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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CE가 간다 ②] 중목구조는 어떻게 10대 굳은 마음 열었나 … “공간이 정말로 마음 바꾸네!”

화제의 포천 도서관 ‘세컨 찬스 라이브러리’ 방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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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최영태⁄ 2024.05.31 15:22:00

‘공간을 바꾸면 의식이 바뀐다.’ 건축가들이 좋아하는 명제 중 하나다. 하지만 그 반론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4각 테이블은 권위주의적이니 민주적인 원탁으로 바꾸면, 즉 공간 구성을 바꾸면 권위주의가 없어지냐 하면 꼭 그렇지도 않기 때문이다. 아무리 원탁으로 바꿔도 주재자가 권위주의적으로 운영하면 종전 그대로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공간이 의식을 바꾼다’는 명제를 하드웨어(건축 디자인)적으로 또 소프트웨어(운영 방법)적으로 훌륭하게 증명해낸 도서관이 있어서 화제다. 이 도서관을 방문한 스페인 전문가는 “훌륭한 사례”라면서 관련 자료를 스페인 정부에 전달하겠다고 약속하기까지 했다니 말이다.

올해 초 SCL을 방문한 스페인 MTA 관계자들과 세상을품은아이들 관계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세상을품은아이들 제공) 

경기도 포천의 ‘세컨 찬스 라이브러리’(Second Chance Library, 이하 SCL. 포천시 일동면 사기막길 80)는 어려운 시기를 거친 청소년들이 이용하는 곳이다. 특수 도서관이니 만큼 건축가와 운영자가 1년간 충분히 상의하며 건물을 디자인하고 운영 내용을 채워 넣었다. 지난 11월 개관한 이곳의 반년 남짓 성과에 포천 시 도서관 관계자들이 놀라 여러 차례 방문했다. 또한 스페인 교육기관 MTA(Mondragon Team Academy) 교사와 학생들도 지난 1월 이곳을 방문해 경험을 전수받기도 했다.

 

도대체 어떻게 건축했기에 이런 효과를 올릴 수 있었을까?

겉은 단단하고 강해 보이는 돌로, 실내는 부드러운 나무로 꾸민 SCL. 청소년들의 외모와 속마음을 건축가가 담아냈다. (사진=김용성 사진작가)

이 도서관에 들어가면서 기자는 세 번 놀랐다. 우선 단단한 외모다. 검정 돌을 얇게 저며낸 슬레이트로 천정부터 벽까지를 장식해 외모가 육중-단단하다. 그러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면 온통 원목에 은은한 나무 향까지 느껴져 갑자기 분위기가 온화해진다. 단단한 ‘겉’과 부드러운 ‘속’의 강한 대비다.

세 번째 놀람은, 들어서자마자 마주치는 문구들이었다. “SCL에 오신 작가님 환영해요” “우린 작가! 하고 싶은 건 뭐든 내가 정함!” 등이다. 이 도서관을 이용하는 청소년들을 작가님으로 대해주는 자세다.

SCL에 들어서면 바로 만나는 문구들. 이용 청소년들을 '작가님'으로 부른다. (사진=최영태 기자) 

놀람 1과 2가 건축가의 공간 디자인에서 온다면, 놀람 3은 운영자의 자세에서 나온다. 이 둘이 맞물려 SCL의 기적을 만들어내는 듯하다.

이 도서관은 사단법인 세상을품은아이들(이사장 명성진)이 오즈앤엔즈 건축사사무소(대표 최혜진)에 의뢰해 만들었다. 어두운 경험을 통과한 아이들을 맡아 교육하는 특수기관이 세운 도서관이기에 명칭이 ‘세컨 찬스 라이브러리’다. 두 번째 출발을, 작가 대접하며 돕겠다는 자세다. “작가”라는 호칭에 청소년들은 처음엔 어색해했지만 곧바로 적응해낸단다.

실제로 이곳의 한 청소년이 외부 출판사를 통해 자신의 첫 저서를 펴내기도 했다니 작가를 키워내는 공간임이 분명하다.

