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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 그림 길 (98) 무봉산중] 겸재 그림 덕 되살아난 만의사 두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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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721호 이한성 옛길 답사가⁄ 2022.04.14 14:28:41

(문화경제 = 이한성 옛길 답사가) 퇴우이선생진적첩(退尤二先生眞蹟帖) 중 두 번째 찾아가는 그림은 무봉산중(舞鳳山中)이다. 이 그림을 보면 이내가 낀 산 위로 수직 암봉(垂直 岩峰)이 하늘을 찌르고 개울가 초막(草幕)에는 신선 같은 두 노인이 응대하고 있다. 그런데 이 신선 세계는 어디에 있을까? 일단 동국여지승람을 찾아본다. 이 책 수원도호부 불우(佛宇: 사찰) 조에는 만의사(萬義寺, 萬儀寺)라는 절이 소개되어 있는데 무봉산이 등장한다.

만의사(萬義寺): 무봉산(舞鳳山)에 있다.

신우(辛禑: 우왕을 신돈의 아들이라고 비하하는 조선의 표기) 때에 우리 태조(太祖)가 의주(義州)로부터 의거(義擧)를 일으켜 회군했는데, 승려 신조(神照)가 휘하에 있으면서 큰 계책을 정하는 데 참여하였다. 공양왕(恭讓王)이 특별히 공패(功牌)를 주어서, 이 절을 맡게 하고 이어서 노비와 토지를 주어서 법손(法孫)에게 전하게 하였다.

(萬義寺. 在舞鳳山. 辛禑時, 我太祖自義州擧義回軍, 僧神照在麾下, 與定大策焉. 恭讓王特賜功牌, 使主是寺, 仍給奴婢, 土田, 傳于法孫.)

 

겸재 작 무봉산중.

겸재의 무봉산중은 바로 이 무봉산과 그 기슭에 자리 잡은 기와 건물과 초막에 자리 잡은 두 노인을 그린 그림이다.

무봉산 만의사라…. 수원 사람들에게 물어도 좀처럼 아는 이가 없다. 또 다른 단서는 없는 것일까? 다행히 관광공사 자료에 친절한 안내가 있다.

무봉산 기슭에 자리 잡은 만의사는 원래 화성시 동탄면 신리에 있던 신라 시대 이래의 고찰이었으나, 1669년(현종 10)에 그곳이 우암 송시열 선생의 묫자리가 되면서 절을 중리의 현 위치로 옮겨가게 되었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우암이 한때 만의사에 머물렀음을 알 수 있는데 그 후 왕세자 책봉 문제로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정읍에서 사사되었으니 가문에 큰 화를 입힌 셈이 되었다. 때문에 말년에 머문 만의사와 무봉산 자락이 인연이 되어 그의 묘를 이곳에 쓰게 된 것은 아닌지 무딘 추측만 해볼 수 있을 것이다.

‘수원의 동쪽 수십 리 거리에 절이 있으니 만의사(萬義寺)라고 한다. 나라의 복리(福利)와 비보(裨補)를 기구(祈求)하던 옛 절이다. 파괴되고 폐지된 것이 이미 오래되어서 초목이 우거진 황무지가 되었더니, 황경(皇慶) 연간 천태종의 진구사(珍丘寺) 주지인 혼기(混其) 대선사가 옛터를 와서 보고 새로 절을 중건하였으며, 삼장법사 의선공(義璇公)이 뒤를 이어 절을 주간하였다.’ 1392년 2월, 21일 동안이나 계속된 대법회 때 권근(權近)이 쓴 ‘수원만의사축상화엄법화회중목기(水原萬義寺祝上華嚴法華會衆目記)’의 내용 일부인데 만의사의 내력과 비보 사찰로서의 옛 모습이 흥미를 끈다.

 

옛 무봉산과 만의사 터.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관광공사 자료에 등장하는 무봉산과 만의사는 겸재의 그림 배경은 아니다. 이곳으로 옮겨 오기 전 옛 만의사 터를 찾아가야 한다. 옛 만의사 터는 묘한 곳에 있었다. 기흥CC 정문으로 들어서서 2km여 클럽하우스 방향으로 오르면 클럽하우스 앞 주차장에 닿는다. 이곳 입구에서 좌측으로 U턴 하듯이 방향을 바꾸면 차 한 대가 다닐 수 있는 내리막 샛길이 나온다. 샛길로 접어들어 앞을 보자. 겸재의 그림 속 무봉산(또는 만의산)이 정면으로 보이고 길 아래로는 사찰로 보이는 작은 규모의 건물 몇 채가 보인다. 길 입구에 서 있는 안내판에는 은진송씨종산 입구(恩津宋氏宗山 入口)와 원각사를 알리는 표지석이 서 있다.

