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NB저널 = 김금영 기자) 마타하리. 가장 치명적이었던 스파이로 기억되는 그녀의 이야기가 2016년 무대 위에서 부활했다. 제작 과정부터 화제가 됐다. 공연 제작사 EMK뮤지컬컴퍼니가 약 250억 원의 큰 규모의 제작비를 들였다는 것, 그리고 ‘하이스쿨 뮤지컬’ ‘올리버’ 등을 연출한 제프 칼훈과 ‘지킬 앤 하이드’ ‘몬테크리스토’ ‘황태자 루돌프’의 작곡가 프랭크 와일드혼이 참여한다는 것, 뮤지컬계의 디바 옥주현이 마타하리로 낙점됐다는 것, 여기에 엄기준, 신성록 등 뮤지컬계의 굳건한 강자들이 모였다는 것까지.
그리고 그 결과물이 드디어 펼쳐졌다. 뮤지컬 ‘마타하리’는 제1차 세계대전 중 2중 스파이 혐의로 프랑스 당국에 체포돼 총살당한 무희 마타하리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여기에 마타하리의 사랑 이야기를 녹이면서 그녀의 삶을 새롭게 재조명하는 시도를 했다. 주요 인물은 셋이다. 검은 머리에 올리브 빛깔의 피부, 아름다운 몸매로 매혹적인 춤사위를 선보이는 마타하리, 그리고 그녀에게 매혹된 두 남자 아르망과 라두 대령.
라두 대령은 화려한 무대 위의 마타하리가 아닌, 삼촌에게 강간을 당하고, 전 남편에게 버림받은 실제의 그녀 마가레타 거트루드 젤르의 과거를 빌미로, 스파이가 돼 독일의 정보를 빼오라고 협박한다. 처음엔 라두 대령의 명령으로 마타하리를 감시하기 위해 접근한 군인 아르망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와 진실한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이 사이를 불같이 질투한 라두 대령은 아르망을 최전선으로 보내 버린다. 그 와중에 마타하리가 스파이라는 사실을 눈치 챈 독일이 그녀를 제거하기 위한 방책을 펼치고, 라두 대령은 마타하리를 희생양으로 삼을 준비에 나선다.
독일과 프랑스 사이의 거대한 전쟁이 배경이지만, 공연의 전체적인 흐름은 한 여자를 둔 두 남자의 날선 신경전이다. 이런 구성은 새롭지 않은, 식상한 이야기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식상하지 않게 하는 여배우들의 여풍(女風)이 거세다.
▲뮤지컬 ‘마타하리’의 대형 스케일 무대도 주목할 만하다. 사진 = EMK뮤지컬컴퍼니
먼저 주인공인 마타하리를 빼놓을 수 없다. 마타하리는 일곱 겹의 베일을 하나씩 벗어가면서 몸을 점차 드러내는 도발적인 춤을 선보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공연은 이 점을 살렸다. 막이 올라가는 시작부터 옥주현은 마타하리로 분해 매혹적인 춤사위를 선보인다. 사실 그녀의 공연을 처음 보는 건 아니지만, 마타하리로서의 모습은 색다른 충격을 선사했다. 몸에 꽉 달라붙는 의상을 입은 적은 많지만, 실제로 옷을 하나씩 던지면서 나중엔 최소한의 의상만 입음으로써 늘씬한 몸매가 여실히 드러난다. 팜므파탈로서의 매력이 이번 공연에서 제대로 꽃을 피운 것.
