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생된 엔젤플레닛과 림보까지
아트벤처스로부터 ‘2017 아트토이컬쳐’ 참여 작가 중 주목 작가를 추천 받아 소개하는 ‘아트토이 덕후’ 시리즈의 열 번째 주인공은 데빌플레닛이다.
▲데빌플레닛의 (왼쪽부터) 강군, 차태진, 형규 작가.(사진=김금영 기자)
(CNB저널 = 김금영 기자) 우리가 사는 행성은 지구. 그런데 여기에 또 눈길을 끄는 행성이 있다. 바로 데빌플레닛(Devil Planet). 범상치 않은 이름뿐 아니라 생긴 형태도 인상적이다. 지구는 둥근데, 데빌플레닛은 이 둥근 행성 양쪽에 뿔 모양이 달렸다.
생명체도 존재한다. 강군을 주축으로 DD(Devil Dog), 밈(Meme)이 데빌플레닛에 살고 있다. 이곳은 어두운 세상이다. 폐쇄적이고 방탕한 분위기로, 강군과 DD, 밈은 미디어 매체 중독, 흡연, 음주 등으로 지루함을 해결한다. 이 세상은 데빌플레닛에 살고 있는 주민이자, 현실의 작가인 강군이 만들어낸 곳이다.
“개인 작업을 할 때 데빌플레닛을 구상했어요. 만화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캐릭터들을 만들면서 여기에 맞는 세계관이 있어야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마냥 환상적인 세계보다는 현실을 기반으로 세계관을 창조하기 시작했어요. 세상은 마냥 밝지만은 않아요. 어두운 면도 함께 존재하죠. 제 기억 속 대다수의 젊은 사람들은 꿈을 생각해볼 시간이 없었어요. 주어진 여건에 맞춰 바로 일에 뛰어 들어야 했어요. 그리고 지루하고 정체된 도시 분위기 속 젊은이들의 유일한 낙이 소비였고요. 그 기억과 20~30대 청년들의 고민거리, 그들의 커져 가는 고민 속 거칠어지는 성격들을 반영시킨 세계, 데빌플레닛을 만들었어요.” (강군 작가)
개를 의인화시킨 DD는 ‘건드리면 가만 안 두겠다’는 포스를 내뿜는다. 권태로 인한 스트레스를 극도의 폭력적인 성향으로 드러내는 것. 하지만 캐릭터들 중 가장 자립적이고, 권태에 대항하는 능동적인 행동을 보여주기도 한다. 물고기 머리를 지닌 밈은 현실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스마트폰 중독자다. 주변 사람들과 대화를 할 때도 메신저로 대화하고, 자신의 상황을 SNS를 통해 중개한다. 이밖에 마약 딜러인 피프티, 사이비 종교 집단의 수장인 라멘헤드, 항상 술에 취해 있는 버니가이즈 등 주민들 하나하나의 포스가 만만치 않다.
그런데 데빌플레닛의 한 구역에 새로운 공간이 생겼다. 그리고 평면에 있었던 캐릭터들이 입체화돼 현실에 구현되기 시작했다. 그림을 그리는 강군 작가와 피규어 작업을 하는 차태진 작가가 만나면서부터다.
피규어 만들던 차태진과 그림 그리던 강군의 만남
▲데빌플레닛의 작가들이 그림으로 탄생했다. 디자인을 맡은 강군(왼쪽)과 조형 작업을 맡은 차태진 작가.(사진=데빌플레닛)
차 작가는 본래 피규어를 만드는 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어렸을 적 아버지가 문방구를 운영해 장난감들은 그가 늘 보는 친숙한 존재였다. 어렸을 때부터의 애정은 직접 장난감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열정으로 이어졌다. 그러다가 아트토이에 대해 알게 됐고, 이 분야에 뛰어들어 15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그런데 일이 익숙해지고 어느 날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게 됐다고.
“피규어에 대해 잘 모를 땐 기계에서 알아서 만들어지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하나하나 사람 손을 거쳐 만들어진다는 것에 놀랐고, 또 매력을 느꼈죠. 2008년 회사에 입사해 열심히 피규어 작업을 했어요. 유명 영화와 애니메이션 캐릭터 등 수많은 작업을 했죠.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이 일을 시작한 게 기술 때문이 아닌데….’ 피규어를 애정이 아닌 일로 바라보며, 기계적으로 손을 움직이는 저를 발견했거든요. 다시 열정을 되찾아야겠다고 생각했고, 기존에 나와 있는 캐릭터가 아닌, 새로운 캐릭터를 창작해 이를 피규어로 만들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차태진 작가)
▲지난해 아트토이컬쳐에 마련된 데빌플레닛의 부스. 작품을 보러 온 사람들로 붐볐다. 현장에서 직접 그림을 그리는 이벤트도 진행했다.(사진=데빌플레닛)
그래서 퇴사를 하고 그림 공부를 하기 위해 학원을 찾았다. 하지만 그림을 그리는 데 익숙하지 않은 차 작가는 학원 지인을 통해 강 작가를 소개받았다. 강 작가는 개인 작업을 하면서 데빌플레닛이라는 세계관을 구축해놓은 상태였고, 여기에 차 작가 또한 흥미를 느꼈다. 그리고 이들의 세계이자 그룹 이름인 데빌플레닛으로 2014년 새 출발했다.
