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인데도 한여름마냥 따가운 빛이 내리쬐는 통에 아이스크림 하나를 사먹고 들어선 지하 공간은 서늘함이 밀려왔다.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삼각 지붕의 낡은 공장과 아직 무성하게 뒤덮진 않았지만 하얀 벽돌 건물이 어두운 색으로 보일만큼 촘촘히 감싼 담쟁이덩굴이 세월을 말해주는, 여관 인근의 건물이다.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는 문래동이고, 지하철역하고도 가깝지만 의외로 관광객의 발길이 닿지 않아 한가함을 유지하는 골목이다.
학교를 벗어나 처음 마련한 공간에서 1년째를 맞이한 세 명의 젊은 작가들이 운영하는 팀이자 공간의 이름은 ‘산지직송 작업직판장’이다.
‘츤데레’ 스타일 세친구
김지연, 조윤원, 최윤지 세 작가는 두 개의 방으로 나뉜 지하공간을 한 쪽은 개인 책상들과 재료 및 공구들이 있는 구역으로, 다른 한 쪽은 커다란 규모의 작업을 진행할 수 있는 공동 작업 구역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 세 명의 젊은 여성 작가는 모두 이화여자대학교 조소과 출신이다. 아직도 이 사회에 여자대학교 특히, 미대 출신에 대한 스테레오 타입(stereotype, 고정 관념)이 존재하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방문 날 이들은 따뜻한 봄 날씨와 어울리지 않게 두터운 작업복을 입고, 거친 쇳소리를 내는 그라인더를 들고 있었다. 생계와 작업을 병행하는 이들에게 작업 시간은 정말 귀중하겠기에 "빨리 끝내겠다"고 달래며 인터뷰를 요청했다.
학부 시절부터 서로의 모습을 지켜봐왔던 세 작가가 석사를 거쳐 학교 밖을 나와서까지 같은 공간을 쓸 수 있었던 이유는 너무도 달랐던 서로의 개성을 인정했기 때문일 것이다. “작업 성향과 성격이 다 달라 오히려 의견 충돌이 없다”며, 시종일관 무심한 태도를 보이던 것과는 달리, 막상 작업 이야기가 나오자 서로 부연하며 자신의 작업보다 더 신경 써 설명한다.
“조건 없이 전시할 수 있어요”
이들 작업실의 핵심 공간은 공동 작업 공간이다. 커다란 규모의 작업들이 펼쳐져 있던 공간은 때로 한꺼번에 치워져 작업 전시장으로 변모하곤 한다. 자신들이 기획에는 관여하지 않은 채 주로 외부 팀들의 단체전이나 독립 큐레이터의 기획 전시에 대관을 해주곤 하는데, 그 일에서 딱히 커다란 금전적인 수입이 발생하지는 않는 듯하다. 대관 비용 대신에 선풍기나 조명 같은 집기 또는 나무 같은 재료를 사주는 사람도 있다. 오히려 작업을 하면서 어쩔 수 없이 많아져 버린 공구를 대여하면서 수입이 생길 때가 있다고.
이곳에서 주로 이뤄지는 전시의 성격은 그들의 표현에 의하면 ‘끼인 전시’라고 한다. 지원을 받거나 기존의 깔끔한 화이트 큐브 갤러리에서 이뤄지는 전시들이 완성도에 중점을 두고, 또 그 기준에 따라 평가를 받고 있다면, 이 공간은 기획 의도도 잡기 어렵고 공간을 정식으로 대관하기 힘든 전시에 열려 있는 것이 특징이다.
완성된 결말로서의 작업 이전의 발전 단계에 있는 작업들을 선보이거나, 맥락 없이 그러모은 여러 작가들의 작업을 선보이기도 한다. 기획전이라는 이름 아래 선정기준이 생기고, 그 선정기준에 맞지 않는 작가들을 배제하는 현상을 거부하는 의도다.
“교류와 소통이 작업을 도태되지 않게 한다”
아무리 좋은 의미의 공간 운영이라 할지라도 외부 지원 하나 없이 자신들 스스로가 운영비를 마련해가며 공간을 유지하는 이유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조윤원은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라고 대답했다.
이들이 제일 두려워하는 것은 자신들의 생각이 정체되고 언젠가는 작업을 포기하게 되는 것이다. 많은 작가들이 스스로 고립되거나, 하나의 기능만을 가지고 공간을 운영했을 때 쉽게 무너지는 모습을 많이 목격했다. 그리고 함께 작업했던 동료들이 결혼을 하거나 공무원 시험에 합격함으로써 안정적 삶을 찾아가는 모습도 봐온 그들이다.
그런 삶을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물론 아니다. 다만, 자신이 가고자 했던 길을 포기하는 이유를 이들은 ‘교류의 부재’에서 찾는 것이다. 작가에게 사람들과의 교류는 피드백을 받을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다.
이들의 말처럼 미술 전공자들의 인간관계 폭은 그리 넓지 않은 편이다. 10년을 학교에 다니면, 10년 동안 만날 수 있는 것은 자신과 똑같은 걸 배우는 사람들이다. 작업과 공부에 투자하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생기는 아이러니다.
이들이 원하는 공간은 사람들이 자주 오가며 다양한 생각과 감성들이 순환되는 곳이다. 이제 1년이 겨우 지났지만, 벌써 7번이나 전시가 열렸다. 미술 작가들뿐 아니라 글 쓰는 사람, 사진 찍는 사람 등 다양한 예술가들과 소통할 수 있었다.