청소년들의 안과 박을 담아낸 건축 디자인

도서관에서 만난 최혜진 건축가는 건물의 강한 외모와 부드러운 내부에 대해 “표정은 딱딱하지만 속은 부드러운 청소년들을 닮았다”고 말했다. 사회의 차가운 시선에 이들 청소년들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기 십상이지만, 그 마음으로 들어가보면 아주 여리다는 설명이다.

SCL의 내부가 지금처럼 부드러운 나무가 아니라, 차고 하얀 콘크리트 벽이었다면 건축적으로 환대받는 느낌은 크게 줄어들 것 같다.

나무를 짜서 천정을 올리는 모습. (사진=오즈앤앤즈 건축사사무소 제공)
완성된 실내는 천정이 높고, 막는 기둥이 없는 중목구조다. 천정을 이루는 굵은 나무는 바로 벽으로 내려와 책장 역할을 맡는다. (사진=김용성 사진작가) 

SCL 내부는 전문용어로 ‘중목(重木) 구조’다. 글자 그대로 두꺼운 나무를 엮어 가는 방식이다. 이 도서관을 위에서 바라보면 3개의 삼각형이 꼭지점에서 만난다. 가운데 꼭지점을 향해 중목들이 질서정연하게 행진해 올라간다. 그 꼭지점은 최대한 들어올려져 그 아래 높고 넓은 공간을 만든다. 짜맞춰진 나무의 힘으로 천정을 만들었기에 시선을 막아서는 기둥이 없다. 막아서는 기둥 없이 두 번째 기회를 찾게 해주려는 환대의 의미다.

천정을 구성하는 중목은 옆 벽면으로 뻗어 내려오면서 책장으로 변신한다. 알루미늄 창호의 안쪽 면까지 나무로 덧대져 ‘실내는 온통 나무 느낌’으로 통일됐다.

창호의 금속 면 위에 나무를 덧대 쇠 창틀이 없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 SCL의 통창. 건축가의 세심한 정성이 느껴진다. (사진=김용성 사진작가)

SCL 삼각형의 세 변 중 두 변(북쪽과 남쪽)에는 큰 통창이 나 있다. 북창으로는 멀리 산 경치가, 남창으로는 아담한 정원이 보인다.

전망이 최고인 이 북창 앞 공간은 이른바 ‘눕 존’이다. 누운 듯한 자세로 책을 볼 수 있도록 빈백을 설치했다. 전망 좋고 편하니 청소년들의 ‘최애 공간’이다. 그리고 이 눕존은 계단 3개만큼 바닥에서 떠올려져 있다. 그 아래쪽은 주차 공간이다. 이렇게 떠올린 눕존은 임시 공연 무대로도 활용된다.

삼각형 건물인 만큼, SCL의 세 모서리는 예각을 이룬다. 이 예각에 대해 최 건축가는 “대지의 형태에 맞춘 삼각형이지만, 또한 범죄를 경험한 아이들이 이 도서관을 통해 새 사람이 되어 세상 어디로든 뻗어나가 달라는 화살표의 의미도 담았다”고 말했다.

어느 방향으로든 뻗어나가게 도와줄 콘텐츠들은 도서관 안에 그득하다. 예각을 이루는 한 코너에는 음악을 마음껏 듣는 ‘음악 존’, 카메라 두 대로 사진을 찍고 인화하는 ‘사진 존’이 있다. 음악 존의 반대편 모서리에는 DVD와 빈백이 비치된 ‘영화 존’이 있다.

'작가'들이 직접 책을 만들 수 있도록 비치된 제본 도구들. (사진=최영태 기자)
'작가'들의 메시지 판에 걸린 한 문구가 시선을 끈다. (사진=최영태 기자)

작년 11월 개관 초기만 해도 청소년들은 이 음악, 영화 존에서 걸그룹 음반, 마블 만화영화 등을 주로 즐겼다. 하지만 반년이 지난 현재 묘한 변화가 감지된다. 변화는 △만화 원전의 ‘마블 영화’에서 문화-사회적 내용의 영화로 △그림 위주의 책에서 글자 위주의 책으로 △사진-음악 존에서 책 읽기 존으로의 이동 등이다.