 

만의사 터에 들어선 현재의 원각사.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무봉산장’ 편액.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겸재 그림을 본 삼아 재현해 놓은 무봉산장.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아, 옛 만의사는 떠나고 이제 그 자리에는 작은 절 원각사가 있구나. 이제 원각사로 내려가 본다. 입구로 들어서면 두 채의 기와 건물이 있고 우암 송시열(尤菴 宋時烈)의 초장지를 알리는 안내판들이 서 있다. 건물에는 우암이 강론도 하고 서울을 왕래할 때 거주했다는 안내 문구가 있다. 건물 편액은 무봉산장(舞鳳山莊)과 무봉재(舞鳳齋)이다. 옛 이름 무봉산(만의산: 258m)으로 오르는 산 중턱에는 우암(尤菴)의 초장지(初葬地)가 있다. 1689년(숙종 15년) 우암이 사약을 받고 명을 달리하자 이곳에 장사지낸 것이다. 영조 연간 괴산 청천 응봉으로 이장할 때까지 이곳이 우암의 음택이었다. 앞으로는 봉사손 기태를 비롯한 은진 송문의 묘들이 산 곳곳에 산재해 있다.

무봉산 옛 지도.
우암 초장지.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대단했던 만의사의 원래 모습

절로 들어서 보니 원각사는 제대로 불사를 하지 못한 작은 절이었다. 안내판에는 옛절 만의사가 떠난 자리에 1888년 건립했다고 한다. 1941년 대웅전이 전소되어 이듬해 재건했다는데 법당이나 요사채나 많이 어설프다. 절 오른쪽(우암 초장지와는 반대편) 골짜기로 오르면 만의사에서 주석하던 선화대사(禪華大師)의 소박한 석종형(石鐘形) 부도와 비(碑)가 서 있다. 유정(惟政)의 제자로 상당한 고승이었다 한다. 절은 떠나고 부도만 남아 수백 년을 외롭게 지낸 것이다.

만의사는 만만히 볼 절은 아니었다. 동문선(東文選)과 양촌집에는 권근(權近)이 쓴 만의사에서 열린 화엄경 대법회 관련 기록인 ‘수원 만의사 축상화엄법화법회 중목기(水原萬義寺祝上華嚴法會衆目記)’가 실려 있다.

