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에 관심이 높아지면서 많은 이들이 걷기에 나선다. 이름도 아름다운 걷기 코스들이 발굴됐다. 숲과 구릉이 어우러진 트레킹코스부터 가볍게 만날 수 있는 강가나 공원길도 많아 마음만 먹으면 항상 즐겁게 걸을 수 있다. 그런 길을 걸으면서 안타까운 것이 그 길 위에 소프트웨어를 얹으면 어떨까 하는 일이다. 역사와 전설이 있는 길에는 역사와 전설을 얹고, 생태계가 아름다운 길은 식생(植生)의 이야기를 얹고, 지질(地質)이 특이한 길은 지구 이야기를 얹으면 의미가 깊어질 것이다. 이번에는 남한산성(南漢山城) 절터를 찾아가는 길로 나서 보련다. 남한산성에는 우리가 흔히 남한산성이라고 부르는 본성(本城, 또는 原城)과 본성 방어를 위해 훗날 쌓은 3개의 외성(外城)이 있다. 오늘은 본성의 절터를 찾아가는 날이다. 남한산성 본성 사찰은 승근(僧軍)의 거처 남한산성 본성에는 천주사(天柱寺), 국청사(國淸寺), 옥정사(玉井寺), 장경사(長慶寺), 망월사(望月寺), 한흥사(漢興寺), 남단사(南壇寺), 개원사(開元寺) 모두 8개의 사찰이 있었다. 옥정사와 망월사는 본래부터 산성 안에 있었던 절이며 나머지 6개의 절은 남한산성 축성(築城) 전후로 지어진 절이었다. 이 절들의 역할은 산성방어를 위한 승군(僧軍)들의 거처였다. 그들은 불도(佛道)를 닦는 한편 산성방어군 의무를 수행하는 사람들이었다. 1779년(정조3년) 8월초에 정조는 여주에 있는 세종의 능 영릉(英陵)과 효종의 능 영릉(寧陵)을 참배한 일이 있었다. 이 때 정조는 남한산성 행궁(行宮)에 여러 날 머물면서 광주목(廣州牧)의 사정과 남한산성 방어 현황을 일일이 점검했다. 이 때 승군도 점검을 받는다. 융복(戎服:전투복)을 차려 입은 임금이 각 사찰 승군들을 연병장에 집합시키고는 방진(方陣: 사각형으로 펼치는 전투대형)과 원진(圓陣:원형의 전투대형)을 펼칠 것을 명령했다. 결과는 어떠했을까? 실록에 남아 있는 그 날의 기록을 보자. “승군들이 방진과 원진을 법식대로 펼치니 임금께서 이르시기를: ‘훈련받지 않은 군사들이 오히려 절제함을 아는구나, 가상하도다’(僧軍等列成方陣、圓陣如. 上曰: ‘不鍊之兵, 猶知節制, 可尙也’).”
승병들은 평소에도 의무를 게을리 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든든한 산성방어의 거점이던 사찰들이 빛을 잃어간 것은 고종(高宗) 연간부터였다. 1894년에는 산성을 지키는 승군 운영제도인 승번제도(僧番制度)제도가 폐지됐다. 의병의 근거지가 될 것을 두려워한 일제(日帝)는 1907년 8월 각 사찰에 비축돼 있던 무기와 화약을 폭발하고 절을 소실(燒失)시켰다. 이렇게 280년여 산성을 지켜오던 남한산성의 절들은 역사에서 사라져 갔다. 다행히 국청사, 장경사, 개원사, 망월사는 근년에 중창했으나 천주사, 옥정사, 한흥사, 남단사는 아직도 깨어진 기와로 남아 그 날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제 성벽의 안쪽 길을 따라 걸으며 절터와 중창한 절을 찾아가 보련다. 약 8km의 산성 길에 절터를 다녀오는 길을 조금 더하면 거리는 조금 늘어날 것이다. 8호선 산성역 2번 출구에서 탄 버스가 남문(至和門)을 지나 30여기의 공덕비(功德碑)를 세운 곳 앞에서 내려 준다. 출발은 남문을 올라 성벽길로 가든지 힘들면 남문 앞에서 우향우, 수어장대 방향 시멘트 포장길로 오른다. 