도서관의 비치 자료는 선생님들만이 결정하지 않는다. 이용 청소년 중 일부를 ‘예비 사서’로 지정해 선생님들과 상의해 자체적으로 영상물, 만화책 등을 선택-비치하게 했다.

너무나 좋은 새 건물에, 풍성하게 갖춰진 책과 기자재들을 보며 기자는 이런 생각을 했다. “이런 시설을 이용하는 청소년들은 다 부잣집 자녀 아니겠는가?” 하는 의문이었다.

하지만 명성진 세품아 이사장의 대답은 달랐다. 법무부가 청소년들을 맡기면서 지불하는 금액, 그리고 뜻을 함께 하는 사람들의 기부금으로 이 도서관을 세우고 운영하고 있지만 “공공 도서관 운영에 들어가는 예산과 SCL 운영비에 큰 차이는 없을 것”이라는 설명이기 때문이다. 물론 도서관 신축에는 ‘도서문화재단 씨앗’의 지원이 있었다. 하지만 완공 뒤 도서관 운영 비용은 공공 도서관과 비슷하다니, 공공 도서관이 참고할 만하다.

그래서 포천시 도서관 관계자들이 이미 다섯 번이나 SCL의 경험을 배우려 견학했단다. SCL의 새 시도가 포천 시 등의 공공 도서관 시스템에 앞으로 얼마나 녹아들어갈지 궁금하다.

SCL의 삼각형 구조를 하고 있다. 땅의 모양에 맞춘 디자인이지만, 또한 "어디로든 뻗어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이용자들에게 제시하는 디자인이기도 하다. (사진=김용성 사진작가)

‘공간이 의식 바꾼’ 첫 사례?

‘공간이 의식을 지배한다’는 명제는 건축학계의 오랜 꿈이지만, 논란 또한 적지 않다. 2년 전 3월, 대통령 집무실을 둘러싸고 ‘공간과 의식’ 논쟁이 벌어졌었다. 청와대를 버리고 용산 국방부 청사로 대통령실을 옮기겠다는 윤석열 당시 대통령 당선자가 청와대를 버리는 이유 중 하나로 “공간이 의식을 지배한다”라는 명제를 들고 나왔기 때문이다.

청와대의 공간 구성이 미국의 백악관과 비교할 때 권위주의적이라서 민주적이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반면 이러한 주장에 대해 최성호 건축가는 [윤석열 “공간이 의식을 지배한다”는 잘못된 인식] 글을 통해 아무리 권위주의적으로 건축된 공간 안이라도 사람이 서로 가까이 앉으면 친밀해질 수 있고, 반대로 아무리 민주적으로 지어진 공간 안이라도 뚝 떨어져 앉으면 권위주의적이 된다는 사실을 들며 반박했다. “공간은 활용하기 나름이며, 공간보다는 공간 속 사람의 마음 씀씀이가 더 중요하다”는 반박이었다.

지난 2022년 화제가 됐던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회담 사진. 아무리 따뜻한 실내 장식이고, 민주적인 원탁이어도 이렇게 5m나 일부러 떨어져 앉으면 서먹하지 않을 수 없다. (KBS 뉴스 화면 캡처)  

청와대에서 국방부로 대통령실을 옮긴 지 2년이 돼가는 현 시점에서 ‘공간 변화는 대통령실의 권위주의를 줄였나?’라고 묻는다면, 결론은 긍정적이기 힘들다.

공간이 바뀌면 의식이 바뀔 단초는 생기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하나의 단초일 뿐, 인간의 소프트웨어적인 노력이 추가되지 않는다면 순전히 공간 디자인의 변경만으로는 성과에 한계가 있다는 반증이다.

건축이 의식을 바꾸려면 건축 디자인에 더해 ‘플러스 알파’가 필요한데, 그런 플러스 알파를 훌륭하게 첨가한 사례로서 SCL의 ‘삼각형 중목구조’에 주목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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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품아  세상을 품은 아이들  SCL  세컨찬스라이브러리  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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