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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성의 옛절터 가는 길 - 28]남한산성 本城 절터길 (2)

봄 능선 길 종주의 기쁨, 슬픈 역사와 전설을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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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321호 박현준⁄ 2013.04.08 14:10:31

연주봉(465m) 암문 너머 정북으로 긴 능선길이 이어진다. 능선길 우측 아랫마을은 상사창동이다. 흔히 고골 또는 법화골이라 부르는 지역이다. 남한산성은 비록 산은 높지 않으나(청량산: 483m, 검단산: 520m, 남한산: 522m) 그 줄기는 길다. 마치 문어가 앉아 다리를 펼치고 있는 것 같다. 북으로 뻗어나가는 능선길이 연주봉 옹성에서 시작되는 금암산, 이성산성길이다. 또 하나의 북쪽 능선길은 벌봉에서 시작해 법화사지 위 능선길을 거쳐 토성(土城), 객산, 선법사, 중부고속도로 만남의 광장까지 이어지는 멋진 길이다. 남으로도 능선길이 길게 뻗어 나가는데 검단산, 망덕산, 이배재고개를 넘어 분당 불곡산으로 이어진다. 동으로도 두 줄기 능선길이 뻗어 나간다. 남한산에서 정동(正東)으로 능선길에 오르면 의안대군묘소를 지나 하남 은고개로 이어지고 이 길은 다시 하남 검단산 줄기와 맞닿아 있다. 동쪽으로 뻗어 나가는 또 하나의 산줄기는 남한산에서 남으로 한봉(漢峰)을 지나 약수산, 약사산, 노적산을 거쳐 광지원으로 이어지는 능선길이다. 서쪽 능선길은 남문(至和門)에서 서쪽 능선을 타고 산성역으로 내려와 길을 건너면 영장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있다. 이 산줄기에는 망경암(望京庵), 봉국사가 있어 소중한 문화유산을 만날 수 있다. 요즈음처럼 꽃피는 봄날, 이 능선길들을 종주하는 기쁨은 여간 큰 것이 아니다. 더욱이 이 길들은 어느 길이나 역사와 전설이 배어 있어 흥미롭다. 마음에 바람이 드는 날 배낭 한 번 멜 일이다. 남한산성 본성 4개 장터 중 수어장대만 남아 연주봉옹성에서 성벽을 따라 20분쯤 동으로 가면 북장대터가 나타난다. 1700년대 초 붕괴된 후 버려져 이제는 흔적도 없다. 다행히 둔덕 위에 안내판을 세웠기에 북장대터임을 알게 된다. 남한산성 본성(本城)에 동서남북 4개의 장대(將臺)가 세워졌고 봉암성에 외동장대가 세워져 있었다. 이제는 서장대(西將臺)인 수어장대(守禦將臺) 하나만 남았다. 이제 길은 북장대터에서 가파르게 내려간다. 300~400m 정도 내려갔을까. 웅장한 모습의 북문이 나타난다. 문이름은 전승문(全勝門)이다. 본래는 서문인데 정조3년(1779년) 성곽보수공사를 끝내고 전승문이라 했다. 왜 이런 이름이 붙은 것일까? 인조14년(1636년) 12월 29일 왕조실록을 보자. 병자호란으로 조선 조정이 남한산성에 포위되어 있던 때였다.

