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기업 - 위메프] '재밌지 않은' 정우성이 셀프디스 하는 재미
물류에서 손떼며 영업손실폭 줄인 위메프의 새출발 선언
▲위메프의 광고 '쇼핑은 언제나 목마르다: 특가대표 위메프' 편의 한 컷. (사진 = 광고화면 캡처)
소셜커머스 업체 '위메프'가 4월 2일 새 TV 광고를 공개하며 브랜드의 변화를 알렸다. 기존의 슬로건인 ‘싸다 위메프’를 4년 만에 새 슬로건 ‘특가대표’로 바꾸고, 1990년대부터 톱스타로 군림해온 정우성을 새 메인 모델로 등장시킴으로써 ‘싸구려라서 싼 것’이 아니라 ‘고급 제품을 특가로 판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정우성이 다른 광고에서처럼 멋있고 고급스럽지 않다. 정우성이 극 중 연인에게 외치는 “가! 가란 말이야!”라는 대사는 “가란 말이야. 특가란 말이야. 위메프 특가란 말이야”라며 카피로 전개되는데, 이 맥락 없는 말장난이 새로운 슬로건인 ‘특가’를 효과적으로 강조하고 기억시키고 있다.
“뭐지? 이 근본 없는 패러디는?”
이 광고는 방영되자마자 시청자들로부터 제법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메인모델 정우성에게서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코믹한 광고라는 점도 주목받고 있지만, 정우성 자신이 17년 전에 출연했던 광고를 스스로 패러디하고 있다는 점이 많은 시청자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고 있다. 시청자들은 “근본 없는 패러디”라거나 “인생 최고의 병맛 광고”라는 댓글을 달고 있는데, 이는 욕이 아니라 참신하고 웃긴다는 긍정적 평가다.
“가! 가란 말이야!”라는 대사로 아련한 향수를 자극하는 원작은 지난 2000년 정우성과 장쯔이가 출연했던 음료 ‘2% 부족할 때’의 광고였다. 이 광고는 그 해에 가장 화제가 된 광고 중 하나였다. 청년 정우성이 낙엽을 던지며 외치던 저 대사가 널리 유행하면서 ‘2%’ 음료수도 히트 상품으로 등극했다.
이 ‘2%’ 광고는 당시 한창 유행하던 드라마타이즈(dramatized) 형식의 광고였다. 남이섬의 수려한 풍경 속에 서있는 한중 톱스타 커플이 멜로 영화의 애틋한 한 장면을 연상시킨다. 이때의 ‘2%’ 광고 시리즈는 모두 드라마타이즈 구성으로, “사랑은 언제나 목마르다”라는 카피 아래 젊은 연인들의 진심이 어긋나는 순간들을 묘사했다. 특히, 전지현이 양다리를 걸치는 장면을 들키는 에피소드처럼, 로맨틱하기보다 발칙하고 도발적인 상황들을 다뤄 화제가 됐다.
그중에서도 정우성의 에피소드가 가장 인기가 많았고, 패러디도 많이 등장했다. 이 광고는 그해 각종 개그 프로그램이나 시트콤에서 가장 많이 패러디된 콘텐츠 중 하나였다. 나중엔 '광고 패러디 광고'도 나왔다. 수 년 전 ‘바빌론’이라는 대부업체가 ATM 기계와 헤어지려는 남자가 등장하는 패러디 광고를 제작·방영한 바 있다.
▲2000년 방영된 롯데칠성 '2% 부족할 때' 광고. (사진 = 광고화면 캡처)
멋있지만 2% 부족했던 원작
한 영화감독은 “가란 말이야” 광고의 남다른 인기와 활발한 패러디 현상이 일어난 것은 당시 정우성이라는 배우의 미묘한 포지션 때문이었을 것으로 분석했다.
