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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현장] ‘냄새·박테리아·튀긴 꽃’이 한 공간에 어우러진 사연은

삼성문화재단 리움미술관, 아니카 이 작가 작업 세계 조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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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김금영⁄ 2024.10.17 09:26:13

아니카 이 '또 다른 진화가 있다, 그러나 이에는' 전시 전경. 사진=김금영 기자

‘냄새’, ‘박테리아’, ‘튀긴 꽃’. 전혀 아무런 연관 없어 보이는 이 존재들이 한 공간에 모여 어우러지며 예술의 장을 꽃피웠다. 이 모든 것들을 모은 주인공은 바로 아니카 이 작가.

삼성문화재단이 운영하는 리움미술관이 한국계 미국인 작가 아니카 이의 세계를 조망하는 아시아 첫 미술관 개인전 ‘또 다른 진화가 있다, 그러나 이에는’을 선보인다. 리움미술관은 세계적 미술 축제인 프리즈 기간에 맞춰 국내의 다양한 작가의 전시를 소개해 왔는데, 올해는 아니카 이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눈길을 끌었다.

아니카 이 '방산충 연작'이 설치된 모습. 사진=김금영 기자

작가는 2016년 구겐하임미술관 휴고 보스 상을 수상했으며 2021년에는 테이트 모던의 터바인 홀 현대 커미션 작가로 선정돼 공간을 유영하는 대규모 신작을 선보였다. 베니스 비엔날레(2019), 광주 비엔날레(2016) 등 유수 단체전에 참여한 바 있다.

시각 외에도 후각, 미각 등 다양한 감각을 작업에 끌어들이며 독특한 결과물을 만들어내 온 작가는 이번 전시엔 신작을 포함해 지난 10여 년 동안 제작한 작품 33점을 선보인다. 전시는 작가의 최근작에 방점을 두고, 이와 연결된 구작을 함께 전시해 작가의 전반적인 작업 세계와 최근 경향을 폭넓게 소개하는 자리로 구성됐다.

아니카 이 '생물오손 조각' 연작 중 한 점이 설치된 모습. 사진=김금영 기자

전시의 시작은 향이다. 두꺼운 커튼을 들추고 전시장 입구에 들어서면 알 수 없는 향이 눈에 앞서 먼저 코를 자극한다. 이후엔 마치 동굴에 들어온 듯 어두컴컴한 전시장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이 전시장 곳곳에 물감 등의 일반적 재료가 아닌 독특한 재료들로 만들어진 작품들이 자리한다. 앞서 언급한 박테리아, 튀긴 꽃 등이다.

튀긴 꽃으로 만들어진 신작 ‘생물오손 조각’(2024) 연작은 작가의 2000년대 작업에서부터 등장한 튀긴 꽃 작업의 연장선상에 있는 작품이다. 생물오손은 물에 잠긴 고체에 미생물이 붙어 자라면서 형성되는 생물막을 일컫는 말이다. 생물오손 조각 연작에서는 튀겨진 꽃의 기름진 외형과 시큼한 부패의 냄새가 뒤엉키며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꽃의 아름다움과 상반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비가시적이지만 존재하는 것들의 가치 그리고 변화

아니카 이, '튀긴 꽃' 연작. 사진=김금영 기자

작가가 관심을 갖는 이런 재료들은 비가시적이지만 분명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됐다. 냄새의 경우 눈에 보이지 않지만, 냄새분자를 통해 코로 들어와 그 존재를 분명 느낄 수 있다. 미생물 또한 너무 작아서 눈에 보이지 않아 그 존재가 하찮게 여겨질 수도 있지만, 세균이 없으면 생태계가 무너질 정도로 그 존재 가치가 분명하다. 작가는 이 비가시적인 존재들을 독창적인 작품으로 재탄생시켜 제대로 가시화해 주인공으로 만든다.

그리고 이 존재들은 전시장 안에서도 끊임없이 변화하는데, 여기엔 작가조차도 예측하기 힘든 변화들도 있다. ‘공생적인 빵’은 효모를 사용해 장의구조를 표현한 설치 작품, ‘절단’은 꽃을 기름에 튀긴 뒤 이를 부패시킨 작품인데, 재료의 특성상 전시 기간 내내 발효가 이뤄지고 있다.

