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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 그림 길 (87) 낙산사] 왕족이 태어나고 원효대사가 망신당한 낙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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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710호 이한성 옛길 답사가⁄ 2021.11.01 14:18:16

(문화경제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오늘은 겸재의 해악진경(海嶽眞景) 병풍 그림 속 낙산사를 찾아간다.

간성(杆城) 청간정에서 7번 국도를 타고 내려가는데, 걷는 이들이라면 동해를 곁에 두고 해파랑길을 걸어 내려가는 길이다. 속초를 지나 양양 땅에 들어서면 옛 지도에 물치시(沕淄市)라고 쓰여 있는 물치항을 지나고 머지않아 낙산사(洛山寺)에 닿는다.
양양(襄陽)은 지금은 강릉과 속초 사이 조그만 읍이지만 한때는 양양도호부(襄陽都護府)였다. 한양에서 이쪽을 가려면 산줄기를 넘어야 하는데 북쪽으로부터 오색령(五色嶺, 지금의 한계령), 박달령(朴達嶺, 또는 弼如嶺), 조침령(阻枕嶺), 구룡령(九龍嶺)이었다. 백두대간을 종주하는 이들이 종주길에 한 번쯤 쉬어가는 고갯길이다.

오색령과 구룡령은 찻길이 뚫려 포장도로가 된 지 오래고, 조침령은 터널이 뚫렸으니 이 길을 넘나들던 옛사람들이 알면 감회가 깊을 것이다. 포수들이 심심치 않게 다녔던 박달령은 아쉽게도 잊힌 고개가 되었다. 놀라운 것은 이들 고갯길을 버려두고 동계올림픽을 기화로 홍천, 내린천을 지나오는 다리 놓고, 터널 뚫은 고속도로가 뻥 뚫렸으니 이제 낙산사도 도시인들 손안의 거리 속으로 들어왔다. 바캉스철 고개 고개 넘어 오던 아득한 낙산사와 앞 해수욕장도 두 시간여 거리가 되었다. 의상대사께서 아시면 놀라실 것 같다.

 

낙산사 전경 자료사진.
단원 작 ‘낙산사’.

삼국유사(三國遺事) 탑상(塔像) 조에 보면 의상대사와 낙산사 창사(創寺) 스토리가 기재되어 있다.

옛날 의상법사(義湘法師)가 처음 당나라에서 돌아왔을 때, 관음보살의 진신이 이 해변의 굴에 산다는 말을 듣고 낙산(洛山)이라 이름 지었으니, 서역에 관세음보살이 산다는 보타낙가산(寶陁洛伽山)이 있기 때문이다. 이 산을 소백화(小白華)라고도 하는데, 백의대사(白衣大士)의 진신이 머물러 있는 곳이므로 이것을 빌어 이름을 삼은 것이다. 의상이 7일 동안 재계하고 앉았던 자리를 새벽 일찍 물 위에 띄웠더니 불법을 수호하는 용천팔부(龍天八部)의 시종들이 굴속으로 안내하였다. 공중을 향하여 예를 올리자, 수정 염주 한 꾸러미를 내주어서 이를 받아 나오는데, 동해의 용도 여의주 한 알을 바쳐서 이것도 같이 받아 나왔다. 다시 재계한 지 7일 만에 관음보살의 진신을 보았다. 관음이 말하였다.

 

겸재 작 ‘낙산사’.

내가 앉은 산꼭대기에 한 쌍의 대나무가 솟아날 것이니, 그 땅에 절을 짓는 것이 좋을 것이다.” 법사가 이 말을 듣고 굴에서 나오자, 과연 대나무가 땅에서 솟아 나왔다. 그래서 금당을 짓고 관음상을 만들어 모셨는데, 그 둥근 얼굴과 고운 모습이 엄연히 하늘에서 만들어 낸 듯하였다. 그때 대나무가 다시 없어졌다. 그제서야 관음의 진신이 머무른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의상은 이 절의 이름을 낙산사(洛山寺)라고 하고, 받아온 두 구슬을 성전에 모셔두고 떠났다.

그 뒤에 원효법사(元曉法師)가 와서 예를 올리려고 하였다. 처음에 남쪽 교외에 이르렀는데, 논 가운데서 흰옷을 입은 여자가 벼를 베고 있었다. 법사가 장난삼아 그 벼를 달라고 하자, 여자도 장난삼아 벼가 영글지 않았다고 대답하였다. 법사가 또 가다가 다리 밑에 이르자 한 여인이 월경 수건을 빨고 있었다. 법사가 물을 달라고 청하자 여인을 그 더러운 물을 떠서 바쳤다. 법사는 그 물을 엎질러버리고 다시 냇물을 떠서 마셨다. 이때 들 가운데 서 있는 소나무 위에서 파랑새 한 마리가 말하였다. “불성을 깨닫지 못한 중!”