정우성은 한국 최고의 청춘영화로 꼽히는 ‘비트’를 위시한 여러 작품들을 통해 ‘방황하는 청춘의 아이콘’으로 굳건히 자리 잡고 있었다. 손창민, 최재성, 최민수 등 앞선 세대의 청춘스타나 이병헌, 이정재, 장동건 등 동년배 청년 스타들도 많았지만, 이들 중 방황, 우울, 반항 등의 수식어로 점철된 20대 캐릭터를 정우성만큼 자주 연기한 배우는 없었다. 은막에서의 그는 방황하는 청춘이 아니면 스타일리시한 느와르의 고독한 킬러였다. ‘무사’, ‘중천’ 같은 사극에서도 좀처럼 웃지 않는 캐릭터만 맡았다.
정우성은 누구보다 멋있고, 폼나고, 믿기지 않을 만큼 잘생겼지만 그런 만큼 친근함이나 편안함 같은 단어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에게서 젊은이 특유의 밝은 에너지와 유머를 기대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뛰어난 연기력으로 다양한 캐릭터를 맡으며 변신을 거듭하던 이병헌과 달리 정우성은 주로 고독, 우울 같은 이미지로만 소비됐다.
이 영화감독은 ‘2%’ 광고에 대해 “28세의 성공한 스타인 정우성이 여전히 감정 조절에 미숙한 청춘으로 등장하는 것은 고민 없는 자기 복제였을 뿐”이라며 “관객은 정우성이 멋있다는 것은 인정해도, 그가 연기하는 캐릭터에는 피로감을 느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 근거로 당시 정우성이 쉬지 않고 광고를 찍는 톱스타이긴 했어도 1994년 데뷔 후 2004년 ‘내 머리 속의 지우개’ 전까지 내세울만한 흥행 영화가 ‘비트’뿐이었다는 사실을 언급했다.
또한, “게다가 이 광고에서 그의 감정 표현은 너무 과해서, 시청자가 현실 연애에서 느낄만한 답답함의 정도를 넘어선다”고 꼬집었다. 즉, 당시 시청자들이 이 광고에 보인 반응은 공감대에서 비롯된 보편적인 안타까움이 아니라, 비현실적으로 드라마틱한 감정과 오버액션에 대한 조소에 더 가깝다. 공감하기엔 너무 멋지고 처절하다는 점 때문에 낯선 구경거리가 된 것이고, 다양하게 패러디되며 17년 동안이나 놀림감이 되었던 셈이다.
▲1997년 '비트'(위)와 2017년 '더 킹'에서의 정우성. (사진 = 삼성영상사업단, NEW)
최고의 패러디는 자기 패러디
이번 위메프 광고는 정우성의 원작을 정우성 본인이 패러디하고 있다는 점에서 여느 패러디와는 다르다. 이런 자기 패러디의 대표적 사례라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고 활동을 중단했던 연예인이 ‘SNL 코리아’ 같은 풍자 코미디를 통해 활동을 재개하며 보여주는 ‘셀프 디스’를 들 수 있다.
자신의 발목을 잡고 있던 과오나 약점을 솔직히 인정하고 직시한 뒤, 그것을 관객과 함께 웃음으로 승화시키는 과정은 고해성사나 씻김굿 못지않은 치유의 의식이다. 그리고 이수근이나 이상민 등이 자기 패러디를 통해 무난히 새로운 전성기를 누리게 된 것을 보면 효과 또한 만점이 아닐까 싶다.
정우성에게 떨쳐내야 할 과오나 약점은 없어 보인다. 다만 이제 중년의 향기가 풍기기 시작한 45세 배우로서, 방황하는 청춘이나 고독한 킬러 같은 이미지에 천착하기보다 좀 더 유연한 행보를 시작할 필요를 느낀다면, 조금씩 망가져보는 것은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연예계 대표 금수저에 엄친아, 차도남 이미지가 강했던 이서진이 새 예능 대세로 떠올랐던 선례가 있다. 여기엔 그를 ‘꽃보다 할배’에 강제 캐스팅해 이서진만의 독특한 캐릭터를 찾아낸 나영석 PD의 공이 가장 크다. 그런데 이서진이 단단한 껍질을 자기 의지로 깬 첫 사건은 아마도 복고풍 디스코바지를 입고 이소룡의 목소리를 흉내 내며 “싸다~”를 외쳤던, 2013년 ‘싸다 위메프’ 론칭 광고였을 것이다.
