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줍게 테이블에 올려놓은 각종 전시 팸플릿과 도록들이 꽤나 묵직하다. 심소미 큐레이터는 자리에 앉자마자 소책자 7권과 단행본 2권을 가방에서 꺼내들었는데, 이 방대한 연구량이 최근 2년 동안의 그의 활동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건축을 전공한 심소미는 건축과 미술의 접점에서 도시를 바라보는 연구가이자 큐레이터로, 도시연구와 장소 리서치를 기반으로 동시대 시각문화 현상을 탐구하고 있다.
최근 전시로 지난 10월 서울 곳곳에서 벌어진 도시개입 프로젝트 ‘마이크로시티랩(Micro City Lab)’을 기획했다. 그는 이 프로젝트를 위해 다국적 작가들을 대거 서울로 초청하고, 거대 도시 서울의 아주 미시적인(Micro) 장소에 작가가 침투해 개입하도록 할 뿐만 아니라, 기획이 전시에 이르기까지의 연구 과정을 논의하는 ‘사전전시’를 진행하기도 했다. 전통적인 전시기획 방식으로서의 ‘큐레이팅(curating)’을 벗어나, 자신의 연구와 관련한 확장형 전시기획 방법과 과정을 실험하는 ‘큐레이토리얼(curatorial)’ 실천의 한 예시라고 볼 수 있다.
이 밖에도 장소에 대한 사회 인문학적 접근을 바탕으로, 현대미술, 건축, 디자인, 도시연구를 매개한 전시를 선보여 왔다. 동시대 시각문화 전반에서 널리 통용되고 있는 리서치(어떤 주제에 대한 연구 활동) 방식이 돋보이는 그를 만났다.
체화된 리서치, 즐거워서 할 수 있는 일
- 도시에 대한 리서치를 오래 진행했다. 장소와 도시담론을 빼놓고는 그간의 전시를 이야기할 수 없을 것 같다. 건축을 전공한 배경과 관련이 있는지?
“건축과에서 건축설계를 공부했지만, 국내 건축교육에 맞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당시의 건축과 커리큘럼은 먼저 대지를 선정하고, 그 위에 어떤 건물을 가상으로 디자인해 해당 도시에 어떤 가치를 제안하는 방식의 프로젝트로 진행됐다. 늘 아주 복잡한 지적도 위의 하얗게 비어있는 대지가 주어졌다. 나는 그때마다 '왜 항상 백지에서부터 시작해야 할까'란 질문을 품었다. 그저 빈 대지 위에 어떤 모양의 건물이 들어서면 빛이 더 많이 생기거나, 커뮤니티가 생기고 하는 등의 말도 안 되는 상상력을 디자인적으로 부여하지만. 그에 대한 리서치나 사전에 거주하던 이들이 어디로 이동했고, 그 이주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도시 정책은 어떠한지 등의 문제를 함께 고민하기보다, 빈 땅 위에 효율적이고 새로운 제안만 하는 것에 동의할 수 없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미술로 흘러 들었다.
그런데 건축에서 스스로 납득하기 어려웠던 상황을 미술에서 다시 맞닥뜨리게 된다. 도시가 국가-산업적인 가치와 밀접하게 연결된 지점과 더불어 현대미술이 굉장히 스펙터클해지는 경향을 체감했기 때문이다. 당시 현대미술과 현대건축에서 움직이는 공간으로서의 파빌리온 건축이 유행했다. 건축의 모빌리티(이동성)를 통해 새로운 미학적 스펙터클을 전개하려는 움직임이 자본과 만나면서 점차 거대해지는 파빌리온의 모습으로 등장한 것이다. 2000년대 각종 미술-건축 비엔날레 및 아트페어, 축제 등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던 이 가변적인 건축 형태들(파빌리온)이 내게 매우 극적으로 다가왔다.
모빌리티는 물리적 공간이 움직이는 스펙터클함이 아니라 실제 삶에서 발생하는 모빌리티, 즉 사람이 이동할 수밖에 없는 정치-사회적인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공간이 대지에 정착할 수 없고, 사람이 땅에 정착할 수 없기 때문에 이렇게 가변적이고 임시적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는 상황들이 발생하는 게 아닐까. 그래서 미술 내에서 전개되던 기존의 지점들과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 도시담론은 미술계에서 꾸준히 대두된 주제다. 도시에 대한 관심은 어떻게 이어졌나?