그리고는 홀연히 숨어서 보이지 않았고, 다만 그 소나무 아래에 신발 한 짝이 떨어져 있었다. 법사가 절에 이르러 보니 관음보살상의 자리 밑에 또 아까 보았던 신발 한 짝이 있었다. 그제서야 원효법사는 전에 만났던 여자가 관음의 진신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소나무를 관음송(觀音松)이라고 하였다. 법사가 신성한 굴로 들어가 다시 관음의 진신을 보려고 하였지만 풍랑이 크게 일어나 들어가지 못하고 떠났다. (기존 번역 전재)

(昔義湘法師 始自唐來還 聞大悲眞身住此海邊窟內 故因名洛山 盖西域寶陁洛伽山 此云小白華 乃白衣大士眞身住處 故借此名之

齋戒七日 浮座具晨水上 龍天八部侍從 引入崛內 參禮空中 出水精念珠一貫給之 湘領受而退 東海龍亦獻如意寶珠一顆 師捧出 更齋七日 乃見眞容 謂曰 於座上山頂 雙竹湧生 當其地作殿宜矣 師聞之出崛 果有竹從地湧出 乃作金堂 塑像而安之 圓容麗質 儼若天生 其竹還沒 方知正是眞身住也 因名其寺曰洛山 師以所受二珠 鎭安于聖殿而去

後有元曉法師 繼踵而來 欲求瞻禮 初至於南郊 水田中 有一白衣女人刈稻 師戱請其禾 女以稻荒戱答之 又行至橋下 一女洗月水帛 師乞水 女酌其穢水獻之 師覆棄之 更酌川水而飮之 時野中松上 有一靑鳥 呼曰 休醍醐和尙 忽隱不現 其松下有一隻脫鞋 師旣到寺 觀音座下 又有前所見脫鞋一隻 方知前所遇聖女乃眞身也 故時人謂之觀音松 師欲入聖崛 更覩眞容 風浪大作 不得入而去)

이렇게 해서 의상대사가 이곳에 절을 세운 해가 서기 671년이라 한다. 아쉽게도 원효대사는 망신만 당하고 떠난 절이 낙산사인 셈이다. 유서 깊고 명망이 있는 데다가 풍광도 절경이니 예로부터 많은 이들이 들러 가는 곳이 되었다. 신라는 물론이었을 것이며 고려와 조선 시절에도 많은 이들이 들러 갔다. 선비는 시문(詩文)을 남겼고 화인(畵人)은 그림을 그렸다. 고려, 조선의 많은 시문이 남아 있으며 겸재, 단원을 비롯한 여러 화인의 그림도 전해진다.

이뿐 아니라 절은 중국에까지 소문이 났다. 고려사절요에는 헌종(獻宗) 원년(1095)에 송나라 사람들이 와서 낙산사 관음굴(지금의 홍련암)에 가 보기를 청한 기록이 전해진다.
 

관음굴 위에 자리 잡은 홍련암.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홍련암 내부.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송나라 상인 황충(黃冲) 등 31명이 자은종(慈恩宗) 중 혜진(惠珍)과 함께 왔으므로, 근신에게 맞이하여 보제사(普濟寺, 개성)에 머물도록 명하였다. 혜진이 자주 말하기를, “보타락산(普陁落山) 성굴(聖窟, 강원도 양양 낙산사의 관음굴)을 보고자 하여 왔다” 하며, 가보기를 청하는 것이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宋商,黃冲等三十一人,與慈恩宗僧惠珍,來,命近臣,迎置于普濟寺,珍,常曰,爲欲見普陁落山聖窟而來,請往觀之,不許)

임금들도 여러 인연을 맺었다. 동국여지승람에 전해지는 고려의 승려 익장의 기록(高麗僧益莊記)에는,

우리 태조(왕건)께서 나라를 세우시고, 봄가을에 사자(使者)를 보내 사흘 동안 재를 실시하여 치성하였고, 그 후에는 갑령(甲令; 제일 칙령)에 적어서 항규(恒規: 항상 시행하는 규칙)로 하였다(我太祖立國,春秋遣使設齋三日,以致敬焉。厥後書於甲令,以爲恒規).