정우성 본인도 대중에 더 가까이 다가가려는 시도를 해 왔다. 2010년 그는 무려 14년 만에 TV로 돌아와 드라마 ‘아테나: 전쟁의 여신’과 ‘빠담빠담’을 연이어 찍었고, 2013년 흥행 영화 ‘감시자들’부터는 매년 한 두 작품씩 꼬박꼬박 영화를 찍고 있다. 그가 맡는 캐릭터도 악질 경찰, 비리 검사, 불륜을 저지르는 대학 교수 등등 다채로워졌다.
또한, ‘런닝맨’, ‘무한도전’, ‘비정상회담’ 같은 예능 프로그램에도 출연했다. 비록 영화 홍보가 목적이긴 하지만, 매번 “나 원래 재밌는 인간”이라는 점을 적극적으로 어필했다. ‘더 킹’에서 최강 권력을 틀어쥔 검사로 나와 최신 가요 안무를 외워 추며 유들유들하게 놀던 정우성을 보면, 멋과 카리스마에 유연함까지 추가로 장착한 풀 옵션 업그레이드 버전 배우가 된 것 같다. 정우성의 이번 위메프 광고는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는지도 모른다.
▲위메프 매출액 및 영업손실 추이. (자료 = 위메프)
변화와 반등의 계기
이번에 변화를 선언한 주체는 물론 광고 모델이 아니라 광고주인 위메프다. 변화의 필요성이 더 절실한 쪽은 정우성이 아니라 위메프다.
2010년 ‘위 메이크 프라이스’로 출범했던 위메프는 동종 업체인 쿠팡·티몬과 3자 구도를 굳건히 하며 차근차근 성장했었다. 그러나 2~3년 전부터 자영업자나 수습직원들을 상대로 한 ‘갑질’ 횡포 논란이나 그에 따른 불매운동 등 악재를 연달아 맞이하면서 신뢰도에 타격을 입었고, 투자를 받는 데 곤란을 겪었으며, 경쟁에서도 점점 밀리는 분위기였다.
위메프는 기업 이미지 쇄신과 실적 개선을 위해 노력했고, 4월 6일 공시된 감사보고서에 따르면 2016년 매출을 전년대비 70.5% 늘이면서 영업 손실 규모를 1000억 원이나 줄여, 20.5% 성장세를 기록하는 동시에 수익성도 높이는 데 성공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대해 위메프 관계자는 경쟁사와 달리 물류에서 눈을 떼고 쇼핑 서비스의 본질인 가격 경쟁력에 집중한 결과라고 밝혔다.
위메프는 모처럼 잡은 반등의 기세를 2017년에도 이어가기 위한 계기가 필요했고, 슬로건을 교체했다. 룰라의 1995년 히트곡 ‘날개 잃은 천사’의 코러스 부분을 “싸다 싸다~”로 개사한 대작 뮤직비디오 콘셉트의 광고를 통해 ‘싸다’ 슬로건을 한 번 더 강조했던 것이 불과 두 달 전이었으니, 이번 슬로건 교체는 과감한 결단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싸다’라는 슬로건의 부정적 의미에 대한 우려가 꾸준히 제기되어 왔던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다. 가격 경쟁력을 가장 쉽게 어필하는 슬로건이긴 했지만, ‘싸구려’를 연상시킬 수도 있는 슬로건이라는 평가가 2013년 론칭 당시부터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새 슬로건 '특가대표'는 싸구려 같은 부정적 요소 없이도 가격 경쟁력이라는 강점을 잘 살렸다는 평가다. 여기에 국가대표를 연상시키는 언어유희가 쉽고 재미나며, 업계를 리드하겠다는 자신감까지 드러난다. 위메프의 슬럼프는 기존 슬로건 탓이 아니었지만, 바뀐 슬로건 자체에 대한 반응은 일단 긍정적인 것으로 보인다.
윤지원 yune.jiwon@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