“이날 북문 밖으로 출병하여 평지에 진을 쳤는데 적이 싸우려 하지 않았다. 날이 장차 저물려 하니 체찰사 김류가 성 위에서 철군하여 성으로 올라오라고 전령했다. 그 때 적이 뒤에서 엄습해 별장 신성립 등 8명이 모두 죽고 사졸도 사상자가 매우 많았다. 김류가 군사를 전복시키고 일을 그르친 것으로 대죄하니, 임금께서 위유했다. (是日, 出兵北門外, 陣于平地, 賊不與之戰. 日且暮, 體察使金瑬在城上, 傳令收軍上城, 賊自後掩之, 別將申誠立等八人皆死, 士卒死傷甚多. 瑬以覆軍、債事待罪, 上慰諭之.)” 이 기록의 진실은 어떤 것이었을까? 인조반정 일등공신이며 영의정인 김류는 청군이 파논 계략에 빠져 8명의 지휘관과 300 여명의 장졸을 순식간에 잃는 참패를 당했다. 청군은 가파른 북문(北門) 아래 법화골 평지에다 가축과 조선인 포로를 미끼로 놓아두었는데 김류가 구출 명령을 내렸다. 장졸들이 함정일지 모른다고 살피자 했건만 비장 유호(柳瑚)에게 칼을 주어 휘둘러 장졸들을 언덕 아래로 내려가게 했다. 이 때 매복한 청군이 급습하니 본인은 성 위에서 초관(哨官)에게 퇴각명령을 전달케 했다. 그러나 때는 늦어 300 여명이 몰살당하는 치욕의 법화골전투로 남게 됐다. 그 뒤 어떻게 됐을까? 실록의 기록처럼 김류는 위유(慰諭)를 받고, 엉뚱하게 초관에게 명령전달의 책임을 물어 참수했으며 북성장(北城將) 원두표가 처형 직전까지 몰리는 상황이 전개됐다. 이것이 그 당시의 조선이었으니 너무 부끄럽구나.

140 여년이 지난 1779년 정조는 이곳에 들려 그 날의 패배를 상기하면서 다시는 이런 참혹한 패배는 없어야 한다는 다짐을 한 것이다. 그 이름 전승문(全勝門). 성벽을 끼고 길은 고도를 높인다. 잘 기른 소나무숲이 하늘을 가린다. 남한산성은 광주(廣州)의 읍치(邑治)로서 철저히 나무를 심고 가꾸었기에 아름다운 산림자원을 지킬 수 있었다. 철종 연간에는 첨사를 지낸 석태경(石泰慶)이 사재를 출연해 1만 그루 소나무를 심은 일이 있고 고종 연간에는 김영준(金永駿) 또한 사재를 털어 1만 5000 그루의 소나무를 심은 일이 있다. 소나무가 이렇듯 많았기에 중정남한지 기록처럼 조선시대에는 이곳에 송이버섯이 있었다지 않는가. 어느 날엔가 송이버섯 한 송이 만나고 싶다. 치욕의 병자호란 법화골전투 전사 잠시 후 군포(軍舖)터를 만난다. 성을 지키려면 성벽을 따라 일정 간격으로 초소(哨所)가 있어야 한다. 이 초소가 군포인데 중정남한지(重訂南漢志)에 의하면 125개의 군포가 있었다 한다. 이제는 온전한 군포는 하나도 없고 그 터마저 일실되어 몇 개 남지 않았다. 전승문에서 출발한지 600~700m 되었을까, 성벽길과 갈라져 비스듬히 우측으로 갈라져 나간 오솔길이 나타난다. 이제 이 갈림길로 들어서자. 잠시 나아가면 상당한 규모의 평탄지가 나타난다. 옥정사(玉井寺)가 있던 곳이다. 전해지기는 신라 때부터 있었던 절이라고 한다. 옥같은 샘이 있어 옥정사라 불렀다고 한다. 이제는 그 터 대부분에 억새와 숲이 자리잡았다. 억새와 숲에서 새들이 짹짹거린다. 어떤 이가 위장막을 치고 끈질긴 기다림으로 새들의 거동을 사진으로 담고 있다. 그렇구나. 산성의 북문과 북쪽 성벽을 방어하던 승군들이 부산했을 옥정사가 이제는 새들의 보금자리로 돌아갔다. 절터의 흔적은 아래짝만 남은 큰 맷돌과 주춧돌뿐이다. 절터를 뒤로 하고 비스듬 오르막길로 나아가면 이내 움푹하게 꺼진 지형에 암문(제4암문)과 군포터(2군포)가 나타난다. 암문이 은밀하게 아래로 내려간다. 지형이 낮다보니 주변 물이 이곳에 고여 빠져나가도록 수구(水口)도 설치했다. 여기서부터 성벽길은 오르막인데 잠시 후 봉암성암문(제3암문)을 만난다. 봉암성암문은 문루만 없을 뿐 제대로 된 성문의 형태로 건설됐다. 이 암문은 본성과 세 외성 중 하나인 봉암성을 연결하는 문이다. 오늘 길은 본성 절터길이니 문을 나서지 않는다. 성안쪽 길 잠시 후 전망이 트인 동장대터에 닿는다. 이제는 무너진 초석들 이외에는 동장대 흔적이 없다. 1700년대 초 붕괴된 후 그대로 놓아두었다. 이만큼 왔으면 이제 이곳에서 커피 한 잔 마시고 가는 여유가 필요하다. 동장대터에서 성벽을 끼고 남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가파른 내리막이다. 내리막이 끝날 즈음 암문(제2암문)을 만나는데 그 앞으로는 길게 돌출한 옹성(甕城)이 있다. 장경사신지옹성(長慶寺信地甕城)이다. 한봉성과 봉암성 방어를 위해 설치한 옹성이다. 그 끝에는 2개의 포(砲)가 있었는데 한봉과 벌봉을 지키려는 의도가 잘 나타난다. 승군들이 무예를 익혔던 장경사 성벽길 잠시 내려오면 햇볕 아래 평안한 절 장경사(長慶寺)가 있다 예전 이 절마당에서 승군들이 무예를 익혔다고 한다. 절마당 은행나무는 언제나 아름답다. 중정남한지에는 절 뒤에 철쭉이 많고(寺後多躑躅) 경치가 사찰 중에 으뜸(勝甲於諸寺)이라고 했다. 해우소도 한식으로 지었는데 산사와 잘 어울린다.