이 글로 보면 고려 시대에는 왕명으로 봄가을 낙산사에서 치성을 지냈던 것을 알 수 있다.

고려사절요에는 공민왕의 기록도 전해진다.

9월에 왕이 낙산사(洛山寺)에 행차하니 낙산사는 신돈의 원찰(願刹)이다. 측근의 신하가 다투어 왕에게 아뢰기를, “금년에는 대풍이 들었습니다” 하니, 왕이 부처 앞에 꿇어앉아 말하기를, “제가 나라를 다스린 지 15년이 되었으나 수재, 한재가 많았는데, 금년의 풍작은 실로 첨의(僉議)가 음양을 고르게 다스린 데 연유한 것입니다” 하였다.

(九月,幸洛山寺,辛旽願刹也,左右爭言於王曰,今歲大稔,王,跪于佛曰,自不穀莅國,十有五年,水旱爲灾,今歲之稔,實由僉議之燮理也)

낙산사가 고려 조정에 중요한 절이었으며 신돈의 원찰이기도 한 절이었구나….

이성계의 할아버지를 잉태한 낙산 관음굴

조선과도 인연이 깊다. 조선왕조 태조실록을 보자.

익조(翼祖: 태조 이성계의 증조부)가 이곳(의주)에 거주한 지 수년(數年)이 되어도 아들이 없으므로 최씨(崔氏)와 함께 낙산(洛山)의 관음굴(觀音窟)에 기도했더니, 꿈에 한 납의(衲衣: 승복)를 입은 승려가 와서 고(告)하기를 “반드시 귀한 아들을 낳을 것이니 마땅히 이름은 선래(善來)라고 하십시오” 하였다. 얼마 안 가서 아이를 배어 과연 의주(宜州)에서 아들을 낳으니 이름을 선래(善來)라고 했는데, 이 분이 도조(度祖: 태조의 조부)이다. 관음굴(觀音窟: 홍련암)은 지금 강원도(江原道) 양양부(襄陽府)에 있다. 이때 익조가 안변(安邊)에 왕래하였는데, 간혹은 화주(和州: 함남 영흥)와 함주(咸州: 함남 함주군)에도 왕래하였다.

(居數歲無子, 與崔氏禱于洛山 觀音窟, 夜夢有一衲衣僧來告曰: “必生貴子, 當名以善來。” 未幾有娠, 果生子於宜州, 遂名曰善來, 是爲度祖。 窟在今江原道 襄陽府。 時翼祖往來安邊, 而亦或往來於和州、咸州)

이 글을 보면 태조 이성계는 관음굴(홍련암)에서 기도하여 낳은 할아버지의 자손이라 홍련암과 인연이 깊었다. 태조 1년 (1392) 11월에는 내탕고(內帑庫: 왕실 사비)를 내어 관음굴(觀音窟)에서 승려들을 공양(出內帑, 飯僧于觀音窟)하기도 하고, 왕위에서 물러난 뒤인 정종 1년(1399)에는 이곳에서 법회를 베풀기도 하였으니 자신의 탄생 근원지라 생각했던 듯하다.

태상왕이 낙산사(洛山寺)에 가서 능엄 법회(楞嚴法會)를 베풀고, 이튿날에 돌아왔다. (太上王如洛山寺, 設楞嚴法會, 翌日還)

그 이후로도 오대산과 낙산사 행차는 그치지 않았다.

 

해수관음보살.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이제 겸재의 낙산사도(洛山寺圖)를 보자. 겸재의 다른 그림들처럼 이미지를 극대화하여 그렸다. 오봉산(五峰山: 낙가산)은 도저히 오를 수 있는 산이 아닌 듯 수직에 가까운 경사도에 높다랗다. 바다로 면하는 면은 가파르지만 산은 나지막하여 그 정상에는 근년에 해수관음상을 모셔 놓았다. 건물 배치는 현재와는 많이 다르다. 2005년 화재 후 복원하는 과정에서 정조의 명으로 공무출장복명을 위해 그린 단원의 낙산사도를 베이스로 해 복원한 것이 현재의 낙산사이다.