수어사 산성 방어하던 김석주의 아련한 시 1km를 못가서 정자(영춘정)를 세워놓은 천주봉을 만난다. 아래쪽에 평탄지가 펼쳐져 있는데 행락객들이 쉬어 갈 수 있게 나무의자와 탁자를 설치해 놓았다. 이곳이 천주사(天柱寺)터인데 중정남한지(重訂南漢志)에는 누(樓) 앞에 연못이 있다 했으나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 없다(天柱寺在西將臺下樓前有池). 여고동창생 같은 몇 분이 배낭에서 과일과 커피를 꺼내 먹는다. 이른 봄 영춘(迎春)하러 나선 길인가 보다. 훗날 수어사(守禦使)로 산성을 방어하던 김석주(金錫冑)는 시 한 수 읊었다. 千古溫王迹渺然(천고온왕적묘연) 그 옛날 온조대왕 자취도 묘연한데 白登遺恥淚痕邊(백등유치루흔변) 백등에서의 남은 수치 눈물진 변방일세 山僧不關興亡事(산수불관흥망사) 산승은 흥망사가 관심사 아니라서 獨向晴窓課法蓮(독향청창과법련) 맑은 창 홀로 행해 연화경을 공부하네 ..................................................................... *白登: 한나라 유방이 흉노에게 포위되어 고전한 전장 시인은 이 터를 빼앗기고 남쪽으로 간 백제를 생각하며 회한에 젖는다. 이 산성과 광주 방어를 맡은 수어사로서 여러 느낌이 있었을 것이다.
절터를 떠난다. 수어장대로 향하는 길은 다소 가파른 나무층계가 놓여 있다. 층계를 오르면 성벽 아래로 암문이 나타난다. 서암문(제6암문)인데 청군(淸軍)에게 포위돼 있던 1637년(인조 15년) 1월 23일 공격해 오던 적병을 물리친 승리의 현장이라서 파적지(破敵地)라 한다. 잠시 후 우측 봉우리가 본성 최고봉인 청량산(淸凉山,483m)이다. 정상에는 수어장대(守禦將臺, 西將臺)가 자리하고 있다. 동서남북 4 장대(將臺)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장대이다. 이층 누(樓)에는 봉림대군(효종)의 심양 생활과 북벌의 정신을 잊지 말자는 뜻으로 후세 영조(英祖)가 무망루(無忘樓: 잊지 말자는 누각)라는 편액의 글씨를 썼다. 그 옆으로는 생뚱맞은 비석 하나가 삐죽 서 있다. ‘리대통령각하 행차 기념식수 단기 4286년 9월 6일’. 1953년 9월 6일 이승만 대통령이 남한산성을 방문해 기념식수한 사실을 이 곳 책임자 누군가가 비석으로 세운 것이다. 국어의 두음법칙(頭音法則)을 어겨가면서까지 이(李)를 ‘리’로 부르고 나무 하나 심은 것까지 비석을 세운 그 시대 아랫것들의 행태(行態)가 꼴사납다. 우리 시대에 윗사람 모시는 이들도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야 할 일이다. 아랫사람의 행태가 두고두고 윗사람을 우습게 만들고 자신도 후세에 꼴볼견으로 남는다는 사실을. 어찌 이런 일이 1950년대에만 있었겠는가. 전임 대통령의 내곡동 사저 문제가 터졌을 때 나는 이 비석이 생각났다. 이 비석 앞쪽으로는 바위 하나가 자리하는데 ‘守禦將臺’라는 각자(刻字)가 우람하다. 그러나 이 바위는 ‘매바위’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고 아픈 전설이 담겨 있다. 남한산성 축성 때 동남쪽 부분은 이회 장군이, 서북쪽은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 각성(覺性)스님과 응성(應聖)스님이 책임을 지고 쌓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회 장군이 맡은 구역은 제 날짜에 축성이 이루어지지도 않고 비용도 부족해 공사진척이 지지부진했다고 한다. 