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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장수기업④] 와인 불모지서 긴 세월 살아남아 더 값진 이름 ‘마주앙’

1960년대 중반 박정희 대통령 지시로 개발… 美 워싱턴포스트紙 “신비의 와인”으로 소개… 로마 교황청, 아시아 최초 미사酒로 승인… 끊임없이 변화하며 장수 브랜드로 우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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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748호 김응구⁄ 2023.05.19 15:58:14

‘마주앙’은 국산 와인 중에선 장수 브랜드다. 1977년 5월 출시됐다. 와인 불모지에서 견뎌낸 그 세월이 충분히 값지고 아름답다. 사진=롯데칠성음료

1964년,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서독(독일)을 찾았다. 국빈 방문이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룬 서독이었다. 그런 이 나라를 박 전 대통령은 국가 발전 모델로 삼았다. 그 방문에서 독일 총리는 여러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중 하나는 경부고속도로 건설로 이어졌다.

당시 박 전 대통령의 눈과 귀에는 참 많은 것이 담겼다. 어느 날에는 일반 작물을 재배하기 어려워 보이는 척박한 땅에 포도나무를 심고, 이 열매로 와인을 만드는 걸 알았다. 시선을 대한민국으로 돌려보니, 식량 부족에도 쌀·보리 같은 곡물로 소주·막걸리를 만들어 마시고 있었지만, 해외에서 국빈이 방문할 때 그의 손에 쥐어줄 번듯한 와인 한 병 없었다. 말그대로 우리나라는 와인 불모지였다.

박 전 대통령은 동행했던 대한상공회의소 박두병 회장에게 “우리도 포도로 술을 만들어보자”고 제안했다. 이른바 ‘국민주개발정책’의 시작이다. 당시 두산그룹 회장이었던 박 회장의 지시로 동양맥주(지금의 오비맥주)는 1973년 경북 영일군 청하면(현 포항 지역)·경남 밀양 지역에 포도밭을 조성했고 경산에는 와인 양조장을 설립했다. 그와 동시에 서독에서 와인 양조학을 배운 젊은 직원과 현지에서 데려온 와인 전문가가 중심이 돼 국산 와인 개발에 돌입했다.

마주앙의 옛 신문광고. ‘西歐(서구)의 최고급 釀造用(양조용)포도 리스링과 마스캇트를 主原料(주원료)로 만든 값진 와인입니다.’라는 문구가 재밌다. 리스링은 리슬링(riesling), 마스캇트는 머스캣(muscat)을 뜻한다. 사진=문화경제 DB

1977년 ‘마주앙’ 화이트·레드 출시 ‘역사의 시작’

1977년 5월, ‘마주앙’이 출시됐다. ‘마주앙 스페셜 화이트’와 ‘마주앙 스페셜 레드’ 두 가지다.

마주앙이라는 이름에 얽힌 사연도 재밌다. 뜻은 ‘마주 앉아서 즐긴다’로, 순수 한국말이다. 그 당시 국세청은 술 이름에 외래어를 쓰지 못하도록 했다. 그래서 이름을 만든 카피라이터는 앞서 말한 뜻을 담아 ‘마주안’을 제안했지만, 최종적으론 마지막 음절을 ‘앙’으로 바꿔 와인 느낌이 강하게 나도록 했다.

신기한 일도 벌어졌다. 마주앙이 출시되자 한국천주교는 견본을 로마 교황청에 보냈다. 이유는 한국의 성당에서 사용하는 미사주(酒)로 마주앙을 사용하고 싶다는 것. 그때만 해도 각 나라 성당들은 프랑스나 이탈리아에서 미사주용 와인을 구매해 사용했다. 하지만 배송 중 와인이 상하거나 와인병 깨지는 일이 잦았고, 무엇보다 가격이 비쌌다. 때맞춰 마주앙이 출시됐고 우리나라에 머물던 외국인 신부와 수녀들도 “수준급”이라고 평가하니 아주 좋은 기회였다.

다행히 로마 교황청의 승인을 받았다. ‘포도로 제조한 천연의 와인’이어야 한다는 미사주의 조건에 부합한 것이다. 어떤 첨가물도 들어있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후 마주앙은 한국천주교 미사주로 봉헌돼 현재까지 사용하고 있다. 아시아 최초로 로마 교황청 승인을 받은 공식 미사주라는 타이틀도 얻었다. 비화(祕話)이지만 한국천주교에 미사주로 봉헌되기 시작하면서 경북의 수도회 수사(修士)들이 경산 양조장을 꾸준히 방문하며 품질관리를 했다고 한다.