절마당 한 구석에 미운 오리새끼처럼 앉아 있는 돌맷돌과 절구가 이 절의 나이를 말하고 있다. 다행히 1907년 8월 일제(日帝)가 산성 절들을 파괴할 때 손상을 덜 입어 옛절 모습이 많이 남아 있다. 수행자들의 공간 심향당(心香堂)에는 서릿발 같은 주련이 긴장감을 준다. 부처도 버리고 스스로의 길을 찾으라고 한다. 霜風括地掃枯荄(상풍괄지소고해) 서리 바람 땅을 휩싸 마른 풀뿌리 쓸지만 誰覺東君令已廻(수각동군영이회) 봄바람 벌써 온 걸 그 누가 알리요 唯有嶺梅先漏洩(유유영매선루설) 영마루 매화만이 그 소식 알리려고 一枝獨向雪中開(일지독향설중개) 눈속에서 가지 하나 홀로 피었네 丈夫自有衝天氣(장부자유충천기) 장부가 스스로 하늘 찌를 기상 지녀 不向如來行處行(불향여래행처행) 여래가 가던 길 향하여 가지 마라 장경사 일주문을 나서 고개 아래로 내려오면 북쪽 높이 보이는 절이 망월사(望月寺)이다. 중정남한지에 의하면 남한산성 사찰 중 가장 오래된 절이라 한다. 근년에는 13층탑도 세우고 탑 안에 인도 간디 수상으로부터 받아온 진신사리를 봉안했다 한다. 그래서 이 절도 적멸보궁이 됐다. 중정남한지 기록에 “한양에 장의사가 있었는데 태조가 도성을 세울 때 이를 허물고 불상과 금자화엄경 일부와 금정 하나를 여기에 옮겼다고 썼다.(漢陽有壯義寺 太祖建都時 毁之其不像及金字華嚴經一部 金鼎一坐移藏于此)” 그런데 이 기록은 사실이 아닌 것 같다.

