 산이 울고 골짜기에 메아리치며 바람이 일고 강물이 솟구쳤다. 나 또한 쓸쓸한 기분이 들다가 슬퍼지고, 숙연한 기분이 들다가 두려워져 더 이상 머무를 수 없었다.

돌아와 배에 올라 강 가운데에서 물 흐르는 대로 내맡겨 배가 멈추는 곳을 알아 멈추게 하였다. 때는 거의 한밤이 되었다. 사방을 보니 적막한데 마침 외로운 학 한 마리가 강을 가로질러 동쪽에서 날아오는데 날개는 수레바퀴처럼 크고 검정 치마 흰 저고리 입은 듯한데 끼륵끼륵 길게 소리 내어 울며 우리 배를 스쳐서 서쪽으로 날아갔다.

잠시 후에 객은 돌아가고 나도 잠이 들었다. 꿈에 한 도사가 새털로 만든 옷을 펄럭이며 날아서 임고정(臨皋亭) 아래를 지나와 내게 읍하여 말하기를, “적벽의 놀이가 즐거웠소?” 했다. 내가 그의 성명을 물으니 머리를 숙인 채 대답하지 않았다. 아, 나는 알겠노라. 지난밤에 울면서 나를 스쳐 날아간 것이 바로 그대가 아니오? 도사는 고개를 돌리며 웃었다. 나도 또한 놀라 잠에서 깨어나 문을 열고 내다보았으나 그가 간 곳을 찾아볼 수 없었다.


조선 시대의 사대부들도 상당한 스트레스가 있었던 것 같다. 적벽부의 본질은 현실 세계와 떨어진 달밤의 뱃놀이와 신선(神仙) 같은 도교적 흐름이다. 그들도 당쟁의 팽팽한 대립에서 어딘가 은일하게 일탈하고 싶었던 것 같다. 달밤, 뱃놀이, 술과 시와 그림. 그들이 꿈꾸는 한 순간의 일상탈출은 아니었을까.

 

적벽대전이 있었다는 현장.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

남자들은 중학생 때쯤 되면 나관중의 삼국지를 읽는다. 진수(陳壽, 233~297)의 정사 삼국지가 아닌 소설 삼국지이다. 나관중(羅貫中, 1330?~1400)의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인데 우리를 흥미진진한 세계로 이끈 전투 중에는 적벽대전이 있었다. 또 철이 들 즈음 소동파의 적벽부를 읽으면서 항시 적벽에 대한 궁금증이 자리 잡고 있었다. 몇 년 전 여름 휴가를 이용하여 적벽을 찾아 나섰다. 제갈량이 화공(火攻)으로 조조(曹操)를 공격했다는 적벽과 소동파의 적벽은 모두 장강의 남쪽에 자리 잡고 있는데 전혀 별개의 시(市)에 있었다. 중국 지도에서 보듯이 코로나 진원지로 여겨지고 있는 우한(武漢)에서 장강 상류 쪽 적벽(赤壁) 시에 제갈량의 적벽은 자리하고 있으며, 소동파의 적벽은 우한에서 장강 하류 황강(黃岡) 시에 자리 잡고 있었다. 두 도시는 모두 고속열차가 다니는 곳이라 큰 어려움 없이 갈 수 있는데 적벽은 역에서 가깝지 않은 곳에 있어 택시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두 곳 모두 공원화되어 있어 입장료도 내야 한다. 중국의 유적지나 관광지는 우리나라 고궁과는 달리 적지 않은 입장료를 내야 한다. 아마 우리나라 설악산쯤 되는 곳이면 입장료와 케이블카 요금을 합하여 5만 원쯤은 기본일 것이다.
 

동파적벽 길이 있는 황강의 기차역.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적벽 시 기차역.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이건 적벽 아니라 그냥 작은 바위 벼랑

우선 제갈량의 적벽공원은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인물들로 어색하게 꾸민 역사 공원이다. 필자의 관심은 오직 적벽, 그런데 마주한 장강(長江)가 적벽은 수십 년간 마음속에 두었던 그런 적벽이 아니라 적벽이라고 하기에는 붉지도 않은 작은 바위 벼랑에 지나지 않았다. 아, 무너진 기대여.