"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여러 도시 담론들이 등장했다. 이제는 오히려 아파트에 살지 않는 사람을 찾기가 힘들고, 젠트리피케이션도 사람들에게 지겨운 주제가 돼버린지 모른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가 사는 장소로서 도시는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한다.
전세계 5위권의 메가 시티라고 하는 서울이지만, 지긋지긋할 정도로 잘 알려진 동시에 여전히 추상적으로 다가오는 부분이 많다고 느낀다. 미술작가들 작업의 서사나 변천사를 보면 굉장히 사적인 경험에서 출발하는 경우가 많다. 많은 이가 시골에서 도시로 상경하는 이주의 경험을 했듯이, 나도 어릴 적 시골에서 살다 도시로 이주했다. 그때 마치 거대한 바다와도 같은 도시에 떨어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면서 한국 도시의 형성을 경험했다. 예를 들어 성남시에 살던 때, 분당 신도시가 결정 됐다. 당시 초등학교 시절이었는데, 학교는 문을 닫고 선생님과 아이들이 철거반대운동을 같이 하고 우리 집 앞에는 빨간 낙서가 쓰여 있기도 했다. 그렇게 이사를 간 후, 어느 날 부모님이 새로운 신도시로 이사를 가겠다고 하셨는데, 그게 또 내가 쫓겨났던 지역의 아파트처럼 새로운 신도시 아파트였다. 계속 도시란 환경이 우리 삶에 굉장히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더라. 그리고 시골에 살아도 도시로 이주하지 않아서 느끼는 현상들이 있다. 이렇게 도시생활이 직간접적으로 미치는 영향에 관심을 갖다보니, 미술 안에서도 도시에 대한 관찰과 질문들이 더 눈에 들어왔다."
- 심소미 큐레이터의 기획에는 단단한 리서치(연구 활동)가 돋보인다. ‘모바일 홈’과 ‘마이크로시티랩’의 경우 특히 폭넓은 작가군이 눈에 띈다. 긴 준비 기간과 연구과정 없이는 이정도 규모의 전시를 소화하기 힘들 것 같다.
“전시 준비과정에서 리서치의 중요성을 보여준 전시가 바로 ‘프리-마이크로시티랩’전이었다. 본격적인 ‘마이크로시티랩’ 전시에 앞서 사전전시로 그간의 리서치를 맥락화한 것이다. 큐레이터의 리서치가 어떻게 전시와 맞닿는지를 고민했다. 전시를 기획하기까지의 연구 과정은 전시를 구성하는 모든 과정 속에서 전시의 촘촘한 얼개로 녹아들어간다. 리서치에서 시작된 여정이 전시 기획으로 나아가기까지 질문들을 공유하고, 현재 진행형인 논의의 장을 열어두고자 한다."
- 전시에 참여한 수많은 작가들이 기획과 아주 밀접하게 보인다. 작가 리서치 방법도 굉장히 체계적일 것 같다.
(그가 노트북의 한 액셀 파일을 실행하자, 상당한 분량의 작가 목록이 화면을 가득 메웠다.) “끊임없이 찾아보고 업데이트해 목록화하는 것이 내 방식이다. 흥미로운 작가를 발견하면 이름과 홈페이지 주소 및 연락처, 왜 흥미를 느꼈는지(모호한 지점이 있다면 그 부분도 기입하고), 작가의 작업 정보 등을 기록해둔다. 이 목록을 주기적으로 계속해 업데이트하며 꾸준히 작가에게 관심을 두고 지켜본다. 이 과정이 무척 즐겁다.”
-마이크로시티랩은 메가시티 서울의 아주 미시적인 장소들에서 11개국 출신의 참여 작가 17팀이 각자의 방식으로 작은 개입(침투)을 진행했다.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된 이 프로젝트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작업이나 에피소드는 무엇인가?