 

낙산사 화재 당시. 자료사진

단원은 왕명 수행 그림을 그렸기에 극히 사실적인 그림을 그렸다. 반면 겸재는 전신(傳神)을 염두에 두고 그렸으니 사실적일 수는 없을 것이다. 우측 가파른 바위 위에는 홍련암이 위태롭게 자리 잡고 있다. 그 아래로는 관음굴을 그리고 물이 소용돌이치는 모습을 그려 놓았다. 절 건물 우측 언덕에는 세 선비가 담소하고 있고 사동 아이 한 명이 서 있다. 마치 신선 같구나. 견강부회식 상상을 동원하면 사천과 그 아우 순암 그리고 겸재의 모습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다. 겸재가 청하현감으로 왔을 때는 사천이 강원 감사, 아우 순암 병성(秉成)이 간성군수였으니 그런 생각을 해 보는 이들도 있다.

 

김유성이 그린 ‘낙산사’. 
김하종 작 ‘낙산사’.
김응환 작 ‘낙산사’.

비교를 위해 단원의 낙산사도, 서암 김유성의 시즈오까(靜岡) 청견사(淸見寺) 소장품 낙산사도, 김하종, 김응환의 낙산사도를 보자. 모두가 다르지만 공통점은 모두 일출(日出)을 그리고 있다. 낙산사의 의상대나 관음굴(홍련암)은 일출 보기 명소였기에 그림마다 해 뜨는 모습을 담았나 보다. 송강의 관동별곡도 낙산사에 와서 일출을 놓치지 않았다.

이화(梨花)는 벌써 지고 접동새 슬피 울 제
낙산(洛山) 동반(東畔)으로 의상대(義相臺)에 올라앉아
일출(日出)을 보리라 밤중만 일어나니
상운(詳雲)이 짚히는 듯 육룡(六龍)이 받치는 듯
바다를 떠날 때는 만국(萬國)이 일위터니
천중(天中)의 티쓰니 호발(毫髮)을 헤리로다
아마도 널구름 근처에 머물세라
시선(詩仙)은 어디 가고 해타(咳唾)만 남았느니
천지간(天地間) 장(壯)한 긔별 자셔히도 할셔이고

 

의상대.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이제 낙산사 경내를 살펴본다. 아름다운 홍예문(虹霓文, 강원 유형 문화재 33호)을 지나 사천왕문을 통과해 나아가면 낙산사의 본당인 원통보전(圓通寶殿)에 이른다. 보물 1362호 건칠관음보살(乾漆觀音菩薩)이 주불로 앉아 계시다. 장지에 옻칠로 조성한 고려 후기 전통양식의 관음상이다. 남해 보리암, 석모도 보문사와 함께 삼대 관음 신앙처인 관계로 대웅전이나 대적광전이 아닌 원통보전이 본당으로 관세음보살을 모신 것이다. 지난 2005년 화재로 한국전쟁 이후 세웠던 원통보전은 전소되고 새로 지었다.

 

낙산사의 서쪽 문 홍예문.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대성문 안쪽으로 칠층석탑이 보인다.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원통보전 앞마당에는 1467년 조성한 보물 499호 7층석탑이 서 있다. 세월에 옥개석 일부는 깨어졌으나 수정염주와 여의보주를 봉안한 낙산사의 보물이다. 겸재, 단원을 비롯한 옛 그림들에는 담장에 가렸는지 그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한국 담장의 원형이랄 만한 낙산사의 원장(담장).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한옥 담장의 전범이라 할 원통보전 원장

원통보전에서 또 하나 눈길을 끄는 것은 원장(垣墻, 담장)이다. 강원 유형문화재 34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세조가 낙산사를 중창할 때 쌓은 후 훼손되기도 했으나 우리나라 사찰 담장의 전범이 되고 있다. 사찰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한옥 담장의 원형은 이곳에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동쪽 바닷가 쪽으로 이동하면 바닷가 언덕에 해수관음보살이 동해를 마주하고 서 계시다. 필자도 새로 세운 당시 모습을 기억하고 있으니 근년에 세운 것이다.

 

해수관음공중사리탑 비.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그 아래 바닷가 언덕에는 1692년 조성한 해수관음공중사리탑이 서 있고 홍련암 가는 길에는 비(碑)가 서 있다. 보물 1723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1683년 홍련암 개금불사 중 공중에서 떨어진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봉안했다는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바닷가로 돌아나가면 바닷가 언덕 위 해송과 암벽과 동해와 일출이 어우러져 장관을 이루는 의상대(義湘臺)에 닿는다. 의상대사가 당(唐)에서 돌아와 낙산사를 지을 때부터 중시되던 곳이다. 송강의 관동별곡에서 보듯 모든 이들이 맞는 낙산일출(洛山日出)은 이곳 일출이라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요즈음에는 하도 사람들이 많아 멀리하지만 필자도 한때는 이곳에 와서 신년일출을 맞이한 한 해의 시작 장소이기도 하였다.