실록 연산(燕山)군 10년(1504년 ) 7월조를 보면 장의사의 부처를 삼각산 안팎 절로 옮겼으며 (傳曰: 藏義寺佛令兩宗僧徒, 移之三角山內外寺, 竝黜僧空之.) 1년 반 뒤인 연산군 12년(1506년) 2월에는 장의사를 철거했다. 그러니 태조가 장의사를 철거하고 불상을 옮긴 일은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태조는 장의사에서 법석(法席)을 베풀고 자신의 죽은 처 신의왕후의 제사도 받들게 했으니 중정남한지의 기록은 오류일 것 같다. 이제 망월사에서 내려오면 동문(左翼門)이다. 서문이 우익문(右翼門), 동문이 좌익문이 되는 까닭은 임금이 계시는 남한산성 행궁이 중심이 되기 때문이다. 행궁에서 남면(남쪽을 바라 봄)하면 동문이 좌(左), 서문이 우(右)가 되어 우익문, 좌익문이라는 문의 명칭을 이해할 수 있다. 호란 당시 서문쪽은 경사가 가팔라 청군들은 주로 보병이 포진했고, 동쪽은 지세가 완만하여 주로 기마병이 포진했다. 이렇게 포위되어 항전하던 40여일, 함경도, 평안도, 경기도, 황해도, 강원도, 전라도 근왕병(勤王兵)들이 임금을 구원하러 출병했으나 전라병사 김준용 장군, 평안병사 유림 장군만이 작은 승리를 거두었을 뿐 모든 근왕병은 참패하거나 싸움조차 해 보지 못하고 미원에 물러가 있었다. 이러는 사이 포위당한 조정은 희망을 잃고 더구나 식량이 바닥났다. 농성하는 1만3000명에게 잡곡 3700석과 피곡 5800 석은 조족지혈이었다. 광주목사 한명욱(韓明勗)은 산성 40여리 밖에 창고를 짓고 식량과 마초를 비축하고 있었다. 그러나 청군이 졸지에 밀려오자 소용이 없는 군량미가 되고 말았다. 남한산성 항복의 직접적 원인은 식량부족이었던 것이다. 남한상성 함락의 결정적 요인은 식량부족 동문에는 산성 내 모든 물이 빠지는 수구(水口)가 있고 수구를 빠져 나간 물은 계곡을 이룬다. 동문밖 계곡 200m여 지점에는 주필암(駐蹕岩)이라 부르는 바위가 있다. 그 바위에는 ‘己亥駐蹕’이라고 쓴 각자(刻字)가 있다. 정조3년(1779년) 8월 효종 승하 120주기를 맞아 여주 영릉(寧陵, 英陵) 능행길에 남한산성에 들린 일을 그 이듬해 이 바위에 기록한 것이다. 주필이란 임금이 거둥길에 잠시 들리는 일을 말한다. 이 때 정조는 새로 수리한 성벽을 점검하고, 승군들이 진(陣) 펼치는 훈련을 손수 참관하고, 서장대에 올라 주야로 훈련을 주재하는 등 점검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게다가 어려운 백성들을 위해 채무문서를 불태워 백성들을 구휼했다. 이처럼 철저한 확인행정과 책임행정이 정조시대를 빛내는 밑거름이 됐다. 지금도 병암(屛巖)에 기록되어 있는 성벽수선 내용을 보면 성벽을 18구간으로 나누어 수리하면서 책임자를 기록한 책임행정의 정교함에 머리 숙여진다. 아쉬운 게 있다면 주필암은 계곡을 가로막은 철 펜스 안에 있어 다가갈 수 없다는 점이다.

동문 옆으로는 또 하나의 암문(11암문)이 있다. 일명 시구문(屍柩門)이다. 천주교가 탄압 받을 때마다 남한산성으로 옮겨온 천주교도들이 박해를 받아 300여명이 순교했다고 한다. 그 시신들은 돌보는 이 없이 이 시구문 밖에 버려지기도 하고 이 문을 통해 장사지내러 나갔기에 시구문이다. 남한산성 최초의 순교자는 1801년(순조 1년) 신유박해 때 발생했다. 신해박해(1791년) 이후 탄압을 받기 시작한 천주교도들은 각도의 오지로 숨어들었는데 제천 봉양(현 베론성지)으로 숨어든 이들 중 황사영(黃嗣永)이 있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의 큰형인 정약현의 사위이다. 북경교구 앞으로 조선의 천주교탄압 실정을 알리고 천주교탄압을 중지시킬 목적으로 비단에 백반으로 글을 써 글씨가 보이지 않게 쓴 백서(帛書)인데 청나라 사신 가는 일행편에 북경으로 보내려다가 발각됐다. 문제는 외국군대의 힘을 빌려 조선을 협박해달라는 내용이 포함됐다는 점이다. 이른바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무수히 많은 이들이 순교했다. 이 백서 원본은 현재 교황청에 보존되어 있다. 이때부터 천주교는 기해박해, 병인박해를 거치면서 더욱 심한 탄압을 받았다. 그 때의 일을 잊었는지 시구문은 봄볕 아래 평화롭다.