만의사 일주문.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수원의 동쪽 수십 리 거리에 절이 있으니, 만의사(萬義寺)라고 한다. 국가 복리(福利)의 비보(裨補)를 기원하던 옛절이다. 폐허가 된 지 이미 오래되어 초목이 우거진 황무지가 되었더니, 황경(皇慶) 연간에 천태종의 진구사(珍丘寺) 주지인 혼기(混其) 대선사(大禪師)가 옛터를 와서 보고 새로 절을 중건하였으며, 삼장법사(三藏法師) 선공(璇公)이 뒤를 이어 절을 주관하였는데 임금에게 자세한 사정을 아뢰어 판지(判旨)로 절을 묘련(妙蓮)의 문인에 귀속시켜 서로 전하도록 하였다. 세월이 이미 오래되어 실로 천태종의 불법을 일으키는 본사(本社)가 되었다. 지조(地租)를 받는 전지(田地)가 있고, 사역을 하는 하인들이 있어서 이익을 탐내는 무리가 또한 이 절을 차지하려고 하였다. 얼마 전에 천태종과 조계종에서 서로 주지를 임명하더니, 그 뒤에 조계종에서 그만 빼앗고자 하여 법사(法司)에 소송을 제기하니 당시의 공론이, “절에 전지와 노비가 있는 것은 삼보(三寶)를 공양하기 위함이고, 주관하는 중의 사적인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다. 두 종파가 서로 분쟁하는 것은 한갓 이 재산이 있기 때문이니, 이것은 없는 것만 못하다” 하였다. 이에 노비 약간 명은 모두 수원부에 소속시키고, 절은 도로 천태종에 귀속시켰다. 지금 주상께서 왕통을 계승하여 나라를 중흥하니, 모든 정치를 다시 새롭게 하고 조종(祖宗)의 법을 준수하며, 삼보를 존중하게 여겨 왕화(王化)를 돕게 하였다. 그때에 천태종의 용암사(龍巖寺) 주지인 대선사(大禪寺) 중대광(重大匡) 봉복군(奉福君) 신조(神照)라는 스님이 있었으니, 일찍이 공민왕의 총애를 받았는데, 공민왕이 모든 신하를 버리고 승하하게 되니 사모하며 그의 명복을 비는 일을 오랠수록 더욱 힘써 왔다. 홍무(洪武) 무진년(1388, 창왕14)에 병화가 일어나서 국가의 안위가 급박할 때 신조(神照) 스님은 완산(完山) 이 시중(李侍中: 이성계)의 막하에 있으면서 장상(將相)들과 함께 국가의 대책을 정하여, 의병을 일으키고 회군하여 종묘와 사직을 편안하게 하여 오늘의 국가 중흥의 왕업을 열게 하였다. 주상께서 마음으로 가상하게 여기고 다음 해인 경오년 8월에 그에게 특히 공신에게 주는 사패(賜牌)를 내려 만의사(萬義寺)와 그에 따른 노비를 영구히 그의 법손(法孫: 교리를 계승한 제자)에게 전하게 하였으니, 또 사전(寺田) 70결(結)을 주어 부처를 공양하고 중들을 먹여 살리는 비용을 풍부하게 하여 주었다. 신조(神照) 스님은 이에 더욱 임금의 은사(恩賜)에 감격하여 축복하는 것으로써 은혜의 만분의 일이라도 갚을 것을 생각하였다. 드디어 바랑 속에 모아 두었던 백은(白銀) 한 덩어리를 팔아 신미년 정월에 특히 7일의 소재도량(消災道場)을 개설하였으며, 임신년 2월에 또 법회(法會)를 벌리니, 의복과 좌구(座具)와 띠와 버선을 모두 구비하였으며 아름다운 제수(祭需)와 진기한 반찬과 바치는 기구가 풍부하고 정결하였다. 임금에게 아뢰어서 압불소(押佛疏)를 받고, 대천태종사(大天台宗師) 국일도대선사(國一都大禪師) 현견(玄見) 등 시 잘하는 중 330인을 초청하니, 모두 한 시대의 큰 천태종의 덕(德)이 스님들이었다. 외호(外護)는 전 홍제사(洪濟寺) 주지 대선사(大禪師) 명일(明日) 등 190인이었으며, 제집사(諸執事)는 감원선사(監院禪師) 각항(覺恒) 등 190인이었다. 처음에는 화엄삼매참의(華嚴三昧懺儀)를 열고, 계속 《묘법연경환사소해(妙法蓮經環師疏解)》를 강교(講敎)하였다. 삼칠일(三七日)이 지나고 마치니 그것이 임금의 장수를 빌고 국가를 복되게 하며, 중생을 구제하고 만물을 이롭게 하도록 기원한 바는 크다고 말할 수 있다. 나의 가친 영가군(永嘉君)이 친히 왕명을 받고 봉향(奉香)하여 왔으므로 내가 모시고 성대한 불사(佛事)를 참관하였더니 하루는 신조공(神照公)이 나에게 일의 전말을 적어서 뒷사람들에게 보이게 하라고 청하였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불가에서는 인륜을 버리고 임금과 어버이를 생각하지 않고 이 세상에 살면서 이 세상을 등지는 자를 우리 유학(儒學)하는 자들은 병폐로 여기는 것이다. 사대부로서 이 세상에 뜻이 있는 자는 누구나 공업(功業)을 세워서 임금과 어버이의 은덕에 보답하고자 하지 않는 자는 없다. 그러나 그렇게 못하는 이가 많은 것은 사람들의 공통된 근심이다. 이에 신조공(神照公)은 비록 불사(佛寺)에 살고 있으나 오히려 임금과 재상에게 지우(知遇)를 얻어 국가에 공을 세움이 이와 같이 높이 뛰어나며, 마음을 오로지하고 힘을 다하여 좋은 인연을 맺어서 반드시 임금에게 은덕을 보답하기를 또 이와 같이 정성스럽게 하니, 이것은 진실로 이 세상을 저버린 것이 아니며 사대부가 따라갈 수 없는 일이다. 돌아보건대 나는 어리석어 일찍이 귀양살이로 쫓겨났더니, 특별히 어진 임금과 정승의 살리기를 좋아하는 은덕을 입어 목숨을 보전하고 오늘날에 이르렀다. 죽을 목숨을 다시 구원하여 주신 은혜는 하늘처럼 끝이 없다. 비록 조금이라도 보답하고자 하나 힘이 미치지 못하였더니 이제 이 법회에서 우러러 부처님에 대하여 대중과 함께 한 소리로 축원을 올릴 기회를 얻고 임금의 만수무강을 기원할 수 있게 되어 아래 신하의 구구한 뜻과 소원을 조금은 펴게 되었다. 진실로 다행한 일이다. 그러므로 사양하지 않고 기문을 쓴다. 이 법회에서의 여러 가지 사목(事目)은 뒤에 자세히 열거한다.

