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21호 김민주⁄ 2022.04.05 09:14:29
공간은 인간이 존재하는 세계를 인식하는 근거이다. 예를 들어 나지막한 우리의 전통 돌담은 외부 세계와의 경계를 상징할 뿐만 아니라 집안과 밖의 소통을 상징하는 공간이 된다. 기업의 공간도 마찬가지다. 재화나 서비스 판매를 위한 공간일 뿐만 아니라 기업의 정체성, 브랜드 가치, 고객과의 소통 방식을 상징한다. 그래서 고객을 위한 공간, 임직원을 위한 기업 내부의 공간에 문화를 심는 것에는 기업의 의도와 코드가 담겨 있다. 기업 공간의 트렌드를 엿보는 재미는 바로 여기에 있다.
요즘 기업은 공간을 한 가지 기능으로 욱여넣지 않는다. 쇼핑과 주거만이 아닌 문화적 상징으로 기능할 수 있도록 꾸민다. 백화점, 통신사, 뷰티 스토어 등이 MZ 세대를 겨냥해 신선한 팝업스토어와 다양한 문화 체험 공간을 마련 중이다.
백화점에서 만나는 초록, 더현대 서울 ‘사운즈 포레스트’
‘더현대 서울’은 백화점 내부에 대형 실내 정원을 구현했다. 빌딩 숲 사이에 진짜 숲으로 조성된 ‘사운즈 포레스트’는 백화점 한 층의 중심부를 차지한다. 이용객들은 백화점 한복판에서 초록을 느낄 수 있다.
사운즈 포레스트 바로 위층인 6층에는 사운즈 포레스트 전경을 한 번에 담을 수 있는 포토존이 마련됐다. 이곳은 줄을 서서 찍어야 할 만큼 ‘인증샷 맛집’으로 자리매김했다. 사운즈 포레스트 안에도 꽃집처럼 꾸며진 포토존들이 곳곳에 존재한다.
더현대는 전체 영업 면적(89,100㎡) 절반을 조경 공간 및 휴식 공간으로 구성했다. 그 중 사운즈 포레스트는 3300㎡(약 1000평)이다. 이 공간은 현대백화점의 리테일 테라피(Retail Therapy) 전략의 일부이다.
리테일 테라피에는 쇼핑 공간을 통해 소비자에게 힐링을 선사한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백화점 같은 유통 업체들이 판매 공간을 축소하는 대신 고객 체험 공간과 볼거리를 늘리는 것으로, 더현대의 전략이 통했다는 건 수치를 통해 확인되고 있다. 더현대는 개점 첫 해 매출 8000억 원을 기록했다. 또한 이용객이 사운즈 포레스트에 머문 평균 시간은 약 37분으로 나타났다. 더현대 서울 패션 브랜드의 평균 체류 시간은 4분이다.
한편 더현대 서울은 업계 최초로 완전한 무인 매장 ‘언커먼 스토어’(Uncommon Store)를 열었다. 현대백화점 전용 앱을 설치한 뒤 QR코드를 인식해 무인 매장에 입장한 다음, 구입 상품을 가지고 나가면 자동 결제되는 방식이다. 최근엔 MZ 세대 인기 일러스트레이터인 ‘최고심’ 언커먼 스토어, 레트로 컨셉 ‘88라면 스테이지’, 박재범의 ‘원소주’ 팝업스토어를 열어 방문객을 끌어 모았다.
바쁜 일상 속 틈, LG유플러스 ‘일상 비일상의 틈’
2020년 오픈한 ‘일상 비일상의 틈’(이하 틈)은 지하 1층부터 지상 6층까지 총 7층으로 구성된 문화복합공간이다. 강남역 대로변에 있는 ‘틈’은 바쁜 일상 속 틈을 내어 방문할 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다. LG유플러스가 만든 이 공간에 LG유플러스는 찾아보기 힘들다.
틈은 각 층마다 공간 콘셉트가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층을 올라갈수록 전혀 다른 세상에 떨어진 듯한 느낌을 준다.
지하 1층에서는 트렌디한 전시와 팝업행사를 선보인다. 1층은 플랜테리어가 돋보이는 힐링공간을 기반으로 다양한 팝업을 전개하고 있다. 2층 역시 팝업, 3층은 독립출판물 위주 책방인 ‘스토리지북앤필름’ 이 있다. 4층엔 아날로그 필름을 경험하는 ‘필름로그’ 가 있고 5층에는 콘텐츠 체험 공간, 7층은 루프탑이다. 상품 구입과 별개로 이 모든 시설에 입장료나 이용료는 없다. 젊은 세대에게 가성비 넘치는 공간으로 주말 여가를 보장한다.
LG유플러스가 틈 방문 고객을 분석한 결과, 방문객 80%가 MZ 세대인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20대 비중은 63%, 성비로는 여성 비중이 65%로 젊은 여성 층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실제로 틈은 한 번 들어가면 헤어 나오기 힘든 ‘개미지옥’이라는 우스갯소리도 돌고 있다. LG유플러스 관계자는 "기존 매장이 상품과 서비스를 알리고 판매하는 장소였다면 틈은 브랜드 가치를 전달하면서 고객과 소통하는 공간이다. 앞으로도 MZ 세대가 선호하는 키워드 중심으로 다양한 제휴사와 협업을 통해 차별화된 고객 경험을 기획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MZ세대의 뷰티 성지, 아모레 성수
젊은 여성이 관심 가질 만한 기업 공간이 자리한 서울 성수동으로 가 보자. 동네 골목 한 편에 선 회색빛의 투박하고 허름한 건물 한 채. 이곳은 아모레퍼시픽이 오래된 자동차 정비소를 고쳐 만든 뷰티 브랜드 체험 공간, ‘아모레 성수’다. 건물 내부가 ‘ㄷ’자로 이뤄진 이곳은 아모레퍼시픽의 각종 화장품들을 전부 만나 볼 수 있어 화장품 마니아들에게 ‘뷰티 성지’로 불린다.
