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경제 = 이한성 옛길 답사가)
매월당의 유관동록(遊關東錄)을 읽으면 강릉에서 지은 시(詩)가 20여 편이 넘는다. 26세의 매월당은 1460년 늦은 봄과 초여름을 강릉에서 보낸 것 같다. 그가 어디에 머물렀는지는 알 길이 없는데 명승도 찾아다니고, 경물(景物)도 읊고, 바다를 바라보며 일찍이 갖지 못했던 심경도 토로하는 시들을 남겼다.
큰 바다를 보니 진시황의 불로(不老)와 불사(不死)가 덧없었는지 그를 딱하게 여기는 시도 남기고, 고래도 보고, 신기루도 만나고, 대숲에 와서 지저귀는 파랑새도 만난다. 이렇게 여러 날 머문 것을 보면 아마도 여건이 맞았다면 매월당은 강릉에서 오래 머물렀을 것이다. 그가 언젠가 말했듯이 떠돌이 삶이 어디인들 고향이 아니겠는가?
어느 날은 푸른 새집이 있는 대나무 숲에 새 죽순이 올라온 것을 보고 감탄한다. 한양에서 낳고 자란 그로서는 처음 그 모습을 접한다. 새벽으로 저녁으로 죽순을 캐어 맛을 보니 더없이 신선한 식감에 그만 반하고 만다.
송나라 소동파는 정치적 탄핵을 당해 남쪽 영표(嶺表) 지방으로 귀양을 갔는데 그때 하얀 색 죽순(竹筍)을 보고 옥판(玉版: 옥 같은 조각)이라 했다가 아예 화상(和尙: 스님)을 붙여 옥판 스님이라 불렀다. 매월당도 소동파를 흉내내어 죽순을 옥판이라고 시를 읊는다.
소동파는 더 남쪽 광동성 하이난(海南) 가까이까지 귀양을 갔는데 그때 열대과일 리치(荔枝: 여지) 맛에 반해 버렸다. 그는 시인답게 한 구절 읊었다. ‘매일 리치 삼백 알을 먹을 수 있으면 오랫동안 귀양살이도 마다 않겠노라(日啖荔枝三百顆 不辭長作嶺南人)’.
매월당도 호기롭게 읊는다. 소동파가 귀양지 영표(嶺表)에 있은 것처럼, ‘오랜 나그네 되어도 무방하니 옥 같은 맛있는 음식 배불리 먹었으면(不妨嶺表長爲客. 飽飫琅玕一味羞)’. 매월당에게는 죽순의 맛과 함께 대나무의 지조, 절개가 더 절실했을 것이다.
죽순을 맛보다
한양에서 나고 자라 게다가 북쪽에도 노니는데
처음으로 새 죽순 보니 영물로 솟았구나.
안개 헤치고 새벽에 자르니 뿌리도 연하고
이슬 맞고 밤에 캐니 겉 부분도 부드럽다.
오늘 아침 기꺼이 옥판화상(죽순)께 참례했는데
내일 청개구리 될까 수심도 일어나네.
객지(嶺表: 소동파의 귀양지)에 오랜 나그네 되어도 무방하니
옥 같은 맛있는 음식 배불리 먹었으면.
啖竹筍
生長京都又北遊. 初看新筍逬貓頭. 披煙曉折連根脆. 帶露宵抽抱籜柔. 却喜今朝參玉版. 還愁明日化靑蚪. 不妨嶺表長爲客. 飽飫琅玕一味羞
매월당은 이제 경포 앞 바닷가로 나간다. 우리 시대에는 경포대 해수욕장으로 잘 알려진 곳이다. 원산 앞바다 모래사장이 명사십리(鳴沙十里)라는 고유 지명이 되었듯이, 경포호 앞바다 모래사장은 백사정(白沙汀)이라는 고유 지명으로 불렸음을 대동여지도로 확인할 수 있다. 아쉽게도 우리 시대에는 잊혀 경포대 해수욕장으로 바뀌어 전국을 대표하는 해수욕장이 되었다. 560 여 년 전 이곳에서의 매월당의 봄날은 어땠을까?