공동 작업으로 데빌플레닛에 새롭게 생긴 공간은 엔젤플레닛과 림보다. 엔젤플레닛은 항상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곳으로, 여성만 산다. 유일하게 남성 캐릭터라 할 수 있는 존재가 TJ인데, 차 작가를 모티브로 만들어진 캐릭터다. 방독면을 써서 무슨 표정을 짓는지 알 수 없다. 본래 데빌플레닛에 있다가 엔젤플레닛으로 쫓겨났다는 짠한(?) 설정도 같이 존재한다. 그래도 엔젤플레닛에서는 떡하니 한 자리 차지했다. TJ는 엔젤플레닛을 소녀들로 이뤄진 클론 군대로 장악하고 있다. 이 클론 군대의 사령관은 루시퍼다. 짧은 머리에 흰 피부로, 훈련된 개들을 항상 데리고 다니며 상대방을 압도하는 카리스마가 가득하다.
그리고 이 클론 군대에 저항하는 세력이 생겼다. 루시퍼와 대결을 펼치는 이 무리에서는 카마엘이 리더다. 긴 머리에 까만 피부로 루시퍼와는 대조를 이룬다. 카마엘 또한 항상 맥스라는 이름의 개와 함께 다니고, 손에서 무기를 놓지 않는다.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액션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특히 여성 캐릭터들을 중심으로 이들의 활약을 보여주는 게 영화 ‘매드맥스’를 떠올리게도 한다.
“여성 캐릭터를 만들자는 의견은 일치했어요. 멋있고 아름다운 선 자체가 여성의 인체에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이 부분이 매우 중요했어요. 그리고 마냥 예쁘기만 한 캐릭터가 아닌, 반전 이미지를 넣자고 했어요. 전쟁이라는 키워드 아래 여성의 부드럽고 아름다운 인체와 대조적인 밀리터리의 결합을 보였죠. 세계관의 경우 ‘매드맥스’ ‘총몽’ ‘보더랜드’ 등 디스토피아 세계관에 영향을 받았어요. 데빌플레닛의 소녀들은 살아가기 위해 전쟁을 계속하고 있죠.” (데빌플레닛)
캐릭터들의 전쟁에서 치열한 현실 읽힌다
▲데빌플레닛, '잇뎀올(Eat'em All)'.(사진=데빌플레닛)
데빌플레닛의 캐릭터들은 무기를 들고 싸우지만 그 모습에서 왠지 현실 속 청춘들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강 작가가 기존에 탄생시켰던 데빌플레닛에 이어 엔젤플레닛에서도 캐릭터들은 ‘힘 있는 자가 위에 선다’는 논리 아래 살아남기 위한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점점 극심화하는 양극화 속 살아남기 위해 오늘도 면접을 보고, 책을 펴고, 일을 하는 청춘들. 그 모습 또한 총칼만 안 들었을 뿐, 전쟁과 다름없다.
각각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데빌플레닛과 엔젤플레닛 사이 림보는 중간 지대로, 광활한 미지의 지역이기도 하다. 사막이나 늪지대, 고산 등 자연 상태가 그대로 방치돼 있는 곳으로, 다양한 평행우주가 교차되는 중간 지점이라는 설정이다. 그리고 이곳으로 흘러들어온 다른 세계의 캐릭터들은 조금씩 자신의 모습과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나중엔 괴물이 돼 황야를 떠돌게 된다.
▲데빌플레닛, '루시퍼'(뒷줄 가운데), '잇뎀올(Eat'em All)'.(사진=데빌플레닛)
이곳에도 저곳에도 속하지 못한 채 정체성을 잃고 방황하는 현대인의 초상이 떠오르기도 하는 지점이다. 데빌플레닛은 “모든 캐릭터를 만들 때 갈등을 기본 전제로 한다”고 말했는데 사람 사는 곳에는 항상 갈등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더 캐릭터들의 모습에 눈길이 갔다.
데빌플레닛과 엔젤플레닛, 림보에 있는 캐릭터들이 다 맡은 직책이 있듯이 작가들도 작업을 할 때 각자 맡은 역할이 있다. 그리고 이 확실한 역할 분담이 데빌플레닛 작품의 특징을 더욱 도드라지게 만들었다. 일단 처음에 어떤 방향으로 작업을 할지 회의를 한 다음 캐릭터 스케치를 강 작가가 시작한다. 캐릭터의 전체적인 느낌이 결정되는 중요한 부분이다. 강 작가가 캐릭터의 앞, 뒤, 옆면을 그리고, 차 작가가 이를 바탕으로 조형 프로토타입을 만드는 작업을 이어간다. 이 작업이 완료되면 도색 작업이 이어진다. 얼굴의 눈 하나하나를 세세하게 손으로 그린다.