가창력은 말할 것도 없다. 아르망의 이별을 앞두고도 희망을 바라보는 ‘어딘가’는 1막의 마지막을 장식하기에 제격인 곡이다. 이 노래를 옥주현이 제대로 살린다. 이밖에 아르망을 그리워하며 부르는 ‘단 하루’에서도 고음이 폭발한다. 음악 자체가 전체적으로 너무 옥주현의 고음에만 의지하는 건 아닌가 다소 아쉬운 점도 있지만, 그녀의 폭발적인 성량과 고음이 매력적이라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옥주현은 당당한 여성을 연기할 때 매력적이다. 핑클 시절에도 청순가련한 이미지보다는, 다소 강한 주장이 돋보였던 그녀였다. 그래서인지 사랑 앞에서 당당하고, 자신의 일에 부끄러움이 없는 마타하리의 모습은 멋있고, 또 매력적이다. 이런 마타하리의 면모가 이전에 그녀가 연기한 엘리자벳와 다소 비슷한 느낌이다. 아마 ‘엘리자벳’을 꾸준히 선보이며 대표 공연으로 만든 EMK뮤지컬컴퍼니의 습성이 들어간 결과가 아닐까 싶다.
옥주현이 이렇듯 무대를 휘어잡다 보니, 상대적으로 남자 배우들의 비중이 오히려 작아 보인다. 특히 아르망은 마타하리와 사랑을 하는 상대임에도 불구하고 부각이 덜 된다. 오히려 그녀에게 집착하는 라두 대령이 더 매력적인 캐릭터로 떠오른다.
▲매혹적이면서도 치명적인 마타하리를 연기하는 옥주현은 제대로 포텐을 터뜨린다. 사진 = EMK뮤지컬컴퍼니
이 가운데 옥주현뿐 아니라 마타하리의 의상을 챙기고 그녀를 보필하는 안나 역의 김희원, 마타하리를 질투하는 라두 대령의 아내 캐서린 역의 홍기주까지 등장하는 여자 캐릭터들이 하나 같이 존재감이 막강하다. 실질적인 무대 등장 비율은 남자 배우들에 비교해 매우 적다. 그리고 이 두 여 배우에게 부여된 노래도 하나씩 밖에 없다. 그런데 무대 위의 ‘씬 스틸러’라고나 할까. 약간 푼수끼를 갖춘 안나 역의 김희원은 마타하리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전반적으로 극의 활력을 담당한다. 그러면서도 마타하리의 진정한 사랑을 생각하고, 함께 염려해준다. 어머니를 연상시키는, 푸근하고 부드러운 이미지로 무대를 온화하게 감싼다.
옥주현, 노래실력에 이젠 몸매까지…
김희원-홍기주까지 여풍당당 가세
반대로 캐서린 역의 홍기주는 독기가 가득 찼다. 당당한 여성이라는 점에서는 마타하리와 비슷해 보이지만, 그 이면엔 남편인 라두 대령의 지위를 이용해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지키려는 집착, 거기에 마타하리에 대한 질투까지 화(火)가 가득 찬 인물이다. 라두 대령이 지닌 마타하리에 대한 집착에 절대 지지 않는 인물로, 오히려 라두 대령에게 마타하리를 정치적 희생양으로 삼으라고, 은밀하게 속삭인다. 이 색깔이 다른 두 여성의 파워에 남자 캐릭터들은 휘청휘청 휩쓸린다. 요즘 시대가 여풍이 대세라는 게, 무대 위에서도 느껴진다.
그리고 또 주목되는 게 무대다. 250억 제작비가 헛말은 아니다. 마타하리의 실제 화보를 바탕으로 한 거대 세트부터, 물랑루즈의 공간을 재현한 세트, 1막 마지막에 비행기가 공중 부양하는 장면까지. 해외 거대 라이선스, 또는 내한 공연과 비교해도 전혀 꿀리지 않는 스케일이다. 의상도 화려하다. 마타하리는 옷을 벗어 던질 뿐 아니라 매 등장 때마다 새로운 옷을 입고 등장한다. 고풍스러운 옷부터 섹시한 옷까지 당 시대의 패션쇼를 보는 느낌이다.대형 창작 뮤지컬로서 첫 발걸음을 뗀 ‘마타하리’가 앞으로 꾸준히 발전해나가며 그 자리를 지킬 수 있을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