백사정
이내 속 휘늘어진 나무는 구름 언덕에 있는 듯
고운 모래 가벼운 바람 십리 언덕이네.
섬 그림자 구름 그림자는 똑 같이 아득하고
솔바람 소리 파도 소리는 늘 벗하여 조잘대네.
이내 걷히니 고래 입 같은 파도소리 장엄하고
해 비치는 오산(鼇山) 머리 새벽빛이 빛난다.
물가 흰 갈매기 한가롭기 나 같으니
기심(機心) 없이 마주하며 봄 기운을 나눈다네.
白沙汀
依依煙樹似雲屯. 沙軟風輕十里原. 島影正同雲影杳. 松濤長伴海濤喧. 煙開鯨口波聲壯. 日射鼇頭曉色暾. 汀畔白鷗閑似我. 忘機相對弄春暄.
그는 갈매기와 기심 없이(忘機) 봄 기운을 나눈다. 기심(機心)이란 무엇일까? 전국시대 도가(道家) 집안 사상가 열자(列子)에게 이런 이야기가 있다.
바닷가에 갈매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매일 아침 바다로 나가 갈매기와 놀았고, 오는 갈매기가 백 마리나 되었으나 멈추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가 말하기를 “내가 들으니 갈매기가 모두 너와 놀러 온다 하니, 네가 한 마리 잡아오너라. 내가 가지고 놀고 싶구나” 하였다. 다음 날 바닷가에 나갔으나, 갈매기들은 춤만 출 뿐 내려오지 않았다(海上之人有好鷗者, 每旦之海上, 從鷗遊, 鷗之至者百住而不止. 其父曰: “吾聞鷗皆從汝遊, 汝取來吾玩之.” 明日之海上, 鷗舞而不下也.).
사전에는 기심(機心)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어떤 목적을 위해 교묘하게 꾀하는 마음’.
매월당은 그 봄날 기심(機心) 없이 갈매기와 봄 기운을 나누었구나.
불교 유적들이 즐비한 이유
고려시대 문신 노봉(老峰) 김극기(金克己)는 강릉의 아름다운 경치 여덟 곳을 노래하였다. 녹균루(綠筠樓: 푸른 대나무가 우거진 누각), 한송정(寒松亭), 경포대(鏡浦臺), 굴산종(崛山鐘: 굴산사의 종 소리), 안신계(安神溪), 불화루(佛華樓), 문수당(文殊堂), 견조도(堅造島).
후세에 이를 강릉팔영(江陵八詠)이라 한다. 이제 필자도 노봉과 매월당을 따라 굴산사, 한송정, 문수당을 찾아가 보련다.
우선은 강릉 시내 남쪽 구정면에 있는 굴산사지(掘山寺址)를 찾아간다. 당간지주가 드넓은 벌판에 서 있는데 과거 굴산사의 규모를 어림할 수 있다. 높이가 5m가 넘는 우리나라 최대의 당간지주로 군더더기 없는 위용을 자랑한다.
굴산사는 후기 신라의 선승 범일(梵日)국사가 창건한 사찰이다. 847(문성왕 9)년에 범일이 창건했다는 기록도 있고, 851년 명주도독 김공의 청으로 범일이 주석하였다는 기록도 있는데, 법일국사가 창건했다는 설이 일반적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범일이 당나라에 유학하였을 때 명주(明州) 개국사(開國寺)에서 왼쪽 귀가 떨어진 승려를 만났는데, 그는 자신이 신라 사람이라 하면서 집이 명주계(溟州界) 익령현(翼嶺縣)에 있다고 밝히고, 범일에게 본국에 돌아가거든 자신의 집을 지어 줄 것을 간청하였다. 847년에 귀국한 범일은 그 승려의 청에 따라 그의 고향이라 일러준 곳에 굴산사를 창건하고 가르침을 전했다고 한다. 범일은 후세에 대관령 서낭신으로 모셔져 단오 날이면 여서낭 집으로 내려오는 바로 그 강릉단오제의 주신(主神)이다.