일렬로 된 입장로를 지나면 아모레 성수의 첫 공간이 나타난다. 은은한 조명 빛이 감도는 첫 번째 공간에는 아모레의 기초 화장품이 전시되어 있고, ‘클렌징 룸’이 마련됐다. 클렌징 룸에는 수건은 물론 헤어 밴드, 면봉까지 구비됐다. 이곳은 방문객에게 주변의 뚝섬과 건대입구역에서 약속이 있을 때 미리 방문해 그날의 메이크업을 재정비하는 시간을 선물한다.
통로를 따라 이동하면 ‘뷰티 라이브러리’가 등장한다. 기다란 복도에 들어선 진열장에는 알파벳 순으로 아모레의 각기 다른 40여 개 브랜드 제품 1800개 이상이 진열됐다. 립부터 파운데이션, 마스카라 등 온갖 화장품이 즐비하다. 아모레 성수에서만 판매하는 성수 토너와 퍼즐 우드 디퓨저도 이곳에 있다.
그 공간을 지나면 ‘메이크업 룸’이 나온다. 메이크업 샵처럼 꾸며진 공간에는 환한 조명이 설치된 거울들이 일렬로 쭉 늘어서 있다. 이용객은 그곳에서 자유롭게 메이크업을 할 수 있다.코로나19 팬더믹 이전에는 이용객에게 메이크업 멘토링과 터칭서비스를 무료로 제공했다.
마음을 움직이는 공간, 현대 모터 스튜디오
현대자동차가 운영하는 ‘현대 모터 스튜디오’는 서울, 고양, 하남, 부산, 베이징, 모스크바에 지점을 뒀다. 현대 모터 스튜디오 슬로건은 ‘사람을 움직이는 수단에서 마음을 움직이는 공간으로’다. 스튜디오는 전시, 건축물 등을 통해 자동차에 대한 새로운 경험을 선사한다.
스튜디오는 지점별로 다른 디자인 전시와 건축물, 워크샵, 체험 공간 등을 선보인다. 전시는 주로 아트 전시, 체험 전시, 차량 전시로 나뉘며 그 종류는 매우 다양하다. 현대자동차의 디자인 철학이 담긴 자동차 전시인 ‘리플렉션즈 인 모션’(Reflections in Motion), ‘아이오닉’(IONIQ) 라이프 스토어 체험, 제로 투 제로(Zero to Zero) 갤러리, 시승 체험 서비스 등이 있다.
현대 모터 스튜디오 부산은 공장을 개조한 복합문화공간 F1963 내부에 있다. 이곳에선 ‘Design to live by’라는 컨셉 아래 자동차 디자인에 국한하지 않고 삶을 풍요롭게 하는 일상 속 디자인 전반에 대한 전시를 다룬다. 현재 진행 중인 전시는 ‘미래가 그립나요?’이며, 전시 주제는 ‘시간의 가치’로 잡았다. 전시는 향후 30년을 어떻게 상상할 수 있을지 구상하기 위해 기획됐다.
GS건설, 갤러리 ‘시선’·자이 단지 내 문화 공간
최근 주요 건설사도 건축에 미술을 접목, 문화 사업을 펼치고 있다. GS건설은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본사 1층 로비에 갤러리 ‘시선’을 운영하고 있다. 갤러리 시선은 지난 2018년 개관해 국내 작가들 위주로 각종 전시를 선보이며, 아트 허브로 자리 잡았다. 최근 공모 기획전 ‘고진이·권나영·서희영’ 3인전을 열기도 했다. 지난해에는 발달장애인 미술전인 ‘다시, 봄’을 개최하고 예술인을 위한 평론집을 발간하는 등 유의미한 발자취를 남겼다.
GS건설은 자사 주거 상품인 ‘자이’의 단지 내에도 입주민을 위한 여러 문화 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방배 그랑 자이 내에 있는 CGV 골드클래스가 대표적인 예다. GS건설 관계자는 CGV 골드클래스는 입주민에게 굉장히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고 밝혔다. 또한 GS건설은 서울 옥션 블루와 협업, 실물 및 디지털 자산 전시 서비스를 제공하며 NFT 디지털 아트 전시도 기획하고 있다.
대중은 이제 공간을 직접 찾아 나선다. 성상민 대중문화 평론가는 더현대 서울의 ‘사운즈 포레스트’나 ‘일상 비일상의 틈’ 같은 공간들은 1차적으로는 쇼핑 도중 이색 경험으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장소이며, 2차적으로는 이러한 공간을 만든 기업과 브랜드에 대한 이미지를 습득할 수 있도록 기능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모두 직접적인 쇼핑이 중심인 공간은 아니지만, 쇼핑을 통해 해당 공간을 경험하는 시간은 철저하게 해당 기업이 구축한 공간에서 자신의 몸과 마음을 맡기는 행위”라며 “대중은 기업과 접촉할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나고, 더욱 친숙하게 기업에 다가갈 수 있는 계기를 확인한다”라고 덧붙였다.
<문화경제 김민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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