1979년에는 미국 워싱턴포스트가 마주앙을 ‘신비의 와인’으로 소개했다. 1978년 지미 카터(Jimmy Carter) 전 미국 대통령이 방한했을 때 선물로 건넨 마주앙을 와인 전문가·애호가들이 우수하다고 평가한 기사였다. 그때쯤 국내 신문에 실린 마주앙 광고에는 ‘워싱턴 포스트紙. 마주앙을 「신비의 술」로 격찬.’이라는 큰 제목을 발견할 수 있다.

1985년 독일 가이젠하임(Geisenheim) 대학에서 열린 와인 학술세미나에선 ‘동양의 신비’로 격찬받았다. 생각지도 못한 나라에서 수준 이상의 와인을 선보인 것에 주목한 것이다.

마주앙은 교황이 방한해 집전(執典)한 미사에서도 미사주로 사용했다. 한 번은 1984년 요한 바오로 2세가 한국을 찾았을 때, 또 한 번은 2014년 프란치스코가 방한했을 때다.

롯데칠성음료는 지난해 8월 24일 경북 경산공장에서 ‘제45회 마주앙 미사주 축복식’을 개최했다. 미사주의 원료가 되는 포도 수확을 감사하고, 미사주로 봉헌되기 전 와인이 잘 빚어지길 비는 행사다. 사진=롯데칠성음료

우리나라 최초 와인은 ‘마주앙’이 아니다?

마주앙이 대단한 건 한국 최초의 와인이 아님에도 지금까지 살아남았다는 점이다. 좀 비틀어 얘기하면 마주앙과 비슷한 시기에 세상에 나온 와인은 모두 ‘전멸’했다는 뜻이다. 규모가 크든 작든 와인 제조회사가 수많은 풍파를 겪고도 끝끝내 버틴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더구나 척박한 땅에서의 생명력이니 더욱 값지다.

이쯤에서 우리나라 와인의 시작을 잠깐 짚어본다. 혹시 ‘애플와인 파라다이스’라고 들어봤을지 모르겠다. ㈜파라다이스가 1967년 생산을 시작했다. 대한민국 첫 와인이다. 당시만 해도 대학생들에게 엄청난 인기였다. 1982년에는 포도로 만든 ‘올림피아’도 생산했다. 하지만 생각만큼 잘 되진 않았다. 판매 부진에 시달리다 1986년 동아제약으로 넘어갔다. 그다음 해 파라다이스는 수석농산이라는 상호로 변경됐다. ‘올림피아’는 ‘위하여’라는 상표로 갈아탔다.

우리나라 두 번째 와인은 해태주조가 만들었다. 1974년 포도로 만든 ‘노블와인’이 그것이다. 출시 후 ‘노블 로제’, ‘노블 클래식’, ‘노블 스페셜’ 등을 잇달아 선보였다. 해태주조는 해태제과 계열사다.

오래전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 해태상 밑에 와인이 묻혀있다는 얘기가 돌았다. 이는 현재도 사람들 입에 오르내린다. 이 얘기는 루머가 아니라 사실이다. 정말로 와인이 묻혀있다. 그 와인이 바로 노블와인이다. 1975년 국회의사당이 완공됐을 때 해태제과는 해태상(像) 조형물 두 개를 기증했고, 해태주조는 노블와인 75병을 반으로 나눠 해태상 두 개 아래 묻었다. 그러면서 100년 후인 2075년에 개봉하겠다고 공언했다. 일종의 이벤트였던 셈. 그러니 앞으로 52년 후 이 와인을 볼 수 있다.

그리고 1977년 마주앙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후 금복주가 1984년 8월 ‘두리랑’을 출시했고, 곧이어 ‘엘리지앙’도 선보였다. 그다음 해인 1985년에는 진로가 ‘샤또 몽블르’라는 와인을 시장에 내놓은 데 이어 ‘듀엣’도 공개했다. 진로는 특히 106만 평에 이르는 포도밭을 조성하며 의욕적으로 뛰어들었다. 1987년에는 대선주조가 스파클링 와인 ‘그랑주아’로 소비자 곁을 찾아갔다.