굴산사는 범일에 의해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사굴산문(闍掘山門)의 본산으로 발전하였는데, 명주 지역 김주원 계의 지원에 힘입은 바가 컸을 것이다.
신라말에는 당나라 유학승이 넘쳐났다. 마치 우리나라 초창기에 미국이나 유럽에서 학위를 받으면 쉽게 학교나 연구소에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처럼 초기 유학승들은 쉽게 경주의 큰 절에 자리 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외국 박사학위를 받고도 일자리 찾기가 쉽지 않듯이, 신라말엔 유학승들의 취업난이 만만치 않았던 것 같다. 또한 그 당시 당(唐)나라에서 유행하던 선종(禪宗)은 신라 호국불교와도 거리가 있었다.
마침 지방 세력들이 커지는 시기와 맞물려 유학승들은 지방 세력의 지원 아래 구산선문을 열었다. 범일도 아쉽게 원성왕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강릉으로 온 김주원(金周元) 가문의 지원을 받아 사굴산문을 키웠을 것이다.
굴산사지에는 심하게 훼손된 비로자나불도 남아 있고, 아마도 범일국사의 승탑이 아닐까 여겨지는 보물로 지정된 승탑도 남아 있다. 또 재미있는 것은 학바위(鶴岩)와 샘(石泉)이다. 양가집 아가씨가 샘에 물을 길으러 왔다가 표주박으로 샘물을 마셨는데 표주박 안에는 해가 떠 있었다 한다. 그 뒤 배가 불러 아기를 낳았으니 처녀가 아기를 낳은 것이다. 수치스러워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학바위에 버렸는데 학들이 날아와 아기를 품어 보살폈다고 한다. 이 아기가 장성하여 범일국사가 되었다는 이야기. 범일국사는 매년 단오날이면 다시 찾아오지만, 고려 김극기가 들었을 굴산사의 종소리는 어디로 간 것일까?
매월당도 이 대찰에 들러 시(詩) 한 편 남길 만한데 흔적이 없다. 동국여지승람에 굴산사 기록이 없는 것을 보면 그 이전에 폐사된 것일까?
목은 이색 아버지의 영향력
이제 문수당과 한송정을 찾아가 보자. 가이드가 될 글이 남아 있다.
고려말 목은 이색(李穡)의 아버지 이곡(李穀)은 1349년 금강산과 동해안을 유람하고 동유기(東遊記)를 남겼다. 후세에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준 기행문인데 우리가 고교시절 배웠던 송강의 관동별곡도 그 영향 아래의 기행문이다. 이곡의 이 기행문으로 고려말 동해안의 모습을 살필 수 있다.
(1349년 9월) 12일에 강릉 존무사(江陵存撫使)인 성산(星山) 이군(李君)이 경포(鏡浦)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중략. 경포대 이야기임) 비 때문에 하루를 머물다가 강성(江城)으로 나가 문수당(文殊堂)을 관람하였는데,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의 두 석상이 여기 땅속에서 위로 솟아나왔다고 한다. 그 동쪽에 사선(四仙)의 비석이 있었으나 호종단에 의해 물속에 가라앉았고 오직 귀부(龜趺)만 남아 있었다.
한송정(寒松亭)에서 전별주를 마셨다. 이 정자 역시 사선(四仙)이 노닐었던 곳인데, 유람객이 많이 찾아오는 것을 고을 사람들이 싫어하여 건물을 철거하였으며, 소나무도 들불에 연소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오직 석조(石竈)와 석지(石池)와 두 개의 석정(石井)이 그 옆에 남아 있는데, 이것 역시 사선이 차를 달일 때 썼던 것들이라고 전해진다. 정자에서 남쪽으로 가니 안인역(安仁驛)이 있었다.