홍무(洪武) 25년(1392년) 창룡(蒼龍) 임신년 중춘(仲春) 하순에 씀.


(기존 번역 전재, 글이 길어서 원문 생략함. 원문이 필요한 분은 동문선 참조하세요)

한때 천태종의 불법(佛法)을 일으키는 본사이기도 했다는데 언제 우암과 인연을 맺고 그 뒷산에 우암의 음택이 들어서게 된 것일까? 숙종실록에 보면 숙종 6년(1680년)에는 초려(草廬) 이유태(李惟泰)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상소문이 올라와 있고, 10년(1684년)에는 이유태의 문인 이지갑이 상소를 올려 스승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다. 그 발단이 되는 시기가 현종 시대인데(1659~1674년) 이때 우암은 수원 만의사에 있었고 초려는 전의(全義) 비암사(飛庵寺)에 있어 초려가 사람을 보내 그가 쓴 글에 우암의 의견을 구하여 첨삭을 받은 일이 있었다. 그 내용이 바로 예송(禮訟) 논쟁에 관한 논리의 바탕이 되는 글이었다. 그러니까 예송논쟁 시기인 현종 연간에 우암은 만의사에 있었던 것이다. 예송논쟁을 말하자면 끝도 없으나 우암의 말년을 이해하려면 피할 수 없으니 잠시만 살펴보자. 기존 자료들을 간추려 보면,

인조반정 이후 북인은 괴멸되고 집권 세력인 서인과 야당 남인은 효종 승하를 계기로 본격적으로 예에 대한 논쟁을 벌인다. 1659년 효종 승하 후 현종이 즉위하자마자 첫 번째 예송인 기해예송이 발생했다. 인조의 계비(장렬왕후, 1624~1688년) 조 대비의 상복(喪服) 입는 기간이 논쟁의 초점이었다. 조 대비는 15세에 44세던 인조의 계비로 들어와 아들인 효종보다 나이가 어렸다. 효종의 국상에 조 대비가 입을 상복을 두고 송시열과 송준길 등 서인 측은 1년 복을 주장했다. 효종이 차남이고, 장남인 소현세자가 사망했을 때 조 대비가 3년 복을 입었으므로, 차자인 효종은 1년 복이 타당하다는 논리였다.

이에 허목, 윤휴 등의 남인은 반박 논리를 폈다. 효종이 비록 차남이지만 왕위를 계승한 인물이므로, 왕이 사망 때 적용하는 3년 복을 입는 것이 옳다고 맞섰다. 저의는 서인은 신권(臣權) 강화를 은근히 품은 것이고, 남인은 왕권 강화를 내세워 왕의 마음을 얻으려 한 것이다. 힘이 약했던 현종은 주류인 서인의 손을 들어주었다. 결국, 기해예송은 1년 복을 입는 것으로 결정됐고, 서인의 정치적 입지는 더욱 강화됐으나 효종의 왕통은 흠결이 생겼다.

1674년 1월 효종의 왕비인 인선왕후(1618~1674년)가 사망하면서 상복 문제는 또 한 번 뜨거운 감자가 되었다. 이번에도 상복의 주인공은 조 대비였다. 인선왕후보다 어렸던 조 대비는 이때도 생존해 왕실의 최고 어른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서인은 왕의 예법이 사대부의 예법과 동일함을 들어 차남의 며느리가 사망한 경우에 입는 대공(大功: 9개월 상복)을 주장했다. 남인은 이에 맞서 왕비의 국상임을 주지시키면서 조 대비의 기년(朞年: 1년 복)을 주장하였다.

현종은 이번에는 남인의 손을 들어줬다. 관록이 붙은 현종은 더 이상 서인에 끌려갈 수 없다고 판단했고, 예법에서도 왕권 강화를 강조하는 남인 입장에 동조했다. 1674년의 이 예송이 갑인예송이다. 이를 계기로 서인이 실각하고 남인이 정권의 실세로 자리를 잡는 정국의 변화가 일어났다. 우암은 이 예송에 서인의 중심세력으로 세를 모은 인물이었다.

