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는 전시는 많지만 반대로 남성들에 대한 이야기는 찾기 힘들다. 이런 가운데 가부장적 사회의 전형으로 꼽히는 한국사회에서 남성이 어떻게 인식되고 있는지 보여주는 전시가 등장해 눈길을 끈다.
아트선재센터에서는 '그만의 방: 한국과 중동의 남성성'전이 열리고 있다. 한국과 중동지역의 작가 25명이 참여해 남성담론에 내재된 문화, 정치, 사회적인 맥락을 짚는다.
한국과 중동지역을 선택한 이유는 남성성에 대한 이야기를 보다 흥미롭게 풀어낼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남성성'을 전시 주제로 잡고 조사를 하던 중, 미국과 유럽은 성적인 존재로서의 남성에 더 집중하는 모습을, 한국과 중동지역의 작가들은 사회적 구조 속 남성의 모습에 집중하는 모습을 발견했다. 그래서 비슷한 주제의식을 지닌 작가들의 작품을 모았다.
남성 우상주의 인식이 팽배했던 한국과 중동에서 현재는 남성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 생각해볼 수 있는 입체, 영상 작품들을 볼 수 있다. 바셀린으로 만든 갑옷, 투구, 권투장갑을 쓴 남자를 보여주는 백정기의 '바셀린 헬맷과 장갑', 굉장히 과장되고 경직된 자세로 "안녕하십니까" 하고 인사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송호준의 '안녕하십니까?' 등은 남성들이 자신들에게 부여된 이미지에 느끼는 부담감을 보여준다. 이밖에 다양한 작품들이 전시장 2, 3층을 가득 채우고 있다.
이 전시는 이혜원 교수의 아이디어에서 시작됐다. 전시를 기획안 이 교수는 "현 시대에는 남성들의 설 위치, 공간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10년 동안 한국을 떠나 있다가 돌아왔는데 과거와 비교해 봤을 때 여성과 관련된 전시는 비교적 많고, 여성 단체들도 활발한 활동을 하며 다양한 담론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남성이 자신의 이야기를 불쌍하게 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아 색다르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의 말인즉슨, 여전히 남성에게는 강인함과 막중한 책임감 등 이미지가 남아있긴 있지만, 정작 남성들이 느끼는 자신들의 정체성은 많이 달랐다는 것. 늘 여성보다 강해야 했던 남성은 점점 사라지고, TV 매체도 아버지의 부재 등을 다루며 외롭고 쓸쓸한 남성의 이미지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점을 확실히 느끼게 해준 계기가 개그맨 최양락의 이야기다.
"처음 이 전시를 생각한 것은 10년 전이고, 본격적으로 시작해봐야겠다 생각한 건 5~6년전 쯤이에요. 개그맨 최양락씨의 삶을 보고 전시를 결정했죠. 당시 TV에 최양락씨 가족과 집이 소개됐어요. 집에는 방 3개와 화장실 2개가 있었는데 안방은 부인의 방이었고 자식들이 나머지 방들을 꿰찼죠. 그리고 최양락씨는 자신의 방이 없어서 화장실 1개에 아무도 못 들어오게 자신의 공간으로 꾸몄어요. 자신의 축소된 위치를 인정하면서도 아기자기하게 공간을 꾸리는 그 딜레마가 흥미로웠죠. 이런 남성의 이야기를 전시로 꾸려보자 생각했습니다."
전시를 준비하면서 느낀 점은 정작 남성들이 자기 이야기를 하기 힘들어 한다는 점이었다. 여성 작가들은 구하기 쉬웠지만, 오히려 '남성성'을 주제로 한 전시에 남성 작가들을 구하기 어려웠다. 이런 전시 준비 과정 또한 순탄치 않았지만 흥미로웠다. 그리고 전시를 준비하고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변해가는 남성들의 정체성을 지켜보는 것도 신선했다고.
"과거 윗세대 남성들이 자신이 소속돼 있는 곳, 직책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했다면, 현 세대의 남성들은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가'가 더 중요해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중간 세대는 직업과 취향 사이에서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으려고 우왕좌왕하고 있죠. 앞으로는 점점 중요한 잣대가 '내가 관심있는 것'으로 가면서 보다 정체성을 확실히 잡을 수 있지 않을까 해요."
전시는 아트선재센터에서 다음달 25일까지 열린다. 굴순 카라무스타파, 김지현, 로미 아키투브, 리다 압둘, 박재영, 백정기, 서원태, 송호준, 시갈리트 란다우, 아크람 자타리, 아흐멧 오구트, 앤마리 자시르, 야엘 바타나, 오인환, 와파 빌랄, 윤수연, 이동용, 이상윤, 자히 하크몬, 칼레드 라마단, 칼레드 하페즈, 태미 고로빈슨, 하산 메르, 하산 쵸바시, 홍영인 작가가 참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