채무문서를 불태운 정조의 위민정치 이제 성벽을 끼고 언덕을 오른다. 언덕을 다 오를 무렵 우측으로 갈려나가는 오솔길이 있다. 이 길로 잠시 나아가면 능선길 아래로 평탄지가 펼쳐진다. 한흥사(漢興寺)터이다. 국청사와 함께 성을 쌓기 전에 식사와 숙소를 위해 벽암 각성스님이 지은 절이다. 남한지에는 땅이 매우 넓고 시원하다 했다. 전란 중에는 한흥사 승려가 종이, 산나물, 순무를 진상했다. 평소에는 하찮을 이런 음식들이 종친과 부마들에게 나누어졌다. 한흥사터에서 이어지는 숲속 오솔길을 따라 서쪽으로 100여m 가면 조그만 평탄지에 사직단(社稷壇)터를 알리는 알림석이 있다. 본래 광주 고읍 초덕리(현 초일리)에 있던 것을 1735년 부윤 조명교가 옮겨 설치한 것이다. 흔히 조선시대 읍치에는 사직단(社稷壇)과 여단(厲壇)이 있었다.

사직단은 토지신(社)과 곡식신(稷)께 제사지내는 곳이며 여단은 전염병을 옮기는 역신(疫神)이나 연고없는 떠돌이 영혼들을 달래던 곳이었다. 산성의 여단은 북문쯤에 있었다는데 흔적이 없다. 사직단 터에서 오솔길을 따라 다시 100여m 나아가면 기와편이 밟히는 남단사(南壇寺)터에 닿는다. 산성 어느 주민이 매년 채마밭을 일구고 있다. 햇볕도 밝고 샘물도 넉넉하다. 남단사에서 등산로를 따라 100여m 산성 안쪽으로 내려가면 이제는 중창(重創)한 개원사(開元寺)에 닿는다. 팔도도총섭이 머물던 남한산성 사찰의 중심사찰이자 전국의 중심사찰이었던 곳이다. 불경이 많았던 절이라고 한다. 두 번의 화재도 영괴(靈怪)한 기적으로 꺼진 신성한 절로 여겨지던 곳이다. 인조 15년(1637년)에는 조각배 한 척이 서호(西湖: 양화대교 주변)에 떠 왔는데 그 배에 중원개원사개간(中原開元寺開刊) 7글자가 새겨진 대장경이 실려 있었다 한다. 이 대장경을 나라에서는 금난보(金襴褓) 10벌로 싸 개원사로 보냈다. 남아 있었으면 좋았으련만 언젠가 일실됐다. 이제 남한산성 본성의 절과 절터 답사를 마무리한다. 남장대로 올라 옹성을 바라본다. 신남성길이 보인다. 기회 되는대로 세 외성(外城)길 절터를 찾아보리라. 교통편 8호선 산성역 2번 출구 ~ 버스 9번, 52번 환승, 남한산성 하차 걷기 코스 지화문 ~ 천주사터 ~ 서암문 파적지(6암문) ~ 수어장대/청량당 ~ 병암 ~ 서문(우익문) ~ 매탄지 ~ 국청사터 ~ 국청사 ~ 연주봉옹성 ~ 북장대터 ~ 북문(전승문) ~ 군포터 ~ 옥정사터 ~ 북암문(제4암문) ~ 봉암성암문 ~ 동장대터 ~ 장경사신지옹성 ~ 장경사~ 망월사 ~ 동문 ~ 동암문/수문 ~ 한흥사터 ~ 사직단터 ~ 남단사터 ~ 개원사 ~ 남장대터 ~ 남쪽 옹성들 ~ 지화문 ※‘이야기가 있는 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월 마지막 토요일에 함께 모여 서울 근교의 옛절터 탐방을 합니다. 3, 4시간 정도 등산과 걷기를 하며 선인들의 숨겨진 발자취와 미의식을 찾아가니, 참가할 분은 comtou@hanmail.net(조운조 총무)로 메일 보내 주시면 됩니다. - 이한성 동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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