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NB저널 = 김금영 기자) 전쟁과 냉전의 상징이었던 DMZ. 이 DMZ 남방한계선에서 불과 2km 떨어진 곳에 캠프그리브스가 있다. 1953년부터 2004년까지 미군 기지로 사용됐고, 제506연대 철수 이후 텅 비었던 이곳이 예술을 입으며 평화, 생태, 문화의 공간으로 변화하고 있다.
경기도와 경기관광공사가 ‘캠프 그리브스 DMZ 평화정거장(DMZ 피스플랫폼) 사업’의 메인 행사인 예술창작전시를 8월 11일 개막했다. 이 사업의 목적은 캠프그리브스가 지닌 역사와 장소 특정성을 살리는 가운데 문화 예술 공간으로 변모시키는 것.
이응경 예술감독은 “캠프그리브스를 문화로 바꾸기 위한 사업”이라며 “임진강을 따라 내려오는 길에 있는 캠프그리브스는 판문점, 개성 사이를 잇는 중간 거점으로서 활용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안보 공간으로서가 아니라 좀 더 시야를 넓혀 평화의 공간으로 이 공간을 바꿔나가려 했다”고 전시 기획 의도를 밝혔다.
미군 시설이 원형 그대로 보존돼 있는 캠프그리브스에 작가들은 예술의 손길을 입혔다. 김명범, 박찬경, 정문경, 정보경 등 초청 작가 4인 그리고 강현아, 박성준, 시리얼타임즈(강민준, 김민경, 송천주), 인세인박, 장영원, 장용선 등 공모 선정 작가 6인(팀)이 이번 전시에 참여했다. 이들의 작품은 내년 7월까지 약 1년여의 전시 기간 동안 반영구적으로 캠프그리브스에 전시된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인세인박의 작품이다. 놀이공원 입구에 설치될만할 알록달록한 색깔의 구조물에 반짝 반짝 불이 들어온다. 그리고 거기엔 ‘ISM’ ‘잊음’이란 글씨가 적혔다. 이응경 예술감독은 “ISM은 이념을 뜻하고 이를 소리 나는 대로 적으면 ‘잊음’이다. 이 작품은 한국 사회에서 구시대의 산물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존재하는 이념간의 대립을 잊기 위한 의도를 지녔다”며 “캠프그리브스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환영하는 뜻에서 입구 쪽에 설치했다”고 말했다.
인세인박의 작품 옆쪽엔 강현아가 꾸린 ‘기이한 DMZ 생태누리공원’이 보인다. 실제 DMZ 구역 내 일부를 공원으로 설정한 작업으로, ‘DMZ에 이런 동식물이 살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에서 비롯됐다. 예컨대 신경쇠약 증세를 지녔으며 불안한 경계 태세로 인해 고개를 돌리지 못하는 ‘신경쇠부엉이’, 산불이나 위기 발생 시 음파 신호로 근처 동물들을 동굴 안으로 유인하는 ‘산불레이더 땅굴박쥐’ 등 실제로 존재하지는 않지만, DMZ라는 특수한 자연환경 속에서 이런 진화를 해온 동식물이 있지는 않을지 흥미로운 상상력이 발휘된 존재들에 대한 이야기를 펼쳤다.
이처럼 캠프그리브스 곳곳을 거닐면서 작가들의 작업을 볼 수 있는데, 정보경의 ‘미사일 금지구역’도 캠프그리브스 여기저기에 설치됐다. 멀리서 보면 평범한 도로 표지판 같은데, 자세히 보면 미사일 아이콘에 금지 표시가 돼 있는 새로운 표지판이라는 것을 알아챌 수 있다. ‘미사일 금지구역’ 작품은 사람들에게 친숙한 도로 표지판에 전쟁을 상징하는 미사일을 넣어 평화를 바라는 작가의 마음을 담았다.
휘파람 부르고 기타치는 소년병이 거니는 풍경
캠프그리브스 건축물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작업도 있다. 김명범은 탄약고와 정비고를 활용했다. 특히 탄약고는 캠프그리브스의 미군 시설 중에서도 전쟁과 직접적인 연관성이 있었던 곳. 이곳에 미끄럼틀과 그네, 사슴 조형물을 설치해 평화와 놀이의 상징인 ‘플레이그라운드’로 분위기를 전환시켰다. 특히 미끄럼틀은 한쪽 벽으로 쏠려 있어 남과 북의 두 방향으로만 내려갈 수밖에 없게 만들었는데, 지금의 분단 상황을 느끼게끔 한다. 뿔이 뻗어나가는 사슴은 평화의 상징으로 설치됐다.