하지만 여기까지. 우리나라는 기후, 토양 등을 일컫는 ‘떼루아(terroir)’가 와인 양조용 포도 재배에 적합하지 않아 애를 먹었다. 여름은 덥고 겨울은 춥다. 그것도 몹시. 7~8월에는 집중 강우와 태풍까지 발생한다. 양조법보다 중요한 게 포도 육종(育種)인데 풍토가 적합하지 않으니 한계를 극복하기 어려웠다. 거기에 더해 1988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와인 수입 규제가 완화되고 개방이 허락되면서 외국산 수입 와인이 물밀 듯 들어오자 국산 와인은 더욱 설 자리를 잃었다.

그래도 주류제조회사들의 노력으로 1980년대에는 국산 와인 시장이 해마다 10~30%씩 성장했고, 1988년에는 최고치를 찍기도 했다.

마주앙은 5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꾸준히 성장하며 변화해 왔다. 제품 라벨만 봐도 그 역사를 알 수 있다. 사진=롯데칠성음료

2016년까지 1억 병 넘게 팔려… 국산 와인의 자부심

2001년 두산그룹이 오비맥주를 매각했다. 그와 관계없이 두산주류BG에선 마주앙을 계속 생산했다. 그러나 두산이 중공업을 중심으로 사업을 재편하면서 2009년 롯데그룹과의 인수합병(M&A) 때 두산주류BG를 내어줬고, 현재는 롯데칠성음료가 마주앙을 계속 생산하고 있다.

두산이든 롯데든 1980년대와 1990년대를 거치고 2000년대에 들어서도 마주앙은 생산공장 증설과 제품 포트폴리오 다양화로 국내 와인시장의 대중화를 이끌었다. 계속해서 주질(酒質)을 개선하고, 750㎖ 외에도 300㎖와 250㎖ 용량을 선보이며, 대형 유통매장에서 시음회도 여는 등 적극적인 마케팅과 홍보를 쉬지 않았다.

그 결과 2016년까지 누적 판매량 1억 병(750㎖ 기준) 돌파라는 대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롯데칠성음료 관계자는 “40년 넘게 이어온 최장수 국산 와인 브랜드 마주앙의 전통을 계속 살리면서도 국내 와인 소비 트렌드에 맞춰 맛·디자인 등을 지속적으로 개선할 계획”이라며 “수입 와인 위주의 국내 와인시장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마주앙이 더 많은 소비자의 선택을 받도록 계속해서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롯데칠성음료는 간송미술문화재단과의 협업으로 국보 제294호 ‘백자초충문병’ 이미지를 라벨에 입힌 마주앙 스페셜 2종을 지난해 9월 출시했다. 사진=롯데칠성음료

끊임없는 트렌드 탐색과 변화가 장수 브랜드 만들어

마주앙이 장수 브랜드로 살아남은 건 그 자리를 그대로 지키기만 해선 불가능했다. 스스로 살길을 찾아 새로운 방향을 모색했고, 변화의 중심에 섰다. 마주앙의 본질과 품격은 해치지 않으면서도 최대한 바꿀 수 있는 만큼 바꿔나갔다. 어색했지만 익숙함으로 이겨냈다.

실제 마주앙은 1977년 출시 후 지금까지 시장 상황과 트렌드에 따라 다양한 변화를 추진하며 살아남았다. 1988년 서울올림픽 당시 국내 와인시장이 개방됐을 때 마주앙은 이를 기회로 삼았다. 세계 여러 와인산지의 와이너리와 협업해 ‘마주앙 모젤’(1988·독일), ‘마주앙 라세느’(1990·프랑스), ‘마주앙 메독’(1993·프랑스), ‘마주앙 라인’(1994·독일), ‘마주앙 리오하’(1998·스페인), ‘마주앙 멜롯’(2002·칠레)을 차례로 냈다. 한국 소비자들이 특히 좋아하는 품종 모스카토로 만든 ‘마주앙 벨라’(2012·이탈리아)도 선보였다.

마주앙 라인이 나왔을 무렵의 신문·잡지 광고에는 ‘마주앙은 기후풍토가 라인 지방과 같은 淸河(청하)포도원의 포도로 만든 값진 와인입니다’라는 문구가 크게 적힌 걸 볼 수 있다.

