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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없는 왕비, 명성황후 그리고 대한제국 황실의 사진들

사진으로 본 대한제국의 탄생과 이씨왕조의 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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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300호 왕진오⁄ 2012.11.18 14:09:43

얼굴 없는 왕비로 비운의 삶을 살았던 명성황후의 진짜 모습은 그 어디에서도 확인 할 수가 없는 것일까?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는 사진 속의 모습은 여전히 진위 논란 속에 놓여있는 세 장의 사진이 전부로 알려지고 있다. 명성황후(1851∼1895)는 여성부원군(驪城府院君) 민치록(閔致祿)외동딸이다. 쇠락한 가문의 딸로 태어났지만 안동 김 씨와 풍양 조 씨 등 외척의 세도를 약화하려는 대원군에 의해 15세에 고종의 비로 간택되었다. 대원군을 견제하면서 고종의 친정을 실현했고, 1894년 이후에는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득세하자 러시아 세력을 끌어들여 일본 세력을 견제하려 했다. 이에 반감을 품은 주한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가 사주한 낭인들에 의해 1895년 건청궁 옥호부에서 살해되었다. 1879년 대한제국 선포와 함께 명성황후로 추존되며, 그 해 11월 청량리 홍릉에 안장되었다. 이후 1919년 고종이 사망한 후 남양주 홍릉에 고종과 함께 합장된다. 많은 외국인과 조선인들은 조선의 왕실 인물들이 신문과 잡지의 도판, 사진엽서, 사진첩 등의 형태로 유통되던 1890년대부터 나라를 지키려다 시해당한 왕비 혹은 시아버지인 대원군과 대립하며 국정을 좌지우지한 여걸로 각인된 명성황후의 모습을 사진 이미지로 보고 싶어 했다. 그러한 욕구는 끊임없이 '명성황후 사진'의 출현을 고대하게 만들었다. 명성황후 사진의 진위 논란은 세 종류의 사진을 둘러싸고 일어났다. 첫째는 평복 차림의 젊은 여인이며, 둘째는 원삼을 입고 어여머리에 떠구지를 한 여인이며, 셋째는 모시옷에 부채를 들고 찌푸린 얼굴로 앉아 있는 여인이다. 이 사진들은 1890년대와 1900년대에 발간된 여러 외국의 잡지와 석판인쇄물, 저서, 사진첩들에 서로 다른 제목들이 붙여진 채 유포되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이들 사진은 추정만 될 뿐 '명성황후'라고 확증될 만한 사진은 세상에 공개되지 않고 있는 상태다.

'평복 차림의 젊은 여인의 사진'이 처음 등장한 것은 이승만의 '독립정신'(1910)에서다. 이후 이 사진은 평복 차림이라는 점으로 인해 '처녀 시절의 명성황후' 혹은 '임오군란 당시 피신 중의 명성황후'라는 주장을 낳았다. 그러나 문일평은 '사외이문'(史外異聞, 1934년 3월 2일, 조선일보)을 통해 이승만의 책으로부터 시작해 당시에 흔히 신문 잡지에 나도는 명성황후의 사진이 모두 '안본' 즉 가짜라고 하면서 이 사진을 명성황후의 얼굴을 알 만한 사람에게 보였으나 진본이 아니었다고 말하고 있다. '원삼에 어여머리를 한 여인'의 초상은 교과서에 명성황후로 실릴 정도로 오랫동안 '진본'으로 알려졌다. 이는 1895년에 프랑스에서 발행된 '일러스트레이션'과 '코리아'에서 이 사진의 주인공을 '조선의 왕비'로 소개한 것에 근거한다. 이 사진은 외국인이 쓴 한국 기행문에도 자주 등장하는데, '궁녀'로 소개된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사진 속 여인의 머리 모양과 복식이 왕비의 것일 수 없다는 주장이 강력하게 제기됐다. 아울러 명성황후의 시의를 지낸 릴리아스 언더우드의 '토미 톰킨즈와 함께 지닌 조선'등에서는 같은 사진이 '성장한 조선 여인'으로 기술되고 있다. '가채를 하고 얼굴을 찌푸린 채 부채를 들고 있는 여인'의 사진이 주목 받게 된 것은 영국의 수집가 테리 베닛이 2006년에 공개한 사진첩 때문이다. 여기에서 이 사진은 독어로 '시해된 왕비'라고 기술되었고, 함께 수록된 흥선대원군의 사진과 똑같은 배경이었다. 그러나 1891년 발간된 '국립박물관 보고서'에서는 '한국 궁중에서 시중드는 여인'으로 기술되고 있으며, '극동 아시아의 제 문제'에서는 '시중드는 하녀'로 소개되었다. 더욱이 흥선대원군의 사진과 동일한 배경 역시 과연 적대적인 두 사람이 한 공간에서 사진을 촬영했겠는가 하는 점을 들어 회의론이 제기되었다. 이에 대해 최봉림 한국사진문화연구소장은 "명성황후의 사진이 없는 이유가 나라를 지키려다 시해당한 왕비 혹은 시아버지 흥선대원군과 대립하며 국정을 좌지우지한 여걸로 각인된 민비가 살해 위협으로 인해 당시 왕실의 유행이었던 사진을 촬영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사진으로 본 대한제국의 탄생과 이씨왕조의 몰락 1880년대 촬영된 대원군 초상에서 시작하여 1989년 영친왕비의 죽음을 기록한 대한제국 황실의 다양한 사진 200여 점이 '대한제국 황실의 초상:1880-1989'전을 통해 11월 16일부터 내년 1월 31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미술관에 공개된다. 이 자리에는 사진으로 본 근현대 이씨왕조 일원들의 영욕의 세월 100여 년이 담겨있다. 이 시간 속에는 임오군란에서 비롯된 대원군의 천진 억류와 을미사변이 야기한 아관파천, 13년 만에 몰락한 대한제국의 기념물과 일본 제국주의의 중심부로 끌려간 영친왕의 행적이 있고, 이씨왕조 후예들의 광복 이후의 삶이 있다. 우리 역사상 최초이자 마지막 황실이 탄생한 '대한제국기'를 출발점으로 격동의 역사와 운명을 함께 한 황실 인물들의 삶을 기록한 국립고궁미술관, 서울역사박물관, 스미스소니언미술관 등 국내외 여러 기관에서 빌려온 도서 자료가 함께한다. 전시되는 사진들은 역사적 장소로 그때, 거기서 일어났던 그 사건, 그때 거기에 있었던 그 인물을 상기시킨다. 경복궁의 옥호루(玉壺樓)는 민비를 시해한 일제의 만행을 상기시키고, 덕수궁의 중명전은 고종황제의 마지막 구국의 시도를 떠올리게 하며, 함녕전은 그의 말년과 죽음을 환기시킨다. 창덕궁의 낙선재는 그곳에서 삶을 마감한 이씨왕조의 마지막 왕세자비인 이방자 여사를 추억케 한다. 사진 속 인물들 곁에 함께한 그들의 공간 사진들은 이씨왕조의 마지막 일원들이 행했던 역사적 시도, 그들이 겪었던 비극을 현장사진의 강도로 환기시키고 있다. 이번 전시는 비극의 역사 속으로 사라져간 이씨왕조의 가계에 보내는 진심 어린 조사로서, 비극의 역사도 혹은 치욕의 역사도 대한민국의 과거를 소중히 거둬들이는 성숙한 역사의식의 도래를 희망하는 기원문으로서 오늘에 시점에서 그들을 바라보는 소중한 시간으로 다가온다. 왕진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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