 

낙산사 방문객들이 적어 걸어 놓은 소원문들.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이제 찾아가는 곳은 홍련암(紅蓮庵)이다. 비록 건물은 강원문화재 자료 36호이지만 바닷가 동굴 위에 지어진 낙산사의 심장이다. 의상대사가 동굴 속으로 들어간 파랑새를 따라가 석굴 앞에서 기도하다가 붉은 연꽃 위 가늠을 친견했다는 전설을 간직한, 기도처 중 기도처이다. 홍련암 마룻바닥에는 작은 구멍이 있는데 이 구멍으로 내려다보면 석굴이 내려다보인다. 아마도 우리나라 보살들 마음에는 이곳에서 기도하면 꼭 한 가지 소원은 들어주시리라… 하는 믿음이 있는 곳이다. 그러기에 애절한 소원을 가진 이들이 항상 두 손 모으는 곳이다. 동국여지승람에 있는 이곳 이야기를 잠깐 보자.

고려 승려 익장(益莊)의 기문에, “양주(襄州) 동북쪽 강선역 남쪽 동리에 낙산사가 있다. 절 동쪽 두어 마장쯤 되는 큰 바닷가에 굴이 있는데, 높이는 1백 자 가량이고 크기는 곡식 1만 섬을 싣는 배라도 용납할 만하다. 그 밑에는 바닷물이 항상 드나들어서 측량할 수 없는 구렁이 되었는데, 세상에서는 관음대사(觀音大士)가 머물던 곳이라 한다. 굴 앞에서 오십 보쯤 되는 바다 복판에 돌이 있고, 돌 위에는 자리 하나를 펼 만한데 수면에 나왔다 잠겼다 한다. 옛적 신라 의상법사(義相法師)가 친히 불성(佛聖)의 모습을 보고자 하여 돌 위에서 전좌 배례(展坐拜禮)하였다. 27일이나 정성스럽게 하였으나 그래도 볼 수 없었으므로, 바다에 몸을 던졌더니, 동해 용왕이 돌 위로 붙들고 나왔다. 대성(大聖)이 곧바로 속에서 팔을 내밀어, 수정염주(水精念珠)를 주면서, “내 몸은 직접 볼 수 없다. 다만 굴 위에서 두 대나무가 솟아난 곳에 가면, 그곳이 나의 머리꼭지 위다. 거기에다 불전(佛殿)을 짓고 상설(像設)을 안배하라” 하였으며 용(龍) 또한 여의주와 옥을 바치는 것이었다. 대사는 구슬을 받고 그 말대로 가니 대나무 두 그루가 솟아 있었다. 그곳에다 불전을 창건하고 용이 바친 옥으로써 불상을 만들어서 봉안하였는바, 곧 이 절이다.

이제 낙산사 새로 지은 경내로 돌아 나온다. 동국여지승람에 소개된 고려적 시문(詩文)도 유자량, 안축, 김부의, 김극기가 있고 조선의 문집에는 낙산사, 관음굴을 읊은 시문이 끝도 없다. 한 수만 읽는다. 사천 이병연의 아우 순암 이병성이다. 이곳에 와 마음 한 자락 읊었다.

밤에 찾은 낙산사

아슬아슬 사다리 백 번 돌아 험산 올랐네. 십리길 절 밤 흥은 일고, 용궁에 달 지려 하니 이화원 스님들도 잠에 들겠지. 돌길 들자마자 운경(雲磬) 소리 들리고, 깊이 들어서는 향불 연기 속 등불이 보이네. 낙가산은 나그네 길 이끌고 아침이면 해뜨기만 기다리게 하네

夜尋洛山寺
危梯百轉上崚嶒。十里招提興夜乘。滄海廟中將落月。梨花院裏欲眠僧。初來石徑聞雲磬。深入煙蘿見佛燈。多少洛山呵導客。朝朝但候日輪昇。

이런 낙산사도 2005년 산불로 전소되었다. 홍련암을 비롯하여 간신히 몇몇 건물과 불보(佛寶)는 건졌지만 보물 낙산사 종(鐘)을 비롯하여 너무 많은 유산들이 사라졌다. 낙산사는 몽고침략, 임진왜란, 한국전쟁 등 전란으로 소실되고 산불로 소실되기 여러 번이었다. 승정원일기에는 이곳 산불 기사가 심심치 않게 실려 있다. 한두 기사만 보자.