그래도 공원에 써 붙인 이백(李白)의 시 한 편이 전장의 그 날을 떠오르게 한다.

二龍爭戰決雌雄 두 용이 싸움에서 자웅을 결하는데
赤壁樓船掃地空 적벽루 배 하늘 땅을 쓸었네
烈火張天照云海 맹렬한 불 하늘로 뻗어 구름 바다 비치고
周瑜于此破曹公 주유는 이곳에서 조조를 격파했네

 

이백의 시 ‘적벽가 송별’을 새겨놓았다.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이 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적벽대전에서 싸운 것은 주유와 조조였다. 아쉽지만 제갈량이 하늘의 기운을 읽고 남동풍을 불러 방통의 연환계(連環計)로 화공을 펼쳤다는 이야기는 나관중의 창작이었던 모양이다. 후인도 시 한 수 읊었다.

赤壁鏖兵用火攻 적벽 큰 싸움에 화공을 쓰고자 하는
運籌決策盡皆同 계략과 방책이 모두 같았네
若非龐統連環計 만약 방통의 연환계 아니었다면
公瑾安能立大功 공(주유)이 어찌 큰 공을 이루었으리

 

동파적벽 안내석.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동파적벽 강.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동파적벽.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다음에 찾아간 곳은 황강(黃岡)의 동파적벽(東坡赤壁)이었다. 언덕 숲에 공원을 꾸미고 건물을 지어 소동파를 기념한 글과 초상화들을 꾸며 놓았다. 여기에서도 필자의 관심은 오직 적벽(赤壁). 중국 그림 화북산수(華北山水)나 황산산수(黃山山水), 계림산수(桂林山水)에 등장하는 우뚝한 산과 그 밑을 흐르는 장강수(長江水)…. 생각만 하여도 가슴 트이는 적벽이 있겠지.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소동파가 뱃놀이했다는 강(江)은 보이지 않는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정원의 연못. 물어 알게 된 사실은 장강(長江)의 물길이 바뀌고 육지화가 이루어져 강은 이곳에서 수(數) 킬로 밖이라 한다. 물길은 바뀌어도 소동파가 읊은 천길(千尺) 적벽이야 어디로 안 갔겠지…. 그런데 아무리 둘러 보아도 천 길(千尺)은 그만두고 백척(百尺)의 적벽도 보이지를 않는다.
 

동파적벽의 지질.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동파적벽 마을.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동파의 초상. ‘동파모’를 쓰고 있다. 

진정한 적벽은 한반도에 있었는데

그리고 산이 높아 달이 작고, 물이 떨어져 돌이 드러났다는(山高月小。水落石出) 높은 산, 깎아지를 듯 가파른 바위는 어디에 있는가? 결론적으로 만난 것은 작고 붉은 바위 벽이 전부였다. 아래가 토사에 묻혔다고 가정하더라도 소동파의 후적벽부에 묘사된 적벽은 과장이 아니라 허위 사실 유포에 해당하는 수준이었다. 필자도 그랬지만 소동파의 글을 믿고 적벽을 그린 적벽부도의 허망한 모습들이 애처롭다. 우리의 화순적벽, 임진강 주상절리는 진정한 적벽인 셈이다. 아마 조선의 많은 문인 화원들이 이곳에 와 보았다면 참 마음 쓸쓸했을 것이다. 이렇게 필자의 그 여름 적벽 여행은 쓸쓸히 끝났다. 그 적벽은 귀양살이 쓸쓸함을 달랜 동파(東坡)의 상상이 키워낸 적벽이었던 셈이다. (다음 회에 계속)

 

<이야기 길에의 초대>: 2016년 CNB미디어에서 ‘이야기가 있는 길’ 시리즈 제1권(사진)을 펴낸 바 있는 이한성 교수의 이야기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달 마지막 토요일에 3~4시간 이 교수가 그 동안 연재했던 이야기 길을 함께 걷습니다. 회비는 없으며 걷는 속도는 다소 느리게 진행합니다. 참여하실 분은 문자로 신청하시면 됩니다. 간사 연락처 010-2730-77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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