정비고에선 제주도에서 구한 뿌리 채 뽑힌 나무에 붉은 색 풍선을 가득 매달은 ‘부유하는 나무’를 볼 수 있다. 뿌리가 뽑힌 순간 나무는 생명을 잃었으나 작가의 손길을 거쳐 작품으로 재탄생하며 새로운 삶을 얻었다. 본래의 기능을 상실한 채 몇 년 동안 방치됐다가 되살아간 캠프그리브스의 공간과 이 나무의 이야기가 겹쳐 보인다.
앞서 강현아의 ‘기이한 DMZ 생태누리공원’이 바깥에 있었다면, 장용선의 ‘트레져(Treasure) N37°53′56.8212″E126°43′43.2192″’는 한 건물 안에 울창한 숲이 들어선 느낌이다. 다소 긴 작품명은 캠프그리브스-DMZ의 좌표값이다. 작가는 “DMZ에 설치된 철조망은 남과 북을 나누는 대척점으로 자리한다. 그리고 이 철조망을 징검다리 삼아서 풀이 가득 자라는데, 인간들에 의해 잘려나가기도 한다. 남과 북을 넘나드는 울타리처럼 연관된 풀과 철조망에 관심이 갔고, 이를 바탕으로 울타리를 나무처럼 형상화시키는 작업을 전개했다”고 설명했다.
박찬경의 ‘소년병’과 정문경의 ‘풀 스퀘어(Full Square)’도 눈길을 끈다. 두 작품 모두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지닌 전쟁과 북한에 대한 이미지를 전복시키는 시도를 한다. ‘소년병’에서는 인민군복을 입은 한 소년이 등장하는데, 그 모습이 위압적이기보다는 오히려 순진무구해 보여 눈길을 끈다. 이 소년은 라디오를 듣거나 기타를 연주하는 등 전쟁과는 상관없어 보이는 행동을 하며 돌아다니는데 배경음악으로는 ‘나의 살던 고향은’ ‘휘파람’ 등이 흘러나온다.
이응경 예술감독은 “작가의 어머니가 실제 소년병을 마주한 경험도 이 작품의 바탕이 됐다고 한다. 어머니에 따르면 소년병은 어머니가 평소 생각한 북한의 이미지와 다르게 매우 어렸고 여린 이미지를 지녀 깜짝 놀랐다고 한다”며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북한에 관한 가장 약한 이미지를 만들어 보여주며 이데올로기와 무관한 이미지를 제시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정문경은 연약한 재료로 느껴지는 헌 옷들을 모아 건물 창문을 감쌌다. 이응경 예술감독은 “작가가 처음엔 군복으로만 작업하려 했으나, 군인이라는 이미지에서 벗어나 한 인간으로서의 존재의 흔적을 보여주고자 다양한 평상복들을 작업에 담았다”고 설명했다. 알록달록한 색감의 옷으로 휘감긴 건축물은 아픈 전쟁의 흔적을 벗어나 동화에 등장하는 집처럼 흥미로운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인터랙티브 아트도 감상할 수 있다. 박성준과 시리얼타임즈는 캠프그리브스가 어떤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지 되새기게끔 하는 작품을 선보인다. 박성준은 과거 볼링장으로 쓰였던 공간에 ‘유어 플레임(Your Flame) Ⅱ’를 설치했다. 새까맣던 공간의 한 가운데로 걸어가며 센서를 지나가는 순간, 공간에 폭발음이 터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총격 장면 영상이 벽에 쏘아지며 이곳이 과거에 한국전쟁의 중심지였음을 상기시킨다.
시리얼타임즈의 ‘117kb’는 미군이 철수했던 2004년의 모습 그대로 남아 있는 퀀셋 막사에 설치됐다. 여기서 관람객은 지뢰 찾기 게임을 하듯 온몸을 움직일 수 있다. 그러다 특정 지점에 설치된 센서를 건드리면 실제 지뢰와 지뢰로 착각하게끔 만든 이미지들, 그리고 폭파 이후 생기는 이명소리가 막사를 가득 채운다.
이밖에 철거 예정인 방호벽을 이용한 장영원의 ‘토치카시티 프로젝트: 유사시(有事時)’도 전개된다. 1970년대부터 남침 대비 목적성으로 ‘유사시’를 위해서만 존재해 온 대전차 방호벽들의 마지막 순간을 시각 언어로 풀어내는 작업이다.
캠프그리브스의 산책길을 비롯해 탄약고 등의 오래된 건축물은 예술을 입으며 다시 새로운 시간이 흐르고 있다. 이응경 예술감독은 “과거 캠프그리브스가 안보 역사 체험이 강조됐던 공간이었다면, 이젠 예술을 통해 과거와 현재의 시간을 잇고 미래까지 바라보는 미래 지향적인 장소로 나아가길 바란다”고 말했다.