이 사실을 안 장군의 부인 송씨와 첩실 유씨는 호남으로 모금활동을 떠나 공사비를 모아 돌아왔다. 그러나 장군은 이미 참수(斬首) 당한 뒤였다. 참수당한 이회 장군의 억울함 전하는 매바위 장군이 참수를 당하는 순간 수어장대 앞 바위에서는 매 한 마리가 날아올랐다 한다. 장군의 억울한 사정을 바위는 알았는지 매를 날려 그 충절을 나타낸 것이었다. 그 후 이 바위는 매바위라는 이름을 얻게 되어 이회 장군의 억울함을 전하도 있다. 그러면 송씨 부인과 유씨 부인은 어찌되었을까. 모금해온 쌀을 모두 송파강에 던지고 물로 뛰어 들어 자결했다 한다. 쌀을 던진 곳 송파나루 앞은 쌀섬여울이라 불리게 됐고 이들이 자결한 한강과 탄천이 만나는 위치 옆 무동도(舞童島) 근처에서는 궂은 날이면 여인네 울음소리가 들렸다 한다. 이들의 넋을 위로하려고 잠실동 313-1번지 부근에 부군당(府君堂, 호구부인당, 애기씨당)을 세웠는데 1971년 잠실이 개발되면서 이제는 이야기로만 남았다.
한편 이회 장군의 넋은 어찌 되었을까? 수어장대 좌측 아랫단에는 청량당(淸凉堂)이라 불리는 사당이 있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3호로 지정돼 있는데 그 곳에는 횡수대감(橫數大監)으로 불리는 이회 장군, 송씨 부인, 유씨 부인, 벽암 각성대사를 비롯해 무속신장들인 백마신장, 오방신장, 군웅장군, 별상장군, 대신할머니가 모셔져 있다. 정말 이회 장군은 억울하게 죽음을 맞아 이곳에 모셔진 것일까? 미스터리는 남한산성 축성과 관련해 이회(李晦)라는 인물은 어느 기록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남한산성의 실제 역사(役事)는 벽암 각성선사와 응성스님의 지휘 아래 승려들의 힘으로 이뤄졌고 총융사 이서(李曙) 광주목사 유림 및 별장 비장들은 지휘 감독만 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회 장군과 송씨, 유씨 부인은 누구였을까? 아마도 남한산성 신당에서 섬기던 무속의 장군과 아기씨들이 산성축성과 이어져 설화로 발전한 것 같다. 이제 서문(西門) 방향으로 발길을 옮긴다. 가는 길 우측 언덕 위로 커다란 자연석이 자리하고 있다. 병풍바위(屛岩)라고 부르는 자연석이다. 좌측에는 정조3년(1779년) 50여일 간 산성을 보수한 기록 남성신수기(南城新修記)가 기록돼 있다. 글은 수어사 서명응(徐命應)이 짓고 글씨는 광부부윤 이명중(李明中)이 썼다. 오른쪽에는 병암(屛岩)이라고 쓴 큰 글씨가 있는데 이민하십세기미서(李民夏十歲己未書)라고 기록돼 있다. 이민하는 철종1년(1850년)에 태어났으니 10세가 되는 1859년에 이곳에 와서 쓴 글씨이다. 좌측에는 그의 부친 이인설(李寅卨)과 백부(伯父) 이인고(李寅皐), 그리고 자신의 이름인 민하(民夏)가 적혀 있다. 요즈음 기준으로 보면 선인들의 공적인 기록 옆에 자신들 이름을 쓴 어처구니없는 낙서를 한 셈이다. 병암에서 잠시 북으로 나아가면 서문(西門) 우익문을 만난다. 1637년 1월 30일 47일간의 항쟁을 끝내고 인조는 이 문을 통하여 마천동~오금동~가락본동(故廣州)~송파동을 거쳐 석촌호수 남쪽 어딘가에 설치된 수항단(受降檀) 앞에 무릎 꿇고 삼배구고두의 예를 올렸던 것이다. (졸고 이야기가 있는 길 17-2 참조) 그 후에 세운 삼전도비(淸太宗功德碑)는 지금도 롯데호텔 남쪽 석촌호수가에 서 있다.