十二日. 江陵 存撫使星山李君侯于鏡浦. 方舟歌舞中流. (중략) 以雨留一日. 出江城觀文殊堂. 人言文殊,普賢二石像從地湧出者也. 東有四仙碑. 爲胡宗旦所沉. 唯龜跌在耳. 飮餞于寒松亭. 亭亦四仙所遊之地. 郡人厭其遊賞者多. 撤去屋. 松亦爲野火所燒. 惟石竈石池二石井在其旁. 亦四仙茶具也. 由亭而南. 有安仁驛.
이곡이 들른 문수당(文殊堂)은 한송정(寒松亭)과 가까운 곳에 흰 모래가 이어져 있어 자연스레 한송사(寒松寺)라 불렸는데, 지금의 남항진 해변과 강릉 남대천에 연(沿)하고 소나무 우거진 명승에 자리하고 있었다(남항진동 113-2 주소?).
고려 김극기는 그곳을 이렇게 노래했다. “절을 에워싼 옥 같은 계류와 봉우리, 청량한 경계는 지금도 옛과 같네(繞寺瑤溪與玉峰 淸凉境界古猶今)”. 김극기의 시처럼 지금도 남항진에 가면 옥 같은 남대천이 흐르고, 바다는 푸르다. 달라진 게 있다면, 문수당은 모래에 묻혀 흔적이 없고, 남대천에는 솔바람다리가 놓이고, 물 위로는 짚라인이 제비처럼 날아다닌다. 다리 건너에는 강릉항 여객터미널이 자리 잡고 있는데, 그 너머 안목해변은 강릉 커피 거리다. 문득 남항진 시원한 망치탕 한 그릇에 안목해변 커피가 생각난다.
그런데 이곡이 보았던 땅속에서 솟아나왔다는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 두 석상은 어찌 되었을까?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그 문수보살은 국보가 되어 오늘도 춘천박물관에 아이돌보다도 더 핸섬한 얼굴로 정좌해 계신다.
한편 보현보살은 목이 잘리고 한 쪽 어깨와 팔이 잘려나간 채로 오죽헌 시립박물관에서 모진 목숨 끊지 못하고 신음하고 계신다. 문수, 보현 두 협시보살(부처님 곁 좌우를 지키는 보살)이 있으면 응당 가운데 주불(主佛)이 계실 터인데 주불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다. 참 궁금하구나. 석가모니불이었을까? 비로자나불이었을까?
한편 문수보살이 쓰고 있는 모자(寶冠)를 보면 원통형의 높은 보관을 쓰고 있다. 월정사 보살좌상이나 신복사 터 보살좌상을 보아도 같은 형태다. 사굴산 산문의 보살 보관이 저런 모양이었나 보다. 목 잘린 보현보살의 머리를 찾으면 아마도 저런 관을 쓰고 계시겠지.
이곡보다 110년쯤 뒤 문수당을 찾은 매월당은 우리가 궁금해 하는 그 부처님을 영험하다 하였다. 문수당 앞에 핀 해당화 너머로 끝없이 푸른 바다를 보며 인간세상을 한 번 돌아보는 매월당의 한가로운 하루였다.
문수당
문수당은 동해 푸른 물결 곁에 있는데
해당화 꽃 속에 새소리는 짹짹
백사장 푸른 대나무에서 나그네들 헤어지고
푸른 바다 초가집 빠른 바람 불어가네.
옛 부처 영험하여 환상처럼 나투시고
이곳 승(僧)은 하릴없이 재(齋)에 앉았구나.
절집도 역시나 인간세상 움직임 같고
낡은 섬돌 풀 거칠게 반은 구름에 묻혔네.
文殊堂
寺在東溟碧浪涯. 野棠花裏鳥喈喈. 白沙翠竹客相送. 靑海黃茅風正喈. 古佛有靈能善幻. 居僧無事坐淸齋. 禪宮亦似人寰變. 古砌草荒雲半埋.