“서로 간 피드백 과정이 반드시 필요해요. 처음엔 의견이 일치하지 않을 때도 있었어요. 캐릭터 스케치를 할 때 앞면, 뒷면, 측면 각각을 다 예쁘게 그리면 조형 작업을 할 때 수치가 잘 맞지 않을 때도 있었어요. 그래서 의견을 조율하고 기준을 정하면서 조금씩 맞춰나갔죠. 그러다보니 각자의 의견이 반영돼 캐릭터의 성격이 더 다채로워지면서 흥미로운 결과물이 나왔어요.” (데빌플레닛)
아트토이컬쳐는 시작일 뿐…갈 길 멀다
이들의 협업은 지난해 아트토이컬쳐를 통해 사람들과 공식적으로 첫 만남을 가졌다. 데빌플레닛은 “당시 정말 설렜고,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겠다”며 웃었다. 당시 전시 부스 콘셉트는 ‘다크(dark)’였다. 까만 벽지에 데빌플레닛 로고를 달았고, 기본 캐릭터인 루시퍼와 카마엘, 그리고 헐크를 데리고 나갔다. 작업 초창기라 부스가 허전하다는 생각에 즉석에서 그림을 그리는 이벤트도 진행했다. 그래서 전시가 끝날 무렵에는 벽에 그림이 가득 차 있었다. 평면과 입체의 조화가 어우러진 자리였다.
올해는 더 준비를 갖추고 나왔다. 지난해가 매우 어두운 검은색이 콘셉트였다면, 이번엔 조금 중화시켜서 회색 버전으로 나왔다. 루시퍼와 카마엘을 비롯해 새로운 캐릭터인 잇뎀올(Eat'em All)도 등장했다. 기존에 어두운 성격의 캐릭터가 많았다면 조금씩 밝고 귀여운 느낌을 가미하고 싶어 만든 캐릭터라고. 클론 군대의 구성원인 잇뎀올은 손에 무언가를 들고 있다. 손에 들린 무엇이든지 먹어치우겠다는 생각이다. 체리를 들고 있을 때도 있고, 폭탄을 들고 있을 때도 있다.
▲데빌플레닛, '잇뎀올(Eat'em All)'.(사진=데빌플레닛)
“NNN(Naughty and Nice) 프로젝트라는 콘셉트로 작품들을 선보였어요. 기존의 캐릭터를 비롯해 이번엔 새로운 친구들을 소개하는 자리였죠. 두 번째 라인으로 선보인 잇뎀올도 선보였어요. 온라인상 데빌플레닛에 관심을 가진 고객층이 주로 외국인이었는데, 생각보다 현장에 국내 팬들이 와줘서 놀랐어요. 연령층도 다양했어요. 어머니가 딸에게 피규어를 사주기도 했죠.”
이들은 페어가 아닌 개인전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도 드러냈다. 아트토이에 대한 인식이 과거와 비교해 많이 달라졌다고는 하지만, 아직 아트토이 작가군의 작업을 선보일 자리가 충분하지 않은 상태다. 대형 페어도 아트토이컬쳐를 비롯해 손에 꼽을 정도다.
▲데빌플레닛의 강군 작가가 모델이 된 조형 작업.(사진=데빌플레닛)
“전시에 대한 갈증이 있어요. 작가라면 누구나 있을 거예요. 좀 더 작업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함께 교감할 수 있는 자리가 있기를 바라죠.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우리가 더 열심히 해야 해요. 데빌플레닛과 엔젤플레닛 친구들도 더 열심히 만들어야죠.” (데빌플레닛)
각자 집에서 작업하던 작가들은 2015년엔 공동 작업실을 만들었고, 여기에 새로운 동료로 형규 작가도 들어왔다. 피규어 작업을 돕는 역할을 맡았다. 이 분야를 걷고 싶어하는 친구들을 위한 조언도 전했다. 차 작가는 “과거와 달리 현재는 피규어 업계에서 3D 작업이 필수”라며 “수작업으로 감을 익히는 것은 물론 3D 작업을 미리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데빌플레닛의 강군(왼쪽) 작가와 차태진 작가.(사진=데빌플레닛)
‘혹시 아이디어 고갈에 시달리지는 않느냐’고 묻자 오히려 ‘너무 많아서 문제’라고 웃으며 답했다. 넘치는 아이디어에 아직은 노동력(?)이 부족하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계속 꿈꿀 수 있다고도 말했다.
“요즘 하루일과는 작업이에요. 꾸준히 아이디어를 내고 생각을 쌓아가고 있죠. 지금 있는 디자인을 다 보여드리려면 10년은 돼야 할 것 같아요(웃음). 시간이 걸릴지라도 꾸준히 지금처럼 계속 작업을 하고 보여드리고 싶어요. 남이 시키는 게 아니라 진짜 하고 싶어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작업들을 보여드리고 싶어요.” (데빌플레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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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금영 geumyoung@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