삼전도비에 얽힌 치욕과 교훈의 역사 부끄러움도 역사이기에 교훈으로 삼고자 다시 옮겨 세운 것이다. 태생이 반갑지 않은 비였기에 세우는 과정에서부터 문제가 많았는데 256년간 서 있던 비를 청일전쟁이 끝나고 청나라 힘이 약해지자 고종 32년(1895년) 강물 속으로 수장했다. 그러나 일제시대 인양돼 다시 세워졌다. 아마도 일본인들은 조선은 본래 남의 지배를 받았던 민족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 했던 것 같다. 해방이 되자 이 비석은 주민들에 의해 다시 땅 속에 묻혀 잊혀 졌는데 1963년 큰 홍수가 나자 그 모습을 드러냈다. 끈질기게도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에 서울시가 역사교육을 위해 다시 세웠다. 우리에게는 정말로 버리고 싶은 비이지만 언어학적으로는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전면은 몽골어와 여진어로 기록하고 뒷면에는 한문으로 기록해 이미 사라져간 여진어의 초기 문자체계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그 동안 자리를 잡지 못해 몇 번을 옮겨 다니다가 위치를 고증하고 세웠다고 한다. 대동여지도나 경조오부도에 보면 지금의 석촌호수가 한강의 본류였으므로 현재 비가 서 있는 롯데호텔 남단 석촌호수가는 잠실 뽕나무밭이거나 모래사장으로 추측되는 분명 강북에 해당되는 지점이다. 애초 강북 쪽에 세웠던 것일까? 을축년 대홍수(1925년)로 물길이 잠실과 자양동 사이로 옮겨 갔으니 잠실이 강남권이 된 것은 그 뒤에 일이다. 위치가 개운치 않다. 치욕의 비이지만 지난 일요일 둘러보러 갔다. 사람들은 호수 걷기에 바쁘고 젊은 한 쌍은 비의 교훈은 아는지 모르는지 사랑 나누기에 바쁘다. 중국이 강대해지는 이 시점에 마음 담금질이 필요할 것 같다. 서문 앞쪽은 작은 언덕이다. 오르면 매탄터(埋炭)였음을 알리는 안내판이 있다. 산성에는 많은 이들이 주둔하였기에 식량 이외에도 간장, 구운 소금, 숯 등을 비축해야만 되었다. 중정남한지에는 94곳에 2만4192섬을 묻었다는 내용이 상세히 전해진다. 지금이라도 그 곳을 파면 아마도 오래 전 묻은 숯이 나올 듯하다.
매탄지를 내려오면 서문 반대쪽으로 산성 중심 방향으로 난 작은 샛길이 보인다. 이 샛길로 접어들어 100m 가량 이르면 넓은 평탄지가 나타나고 발밑에는 무수한 기와파편이 밟힌다. 남향 양지바른 빈터에 햇볕이 따습다. 국청사(國淸寺) 옛터이다. 벽암 각성대사는 산성축성의 대임을 맡자 우선 1624년에 국청사와 한흥사를 먼저 창건했다. 팔도에서 올라와 축성에 참여하는 승도(僧徒)들의 숙식을 담당할 거점이 필요했던 것이다. 중정남한지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국청사는 서문 안에 있으며 누(樓) 앞에는 연못이 있다...(중략)... 성을 쌓을 때 승 각성이 두 사찰을 먼저 세우면서 한흥(漢興)과 국청(國淸)으로 이름 지었는데 사람들이 그 의미를 모르다가 병자호란 후에 비로소 한(汗:청나라 왕의 칭호)과 한(漢)은 음이 같고 금나라가 이 해에 청(淸)으로 나라 이름을 바꾼 것을 깨달았다. 인조도 기이하게 여겨 각성에게 심히 후하게 상을 내렸다고 한다’ 이 글에 따르면 각성이 청(淸)나라 한(汗)이 침략할 것을 예언해 절 이름을 한흥과 국청으로 했다는 의미가 된다. 이 글로 미루어 볼 때 벽암 각성대사는 많은 존경을 받았던 것 같다. 실제로 각성은 임진란이 발발하자 이순신 승도를 이끌고 휘하에 승군으로 참전하여 명나라 해군들과 함께 해전을 치뤘고 병자호란에는 3,000명의 의승군을 일으켜 출진하기도 했다.