이제 찾아가는 곳은 한송정(寒松亭)이다. 일명 녹두정(綠荳亭)이다. 경포대와 한송정을 들르지 않으면 강릉에 들른 것이 아닐 정도로 빠질 수 없는 코스였다. 유명한 곳이기에, 고려 말 강릉 기생 홍장(紅粧)은 안렴사로 온 박신(朴信)과 이별하며 지은 애절한 사랑 시조를 남겼다.
한송정(寒松亭) 달 밝은 밤에 경포대(鏡浦臺)의 물결 잔(潺)한 제,
유신(有信)한 백구(白鷗)는 오락가락 하건마는,
어찌타 우리의 왕손(王孫)은 가고 아니 오는고?
[풀이: 한송정에 달이 밝게 비치는 밤, 경포대 물결이 잔잔한데,
신의 있는 갈매기는 오락가락하건만,
어찌하여 우리의 임(박신)은 가고 아니 오시는가요?]
신라시대 네 화랑도 들러 수련하며 차를 다려 마셨다.
아쉽게도 지금은 국가 주요 시설이 자리 잡고 있어 허가 없이는 들어갈 수가 없다. 그런 아쉬움에 이곳 풍호마을에서는 작은 녹두정(한송정)을 마을 연못 옆에 만들어 놓았다. 동국여지승람에는 “한송정(寒松亭): 부 동쪽 15리에 있다. 동쪽으로 큰 바다에 임했고 소나무가 울창하다. 정자 곁에 차샘(茶泉), 돌아궁이(石竈), 돌절구(石臼)가 있는데, 곧 술랑선인(述郞仙人)들이 놀던 곳이다”라고 하였다. 돌절구에는 고종 때 강릉 부사로 부임한 윤종의(尹宗儀)가 ‘한송정신라선인영랑연단석구(寒松亭新羅仙人永郞鍊丹石臼)’라고 새겼다 한다.
고려시대 안축은 한송정에서 시 한 수 읊었다.
한송정에 제하다(題寒松亭)
사선이 예전에 여기에 모였을 때
식객들은 맹상군의 문도 같았네.
상객은 구름처럼 자취가 없고
소나무는 불에 타서 남지 않았네.
신선 찾으려고 푸른 솔밭 생각하고
옛날을 생각하며 황혼에 서 있네.
오직 차 끓이던 우물만 남아
바위 옆에 그대로 있구나.
(근래에 소나무가 산불에 탔기 때문에 한 말이다.)
四仙曾會此, 客似孟嘗門. 珠履雲無迹, 蒼官火不存.
尋眞思翠密, 懷古立黃昏. 惟有煎茶井, 依然在石根. (松近爲山火所燒故云)
이 시를 보니 동해안 산불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사선(四仙)은 신라 효소왕(孝昭王) 때의 화랑들로, 영랑(永郞), 술랑(述郞), 남랑(南郞), 안상랑(安詳郞)이다. 매월당도 한송정에서 옛 자취를 살펴본다. 사선의 자취는 상전벽해(桑田碧海)가 되고 티끌 세상에 부초 같은 인생사 세월은 흘러갔다.
한송정
바닷바람 불다 말다 물결은 하늘에로 넘치고
소나무는 구름과 어울려 뜻밖에 거문고 줄 되었네.
깨진 섬돌 풀에 묻혀 여우 토끼 지나가고
해당화 떨어지고 자고새는 잠들었네.
신선의 옛 자취 상전벽해 되었는데
띠끌 세상 부초 같은 인생 세월은 흘러간다.
우뚝 높은 정자에 머리 돌려 바라보니
봉래산은 오색 구름 가에 자리했구나.
寒松亭
海風吹斷浪滔天. 松作雲和意外絃. 敗砌草埋狐兔過. 野棠花落鷓鴣眠. 神仙舊迹桑田變. 塵世浮生甲子遷. 獨上高亭回首望. 蓬萊島在五雲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