현재 마주앙의 제품군은 대략 10가지로 구성돼 있다. 해외 귀빈 방한 만찬에 사용하는 ‘마주앙 레드’, 6·15 남북정상회담(2000년) 당시 평양 만찬 테이블에도 오른 ‘마주앙 화이트’, 국산 프리미엄 와인 ‘마주앙 시그니처’, 농가 상생 와인 ‘마주앙 영천’과 ‘마주앙 영동’, 프랑스 보르도 메독 지방에서 생산하는 특급 와인 ‘마주앙 메독’, 독일 특급 와인 ‘마주앙 모젤’, 이탈리아 피에몬테 지방의 ‘마주앙 벨라’ 등은 성인이면 누구나 사서 마실 수 있다. 그러나 한국천주교에 독점 공급하는 마주앙 미사주 2종은 일반인이 구매할 순 없다.

이중 마주앙 시그니처는 출시 40주년에 맞춰 2016년 선보인 제품이다. 100% 국산 포도로 만들어 오크통에서 숙성 과정을 거친 레드와인인데, 40년 동안 축적된 와인 양조기술을 모두 쏟아부어 만든 기념작이다.

마주앙은 컬래버레이션에도 열심이다. 지난해 12월 라이프스타일 브랜드 ‘위글위글’과 손잡고 만든 올인원 세트를 한정 출시했다. 사진=롯데칠성음료

비교적 최근인 2015년 7월에는 휴대하기 좋은 ‘마주앙 레드 파우치’도 선보였다. 캠핑·등산 등 야외활동 인구가 서서히 늘어나자 이에 초점을 맞춘 제품이다. 주머니 형태의 몸체에 돌림마개를 끼워 넣은 치어팩(cheer pack)으로 만들어 눈길이 쏠렸다. 신진 브랜드가 아닌 장수 브랜드의 선택이어서 그 시도가 더욱 신선했다. 더구나 750㎖ 용량이 부담스러운 1~2인 가구에 맞춰 한두 잔 분량의 250㎖로 선보인 점은 트렌드 분석력이 뛰어나다는 걸 보여줬다. 아쉽게도 한정 판매여서 지금은 살 수 없다.

혼자만 살아남겠다고 한 것도 아니다. 지역 포도 재배 농가와 상생하는 길도 걸었다. 양조용 포도 농가가 공급한 와인 원액을 블렌딩해 만든 마주앙 영동과 마주앙 영천이 그 좋은 예다. 충북 영동과 경북 영천은 포도 재배지역으로 유명하다. 지금도 지역마다 수십 곳의 크고 작은 와이너리가 국산 와인을 생산하고 있다.

언뜻 생각하면 컬래버레이션이란 단어와 어울릴 것 같지 않지만, 변화의 움직임에는 이 같은 시도도 포함됐다. 지난해 4월에는 카베르네 소비뇽(마주앙 레드)과 샤도네이(마주앙 화이트)를 리뉴얼한 데 이어, 6월에는 한식 다이닝 사계와 함께 한식 페어링 팝업 행사를 진행했다. 9월에는 간송미술문화재단과 함께 국보 제294호 ‘백자초충문병’ 이미지를 라벨에 입힌 마주앙 스페셜 2종을 출시했다.

12월에는 라이프스타일 브랜드 ‘위글위글(Wiggle Wiggle)’과 손잡고 만든 올인원 세트를 한정 판매했다. 이 세트는 마주앙 카베르네 소비뇽, 스템리스 와인글라스 등 와인 액세서리, 전용 캐리어백으로 구성됐다. 홈파티, 호캉스, 캠핑 등 다양한 시간·장소·상황에서 와인을 즐기는 국내 소비자 트렌드에 맞춰 기획했다.

롯데칠성음료 관계자는 “국내 와인시장 트렌드를 주도하는 20~30대 소비자에게 마주앙을 보다 친숙하게 알리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마주앙이라는 브랜드가 기성세대뿐만 아니라 MZ세대까지 끌어들이기 위해선 그에 맞는 맞춤형 이벤트에도 공을 들여야 한다는 해석이다.

50년 가까이 우리 곁에 자리한 느티나무 같은 와인

마주앙은 앞서 얘기했듯 마주 앉아 즐기는 와인이다. 둘이든 셋이든 그 틈에서 항상 제 몫을 다했다. 함께 울고 함께 웃어주었다. 그렇게 46년을 보냈다.

생각해보면 장수 브랜드는 늘 우리 곁에 있다. 다만 평소에는 잘 보이지 않는다. 찾아야 비로소 보인다. 그러나 찾지 않아도 그 자리에 늘 그대로 있다. 동네 뒷산 큰 느티나무 같다. 그래서 든든하다.

 

<문화경제 김응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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