국청사에 점해지는 또 하나의 전설은 물에 관한 것이다. 이집이라는 이의 아버지가 피부병으로 고생하고 있었는데 그 아버지가 아들이 떠간 물을 먹고 피부병이 깨끗이 나았다는 것이다. 그 후에 국청사 물은 피부병의 명약으로 소문이 났다. 그런데 아쉽게도 국청사터에서 샘물을 찾을 수 없다. 옛터에서 숲길 따라 동쪽으로 100m 가면 다시 중창한 국청사가 숲 사이로 보인다. 경내에 우물을 끌어 올려 샘으로 솟아나게 만들어 놓았다. 이 물도 효험이 있겠지.. 크게 한 바가지 떠 마신다. 이제 국청사를 떠난다. 문 앞 언덕받이에 비석이 하나 서 있다. 눈 비벼가며 읽어 본다. “兼留守金公炳冀撫恤僧徒永世不忘碑/同治三年甲子十月 日九寺僧徒立” 유수를 겸한 김병기공이 승도를 무휼한 영세불망비/ 동치3년(1864년) 갑자년 10월 일 9사승도 세움). 김유수는 무엇을 겸했단 말인가? 처음 남한산성 관리는, 행정은 지방관인 부윤(府尹)이 하고 방어는 수어청에 수어사가 담당했다. 그러다 보니 군사업무와 지방행정이 충돌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 이에 따라 부윤을 정2품 경관(京官)인 유수(留守)로 승격시켜 수어사를 겸하게 했다. 위에 김병기 유수는 수어사를 겸하고 있었던 것이다. 9사(寺)에서 공덕비를 세운 것을 보니 승도들의 어려움을 구휼(救恤)해 준 일이 있었던 것 같다. 성벽 방향으로 길을 잡는다. 연주봉 옹성이 나타난다. 옹성으로 나가는 암문도 있다. 남한 산성에는 옹성(甕城)이 5개 있다. 이 곳 북쪽 연주봉옹성, 동쪽 장경사신지옹성, 남쪽 성벽에 3개의 옹성이 더 있다. 옹성은 본성의 한 부분을 100m 이상 길게 돌출시켜 성벽으로 다가오는 적을 측면에서 공격할 수 있게 한 방어시설이다. 연주봉옹성은 북쪽 산줄기인 금암산, 이성산성으로 연결되는 핵심능선 상에 설치했다. 이제는 전투시설이 아니기에 길게 뻗어나간 성벽이 아름답다. 암문을 통하여 잠시 나가 본다. (다음호에 계속) - 이한성 동국대 교수
교통편 8호선 산성역 2번 출구~ 버스 9번, 52번 환승, 남한산성 하차 걷기 코스 지화문 ~ 천주사터 ~ 서암문 파적지(6암문) ~ 수어장대/청량당 ~ 병암 ~ 서문(우익문) ~ 매탄지 ~ 국청사터 ~ 국청사 ~ 연주봉 옹성 ~ 북장대터 ~ 북문(전승문) ~ 군포터 ~ 옥정사터 ~ 북암문(제4암문) ~ 봉암성암문 ~ 동장대터 ~ 장경사신지옹성 ~ 장경사 ~ 망월사 ~ 동문 ~ 동암문/수문 ~ 한흥사터 ~ 사직단터 ~ 남단사터 ~ 개원사 ~ 남장대터 ~ 남쪽 옹성들~ 지화문 ※‘이야기가 있는 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월 마지막 토요일에 함께 모여 서울 근교의 옛절터 탐방을 합니다. 3, 4시간 정도 등산과 걷기를 하며 선인들의 숨겨진 발자취와 미의식을 찾아가니, 참가할 분은 comtou@hanmail.net(조운조 총무)로 메일 보내 주시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