인조 9년(1631) 4월 26일 강원 감사의 서목에는, “양양(襄陽)에서 이달 13일부터 시작하여 15일까지 맹풍(盲風)이 크게 불어 오봉산(五峯山) 뒤에서 저절로 큰불이 나는 바람에 낙산사(洛山寺) 및 민가와 해척가(海尺家) 등 모두 130여 채가 일시에 불탔습니다”.(江原監司書目, 襄陽呈, 本月十三日始, 十五日至, 盲風大作, 五峯山後, 大火自出, 洛山寺及民家·海尺家, 竝一百三十餘坐, 一時延燒事)

얼마 뒤 인조 21년(1643) 3월 26일 기사에는 더 정확한 기록이 보인다.

강원 감사의 장계에 양양(襄陽)에서 3월 2일에 큰바람이 갑자기 일어나 하늘이 흔들리고 땅이 진동하였는데, 기세가 사납고 괴이하여 100척 되는 소나무가 모조리 뿌리째 뽑혀 나갔고 기왓장이 모두 날아가 사람이 걸어 다니지 못하였습니다. 3일에는 산령(山嶺) 위쪽 수십 리(里) 밖에서 산불이 일어나 순식간에 교외의 평평한 들녘까지 번졌는데, 맹렬한 불이 공중에서 나부껴 연기와 불꽃이 하늘에 자욱하였고 불덩이가 날아와 물건에 닿는 대로 태워 버렸습니다. 경내(境內)의 민가 50채가 모조리 불에 탔고, 큰 사찰인 낙산사(洛山寺)도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江原監司狀啓, 襄陽呈, 以三月初二日, 大風猝起, 掀天動地, 氣勢獰怪, 百尺之松, 盡爲拔根, 屋瓦皆飛, 人不立行。初三日, 嶺上累十里外, 有一派山火, 瞬息之間, 飛到平郊, 烈火翻空, 烟焰漲天, 火塊飛舞, 着物輒燒, 境內民家五十坐, 盡爲燒盡, 洛山巨刹, 亦被灰燼)

낙산사를 불태운 양간지풍

낙산사를 불태운 바람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왕조실록에는 세종, 헌종, 인조, 숙종, 순조 연간에 이 지역에 분 바람의 기사가 보인다. 이름도 대풍(大風), 광풍(狂風), 영풍(獰風), 맹풍(盲風)이다. 이중환의 택리지를 보면 그 답을 짐작할 수 있다. “통천과 고성엔 눈이요 양양과 간성엔 바람이라(通高之雪 襄杆之風)”라고 하였다. 계절적으로 간성(杆城)과 양양(襄壤)에는 바람이 불었다. 이를 요즈음은 택리지의 표현을 빌려 양간지풍(襄杆之風)이라 한다. 범인(犯人) 아니 범풍(犯風)은 바로 양간지풍이었던 것이다. 근래 가끔 양강지풍(襄江之風: 양양과 강릉 사이 부는 바람)이라는 말도 들리는데 뿌리 없는 말이다.

이 바람이 2005년 낙산사를 불태웠고, 다행히 정조의 명을 수행하던 중 사실적으로 그린 단원의 낙산사도가 있어 지금의 낙산사는 250여 년 전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언제나 보듯 겸재의 그림은 사실적이기보다 그림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변형된 모습으로 그려지기에 전신적(傳神的)이기는 하나 사실적(事實的)이지는 않기에 낙산사 복원에는 사용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제 낙산사를 돌아 아랫세상으로 내려간다. 문득 이 절에서 마음 달랬던 허균의 싯구가 귓가를 스친다.

竹逕通秋屐。花臺起夕煙(가을 대나무길 걷는데 꽃밭에 저녁연기 피어나네)

그랬구나, 허균은 그 날 저녁 안개 필 때 대나무 절길을 지났구나. (다음 회에 계속)

 

<이야기 길에의 초대>: 2016년 CNB미디어에서 ‘이야기가 있는 길’ 시리즈 제1권(사진)을 펴낸 바 있는 이한성 교수의 이야기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달 마지막 토요일에 3~4시간 이 교수가 그 동안 연재했던 이야기 길을 함께 걷습니다. 회비는 없으며 걷는 속도는 다소 느리게 진행합니다. 참여하실 분은 문자로 신청하시면 됩니다. 간사 연락처 010-2730-77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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