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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그레고어 힐데브란트] “감정을 노래하던 시대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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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503호 김연수⁄ 2016.09.30 12:46:42

▲전시장에 자신의 작품과 함께 있는 작가 그레고어 힐데브란트.(사진= 갤러리 페로탕)


요즘이야 음악의 가치가 너무도 낮아져서 온라인에서 소액의 돈만 지불한다면 어떤 종류의 음악이라도 고품질의 음향을 소장할 수 있게 됐지만, 따지고 보면 음향을 소유한다는 것 자체가 문화적 소양의 기준이 되던 시대는 사실 그리 먼 과거의 얘기도 아니다. 그리고 종이 책처럼 그 기준들은 레코드판이나 테이프 같은 물질적 실체로 존재했었다.

갤러리 페로탕에서 전시 중인 독일 작가 그레고어 힐데브란트(Gregor Hildebrandt)의 작품은 카세트테이프와 영상에 사용된 필름들, 그리고 레코드판들을 재료로 사용한 것들이다. 녹음 필름들로 촘촘히 수직으로 나열해 가득채운 화면은 완벽한 검정색이 아닌 필름 고유의 어두운 검은빛이다.

▲그레고어 힐데브란트, ‘Der Wald-Cure(숲-큐어)'. 캔버스에 카세트테이프, 74 x 92cm. 2016.


필름: 기록된 매체

힐데브란트의 작품에서 사용된 필름은 기록매체다. 특정 시간 혹은 경험이 집적된 물리적 흔적이다. 그것은 하나의 작품으로 집약돼 작품마다 의미를 다르게 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검은 화면일 뿐인 그 결과물들은 작가가 주는 힌트인 제목, 그리고 검은 화면 위에 새겨진 이야기들을 해석하는 관객의 상상력과 함께 완성된다.

이럼 작업 매체(재료)의 개념과 함께 장소-특정적(Site-specific) 방식, 즉 전시될 공간이 가진 이야기나 특성, 분위기에 어울리는 형상과 설치의 방식으로 선보이던 작가는 주로 커다란 규모의 작품을 선보이곤 했다. 그에 비해 이번 전시는 그렇게 크지 않은 평면 위주의 작품들을 선보이는데, 경복궁 옆 오랜 시간 동안 고즈넉한 분위기를 유지해왔던 팔판동 입구에 자리 잡은 갤러리의 아늑한 분위기에 꽤 잘 어울릴뿐더러, 감성적인 시선으로 접근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펼쳐진 것 같다.

전시장의 초입에 걸려있는 조그만 캔버스 작품은 카세트테이프 필름을 붙인 화면이 공기가 들어간 액정 필름처럼 울고 있다. 이번 전시 제목이기도 한 ‘더 큐어처럼 그림 그리기(Bilder malen wie Cure)’라는 제목의 작품은 그가 필름으로 작업을 시작한 초창기(1999년)작품이자 지금까지 지속하는 작업의 출발점이다. 지금은 작업방법을 개발해 캔버스와 필름 사이에 공기가 들어가는 일 없이 밀착돼 있지만, 처음 아이디어 스케치처럼 필름을 붙였을 땐 양면테이프를 사용했더란다. 시간이 지날수록  군데군데 양면테이프의 점성이 떨어져 화면이 울퉁불퉁 하게 된 것이다.

▲그레고어 힐데브란트, ‘Bilder malen wie Cure(더 큐어처럼 그림 그리기)'. 캔버스에 카세트테이프, 양면 테이프, 28.2 x 40.2cm. 1999.


‘더 큐어’ = 작업의 초창기

힐데그란트는 “이번 전시는 내가 이 작업을 시작할 초기로 다시 돌아간 것”이라고 했다. ‘더 큐어(The Cure)'는 작가의 학창시절 80~90년대를 풍미한 영국의 펑크록 밴드다. 당시 주류를 이뤘던 펑크록 그룹 중에서도 더 큐어는 보컬 로버트 스미스의 괴기한 화장과 번개 맞은 듯한 헤어스타일, 시각 이미지를 연상시키는 감각적인 가사와 선율 등 특유의 무거우면서도 몽환적인 선율로 거대 마니아층을 형성했다.

고전 문학과 음악에 관심이 많다는 작가는 이번 작품들은 오히려 덜 고전적이라고 설명하며, “더 큐어와 같은 음악이 지금은 대중적이라고 느껴지지만, 당시는 그런 정서와 함께 특별한 공동체가 형성됐다. 그 시대는 감정적인 것들을 노래하는 시대였다”고 전한다.

이번에 선보이는 작품들은 ‘더 큐어처럼 그리기’를 제외하고, 하나의 캔버스마다 더 큐어의 곡들 중 한 곡이 반복적으로 입혀져 있는 평면 작품 및 조개 모양으로 가공된 더 큐어의 레코드 판이 탑처럼 쌓인 입체 작품 ‘큐어 장식(Cure Ornament)’, 더 큐어의 뮤직비디오 ‘Hanging Garden(공중정원)’의 한 장면을 화강암에 인쇄한 ‘o.T(헤르미아)’ 등 모두 이번 전시를 위해 제작한 신작들이다.

▲압축 가공한 더 큐어의 레코드 판이 탑처럼 쌓인 입체 작품 ‘큐어 장식(Cure Ornament)’의 부분 이미지.(사진=갤러리 페로탕)


작품을 처음 마주치면 느닷없는 검은 화면에 당황할 수도 있다. 단색 추상화를 처음 마주했을 때와 같은 갑갑함이 들 수도 있다. 개념 미술의 선입견이 작동해 머리로만 이해하려 들 수도 있다. 하지만 이번 전시에서만큼은 오래된 필름에 주목해야 할 것 같다.

카세트테이프는 더 이상 생산되지 않기에 힐데브란트는 벼룩시장에서 구해 온 카세트테이프를 사용한다. 오래된 필름의 색은 그것이 얼마나 많은 시간을 담고 있는지를 말하고, 작가는 그 색을 그대로 제시한다. 역시 벼룩시장에서 구한 더 큐어의 레코드판과 차가운 돌 위에 새겨진 옛날 뮤직 비디오의 질감은 이번 전시를 매체의 개념보다 향수의 기록으로 느끼게 한다.

비록 더 큐어의 음악을 알지 못하더라도, 더 큐어를 알지만 번개 맞은 머리 모양의 로버트 스미스의 이미지가 전시장에 없더라도, 반짝임이 닳아 없어지는 대신 색의 깊이는 더해진 오래된 테이프 필름들은 그것이 늘어질 때까지 좋아하는 곡을 반복해 듣던 시절을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전시는 11월 12일까지.
 

▲그레고어 힐데브란트, ‘Plain song-Cure(플레인 송-큐어)’. 캔버스에 카세트테이프, 174 x 274cm.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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