어찌 보면 만의사는 이 예송논쟁에 서인의 영수 우암이 있었던 뜨거운 장소였던 것이다. 후에 경종(장희빈의 子)의 세자책봉 문제가 불거졌을 때 우암은 극력반대하는 소를 올려 제주 귀향길에 올랐다가 다시 사약을 들고 명을 달리 했다. 후에 연잉군(영조)가 등극하며 천하는 노론(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나뉨)의 시대가 되자 우암의 죽음은 순교(殉敎) 시(視) 되고 우암은 공자, 맹자와 같은 반열인 송자(宋子)로 추앙받으면서 조선은 끝없이 주자학의 세상으로 달려갔다. 이렇게 명을 달리한 우암은 인연이 깊은 만의사 뒷산 무봉산(만의산, 258m)에 묻혔다가 영조 연간에 말년에 지내던 괴산 청천면으로 이장하였다.

원각사와 현 만의사 안내판에는 이 무렵 만의사가 그 터를 떠나 이전하였다고 조심스럽게 추측하고 있다. 아마 그럴 것이다. 가야산 가야사가 대원군의 부친 남연군에게 자리를 내주고 옮겨간 예를 보면 조선 시대의 절집은 그랬을 것이다. 옛 만의사 터 흩어진 기와 조각들을 보니 한 가닥 바람이 스쳐 간다.

상상으로 그려낸 ‘봉황 춤추는 산’ 속 두 노인

이제 겸재의 그림 ‘무봉산중’으로 돌아가자.

필자의 사진에서 보듯이 무봉산은 나지막한 육산이다. 암봉은 없다. 겸재 그림 속 수직의 암봉(岩峰)은 겸재가 그림의 멋을 살리기 위해 그린 방편이다. 두 기와 건물은 언제 지은 것인지 불분명한데 우암이 만의사에 머물 때는 절이 현존할 때라서 절 건물을 사용했을 것이니 아마도 후에 재실 겸하여 지은 건물 아닐까 싶다. 현재 새로 지은 두 건물은 옛터에 겸재의 그림을 바탕으로 복원한 것 같다. 겸재가 이 그림을 그린 시기가 71세인 1746년, 현종의 마지막 재위년도가 1674년, 우암의 몰년이 1689년임을 볼 때 이 건물이 옛 건물이라면 만의사 불당 강당이었을 것이고, 아니면 후에 재실로 지은 건물로 보인다.

 

‘무봉산중’의 무대가 된 지역의 항공 사진.

앞 실개천은 아직도 변함이 없다. 다만 물은 거의 흐르지 않는다. 물론 초막은 겸재의 창작물일 것 같다. 그림 속 그 자리는 비탈이어서 초막을 짓기에 적절하지 않다. 초막에 앉아 있는 두 노인은 우암과 겸재의 외할아버지 박자진이다. 오래 전 세상을 떠난 분들이니 상상으로 그렸다. 외할아버지가 무봉산으로 우암을 찾아가 퇴계 선생의 주자서절요서(朱子書節要序)에 발문을 받는 모습이다.

이 그림을 요즈음 지도에 위치 표시해 보았다. 1은 우암 초장지, 2는 무봉산장, 3은 초막 위치, 4는 만의사 옛터, 5는 선화대사 부도 및 비, 6은 무봉산 정상 쪽을 표시하였다. 답사길 나설 때 참고하시기를.

 

무봉산 정상.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만의사 동종. 자료사진

이제 옮겨간 만의사를 찾아간다. 옛터에서 지근거리 밖이다. 지번은 화성시 풀무골로 219. 삼태기 같은 요즈음 무봉산(360.2m) 산 품에 폭 싸여 있다. 복이 들어오면 어디로 빠져나갈 곳이 없는 삼태기 같다. 터전은 넉넉한데 옛것이 없으니 참으로 서운하다. 수원화성을 쌓을 때 팔달문으로 가져갔다는 만의사 동종(경기 문화재 69호)이라도 있었으면 좋으련만. 주련은 한글로 달아 젊은 세대도 다가가기 쉽게 하였다. 절을 에워싼 무봉산 산행길은 느림보도 2시간이면 충분하다. 상쾌한 트레킹 날이다. 주변에는 기흥CC 손님들이 찾는 맛집들이 있으니 하루 나들이가 상쾌한 길이다. (다음 회에 계속)

 

<이야기 길에의 초대>: 2016년 CNB미디어에서 ‘이야기가 있는 길’ 시리즈 제1권(사진)을 펴낸 바 있는 이한성 교수의 이야기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달 마지막 토요일에 3~4시간 이 교수가 그 동안 연재했던 이야기 길을 함께 걷습니다. 회비는 없으며 걷는 속도는 다소 느리게 진행합니다. 참여하실 분은 문자로 신청하시면 됩니다. 간사 연락처 010-2730-77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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