“고민은 끊임없이 생겨나”
이들의 젊은 나이만큼 고민은 끝나지 않는다. 공동작업 공간이자, 전시장인 공간을 작업실로 쓰겠다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면 일정한 수입도 꼬박꼬박 들어오고 최소한 작업 비용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전시를 열기엔 관객들이 어려운 위치에 있기도 하고, 때로 관객들이 생각 이상으로 많이 오면 앉을 자리가 없어 미안하기도 하다. 김지연은 “다른 것보다 집진기(분진을 흡입하는 기계) 소리를 안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며 웃었다.
어느 누구도 이들에게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갈등과 고민을 강요한 적은 없다. 그렇다고 젊은 예술가라면 당연히 겪어야 할 '낭만적인 어려움’으로 감히 이름 붙여서도 안 될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작업을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귀 기울여 볼 만한 충분한 가치는 있지 않을까.
김지연, “당신의 기억을 찾아보세요”
김지연의 작업은 지점토와 퍼티(putty) 등으로 만들어진 부조다. 형상을 만들고 재료가 딱딱하게 굳은 뒤 사포로 갈아내며 형상을 찾는다. 그녀가 결과적으로 찾아내는 것은 무엇인가가 피막이나 천 같은 것에 덮인 모양이다.
그 덮힌 형상이 뭔지는 누구도 알 수 없지만, 보는 사람의 경험과 기억에 따라 멋대로 해석될 수 있는 중의적 형태다. 작가에게는 물론 그 작업의 동기가 된 구체적인 기억과 감정이 있지만, 그것이 주제가 되지는 않는다. 그녀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보는 사람의 기억과 감정으로 판단되는 작업의 형상이다.
관객의 시각과 경험에 따라 보이는 형상은 달라지며, 그 참여로 작업은 완성된다. 그렇다고 막연하게 추상적인 형상을 던지며 관객에게 생각을 강요하진 않는다. 작가는 작품마다 꽤 구체적인 의미의 제목을 제시하며 관람자의 기억과 감정으로부터 구체적인 형상을 떠올릴 수 있게 하는 최소한의 팁을 준다.
결론적으로, 그녀가 표현하는 형상은 사람마다 각기 다른 경험과 당시의 상황이 기억된 상태이며, 그 상태는 왜곡되고 덮여진 것이다.
최윤지, “없어져야 절실히 느껴지는 존재의 생명력”
최윤지는 주변에 존재하지만, 중요도를 느끼지 않은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이와 관련해 최근 그녀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소재는 가로수다.
작가는 차도와 인도의 보도블록을 시멘트로 일일이 만들어 부감(위에서 본)의 시점이자 부조로 재구성한다. 그 과정에서 인도의 영역에 가로수의 자리가 지정되는데, 그 자리가 차지하는 영역은 차도와 인도에 비해 매우 적은 것이다.
작가는 어느 날 구획화되고 시멘트의 느낌으로 상징되는 도시의 이미지 안에서 무심하게 지나쳤던 가로수의 생명력을 강하게 느낄 수 있었다. “좁게 허락된 흙바닥의 구역에서 제멋대로 가지를 뻗어나가는 나무의 모습은 정돈된 도시의 이미지와 대조돼 한층 그로테스크하게 보였다”고 전한다.
도로 위에서 빌딩과 한 방향으로 나란히 서 있는 시점에선 가로수의 존재감이 잘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항상 무심하게 지나쳤던 것처럼. 작가는 나무의 자리를 마련한다. 하지만, 그 자리에 가로수는 없다. 부감으로 바라본 비워진 가로수의 자리는 역설적으로 더 뚜렷하게 가로수의 존재감을 느끼게 한다.
더불어, 작가가 집요하게 재현한 인도의 보도블록 틈을 비집고 나온 잔디나 잡초 같은 식물들은 비워져 있는 자리에 마땅히 있어야 할 것 같은 생명을 더욱 그립게 만든다.
조윤원, “허울 좋은 이미지의 이면에 숨겨져 있는 실체는?”
조윤원이 보는 세상은 연극 무대의 세트와 같다. 예전이라고 말할 수 있는 시대에는 하나하나에 깊은 의미가 있는 사물들로 세상이 채워져 있었지만, 현대는 그 이면의 의미가 사라지고 시각 이미지만 남은 겉껍질 같다고 느껴지는 것이다. 일상의 공간에서 발견할 수 있는, 맥락 없이 받아들여진 서양의 아르데코 스타일을 흉내 낸 조잡한 장식들과 아치형의 건축 구조물들이 그런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작가는 그런 형상들을 재현하고 붕괴하거나 마모한 결과물들을 작업으로 제시한다. 붕괴의 과정에서 예쁘게(?) 비춰졌던 시각 이미지는 제거되고, 그 뒤에 나타나는 것은 예전의 장인들과 예술가들이 마음과 정신을 담았던 재료들이 아니라 물리적으로 존재할 수는 있지만 일회적으로 쓰인다는 모순이 있는 가벼운 스티로폼, 얇은 슬레이트 같은 산업 재료들이다.
현실을 비판하고자 하는 의도는 없다. 다만, 숨겨진 실체를 제시할 뿐이다. 시각 이미지의 붕괴 후에 나타나는 아름답지 않은 결과물들은 마치 영화 ‘트루먼 쇼'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트루먼이 자신을 둘러싼 가짜 배경, 즉 무대 세트의 끝에 도달했을 때 느끼는 전혀 다른 이중적인 감정, 배신감과 동시에 느껴지는 해방감이다. 우리 시대의 저변에 깔린 시각 이미지 앞에 놓인 우리도 입장이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