“제목의 ‘마이크로’를 붙인 이유는, 미시적인 장소에서 개입이 벌어진다는 이유 외에도, 새로운 무언가를 가져다놓고 이것이 미술이라고 제안하기보다 현장에 태연하게 개입하는 방식을 최소한의 물성으로 제안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한 달간 흥미로운 개입이 많았다. 정이삭 건축가는 동네 슈퍼 앞 언덕길 위의 기울어진 평상을 수평에 맞게 수리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이는 서울에서 건축가가 결코 하지 않을법한 일이었다. 그런가하면 줄리앙 코와네는 60-70년대 건축물에 주로 쓰이던 작은 기하학적 문양의 타일을 스티커로 만들어 빈 점포 내부에 부착했다. 오래된 주택의 옛 타일무늬가 오히려 지나가는 관람객의 발길을 잡고, 실제로 이 타일을 사고 싶다는 문의도 받았다. 멕시코 작가 움베르토 도크는 전철역과 연결돼, 공공공간과 상업공간의 경계가 불분명한 한국의 백화점에 주목했다. 백화점 폐점시간에 고객들의 퇴장을 유도하는 음악을 직접 백화점 앞에서 연주했는데, 백화점 경호원들의 제지를 받기도 했다. 그리고 30분의 연주를 모두 감상한 건 강물처럼 흘러가는 바쁜 시민이 아니라 인근의 노숙인들이었다. 예술의 가치와 개입의 방식, 그리고 진짜 거리의 주인 등 많은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된 순간이었다.”
- 혹자는 도시에 침투하고 개입하는 일련의 활동을 커뮤니티 아트 및 도시재생 활동으로 바라볼 수도 있다. 이들과 구분되는 지점은 무엇인가.
“내 작업은 ‘중심이라고 여겨지는 지점에 대한 딴죽 걸기’라고 생각한다. 구체적으로는 도시에 살고 있는 이들을 고려하기보다 우리가 도시를 소비하는 방식에 더 관심을 둔다. 개입이 무의미할 수도 있고, 개선으로 연결되지 않을 수도 있다. 화이트큐브의 전시담론과 삶의 현장에서 활용되는 미술 그 중간에서 발생하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 최근의 도시담론 기획 전시들과 달리 ‘컬랩스’(합정지구, 2016)는 그 접근 방식이 조금 다르다.
“‘컬랩스’는 동시대적 현상에 대한 작업이다. 사회적 무기력이 팽배한 요즘, 진행 중인 붕괴 구조로서의 사회를 미술로 접근하고자 했다. 우리가 붕괴를 감지하는 건 대부분 재난이 일어난 이후였지만, 언젠가부터 붕괴가 흔한 일상이 됐기 때문이다. 성수대교 붕괴(1994), 삼풍백화점 붕괴(1995), 외환위기(1997), 대구지하철 화재(2003), 경주리조트 붕괴(2014) 이후 불과 3달 뒤 일어난 세월호 침물(2014)까지 근 십년간의 일이었다.”
-독립큐레이터로 나오기 전, 10년 동안 갤러리에서 근무했다. 그 둘의 차이점을 명확히 느낄 것 같다.
“독립큐레이터는 고정적인 수입이 보장되지 않아 지속성이 낮다. 전시 협력자를 조직하는 일도 상대적으로 쉽지 않다. 하지만 스스로 연구하는 태도를 갖고 있다면, 독립 큐레이터의 환경을 자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장점이 된다. 갤러리에서는 주로 2-3개월의 전시 준비기간이 주어진다. 하지만 혼자 독립적으로 전시를 준비할 경우, 재정상태를 살피며 장기간 스스로를 조직화해야 한다. 그건 여전히 내게도 숙제다.”
심소미 큐레이터는...
갤러리 스케이프에서 책임큐레이터(2005-2015), 갤러리킹 공동디렉터(2004-2008), 보충대리공간 스톤앤워터 큐레이터(2003-2004)로 활동했다. 현재는 독립큐레이터로 활동하고 있다. 대표적인 프로젝트로 메가시티 속 마이크로 도시개입을 수행한 ‘마이크로시티랩(2016)’, 지도에 없는 장소를 맵핑한 ‘신지도제작자(2015)’, 이동/이주하는 공간의 사회적 배경을 다룬 ‘모바일 홈 프로젝트(2014)’ 등이 있다.
관련 기사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