아니카 이 '공생적인 빵'. 사진=김금영 기자

튀긴 꽃을 아크릴판 위에 배치한 2014년 작 ‘전기 고전파 Ⅳ’와 그 옆에 놓인 2022년 작 ‘후기 고전파 XVIII’에서도 변화가 보인다. 튀김옷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색된 과정, 또 튀김옷이 상하며 나는 시큼한 냄새가 이를 보여준다. 신작 ‘또 다른 너’(2024) 또한 해양 유래 형광 단백질을 발현하도록 유전자 조작된 미생물이 자라면서 계속 색이 변한다.

작가는 이런 통제 불가한 불확정성 요인까지 모두 예술로 둔다. 그는 “작가에게는 통제와 불확정성 요인 모두 작업에 있어서 중요하다. 작업 초기 단계엔 아이디어 콘셉트를 거쳐 작업의 큰 틀을 정하고, 이후 통제를 어디까지 유지, 포기해야 할지 생각해야 한다”며 통제와 불확정성 사이의 유연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음을 강조했다.

아니카 이의 신작 '또 다른 너'. 사진=김금영 기자

이런 과정들을 통해 작가가 궁극적으로 바라보는 건 모든 게 예측 가능한 ‘인간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경계를 해체하는 것이다. 그 경계는 인간과 비인간이 될 수도, 자연과 인공물이 될 수도, 삶과 죽음이 될 수도 있다. 각 경계는 배척되거나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상호 연결의 가능성이 있음을 창의적 활동으로 늘 탐구한다. 작가가 과학자, 건축가, 조향사 등 전문가들과 협업하고 생물학, 기술철학, 환경정의 등 다양한 영역을 폭넓은 연구를 이어 온 이유이기도 하다.

경계 해체를 통한 미지의 영역 탐구

전시 제목인 ‘또 다른 진화가 있다, 그러나 이에는’에서도 이 점이 엿보인다. 불교의 수행법 중 하나인 간화선(看話禪)에서 사용되는 화두의 특성을 차용한 것으로, 이 수수께끼 같은 구절은 작가 작업의 명상적이고 영적인 전환을 반영한다. 이 전환은 초기부터 각종 비인간 생물과 기계, 그리고 협업자들과 함께 작업하며 저자성(著者性)과 인간중심주의에 도전해 온 작가의 작업이 결국 ‘나와 타자의 경계 없음’에 대한 탐구였다는 것을 드러낸다.

대표적으로 작업의 전환을 보여주는 신작인 영상 작품 ‘산호 가지는 달빛을 길어 올린다’(2024)는 죽음 이후를 탐구하는 작가의 대규모 프로젝트 ‘공(公)’에 속하는 첫 번째 작품이다. ‘작가의 사후에도 작업이 계속될 수 있을까’라는 의문에서 출발한 작품으로, 아니카 이 스튜디오가 생산한 지난 10년간의 작업물을 AI(인공지능)에 학습시켜 만들었다. AI는 작가 스튜디오의 ‘디지털 쌍둥이’가 돼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낸다.

아니카 이의 신작 '산호 가지는 달빛을 길어 올린다'. 사진=김금영 기자

개미나 흙 속의 미생물 등 살아 있는 생물을 조력자 삼아 제작한 작업으로 삶과 죽음, 영속성과 부패 등의 실존적 주제를 다뤄 온 작가가 기계, 첨단 기술 등까지 아우르며 예술, 과학, 기술 분야의 경계를 허물고 자유롭게 이야기를 펼쳐나가는 과정을 이번 전시에서도 볼 수 있다.

전시를 기획한 리움미술관 이진아 큐레이터는 “지난 10년간 아니카 이의 주요 작업을 망라하고 작업의 큰 전환을 보여주는 신작을 처음 공개하는 전시로, 현재까지의 작품 세계를 돌아보고, 앞으로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기회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전시는 리움미술관에서 12월 29일까지.

한편 이번 전시는 중국 UCCA 현대미술센터와 공동 기획으로, 내년 3월 베이징 UCCA에서 이어서 열린다. 유수 필자가 참여해 UCCA와 공동 출판하는 전시 도록이 내년에 출간될 예정이다.

< 문화경제 김금영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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